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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못 받으셨어요?"

지난 17일, 최진욱 영화산업노조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찾은 노조 사무실은 '임금체불' 상담전화로 분주했다. 최 위원장과 약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상담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조감독·촬영·조명 영화스태프들을 중심으로 2005년 12월 설립된 영화산업노조에는 현재 의상·제작·작가·편집 등 15개의 지부가 있으며, 2600명이 조합원이 있다.

지난해 영화산업노조 '영화인 신문고'에 접수된 임금체불은 총 43건. 126명이 모두 합쳐 11억이 넘는 임금을 체불당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금액만 이 정도다. 계약이 반복되다 보니 '을'의 처지에 있는 영화인들은 돈을 '떼여도'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주면 고마운 거고 안 주면 속상한 거고. 나서서 제대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관행이 있다"는 한 10년차 시나리오 작가의 고백처럼 말이다.

'을'의 위치에 있는 영화인들은 대부분 4대보험과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하루 평균 13.5시간을 일하면서도(2009년 영화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조사) "3개월 일하고, 3개월 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노동을 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사이, 20대 조감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30대 시나리오 작가는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리다 숨졌다. 영화산업노조는 9일 성명서를 통해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로 규정했다.

'영화인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달라'며 영화산업노조를 설립한 지 6년. 조명부 출신인 최진욱 위원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제도'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스태프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책당국·제작사와의 교감을 통해 제도를 바꿔나가야 한다"며 "이제는 운동방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최진욱 위원장과의 일문일답.  

"노조조직률 높아야 한다는 생각 버려야"

최진욱 영화산업노조 위원장.
 최진욱 영화산업노조 위원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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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앵떼르미땅(실업부조)' 제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설명해 달라. 
"스태프들이 쉬는 기간 동안 생활을 보조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까 하다가 프랑스의 '앵떼르미땅'을 생각했다.

앵떼르미땅은 예술인들이 일 년에 507시간 이상을 일하면 일이 없는 시기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데, 이걸 한국식으로 최대한 맞춰서 2008년에 '영화산업실무교육센터'라는 걸 만들었다.

'직업능력개발계좌제'의 경우 고용훈련을 받으면 생활비 보조가 나오지 않나. 그런 것처럼 스태프들이 이곳에서 실업기간동안 교육을 받으면 최저임금 수준이라도 지급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쉬는 기간에도 자기 기술이 계속 보존될 수 있고, 현장감도 지킬 수 있고, 네트워크도 형성할 수 있다. 현재 5기까지 진행됐고 1년에 5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예산이 부족하다. 카메라 같은 장비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고."

- '앵떼르미땅'은 실업 혹은 휴직 기간에만 해당된다. 일하고 있는 기간 동안에는 어떤 복지제도가 있나.
"일하고 있을 때는 단체협약으로 풀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일반노사관계하고 다른 게 '사측'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제작사가 도산하거나 없어지는 경우가 많고, 교섭을 진행하려면 해도 조합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 역시 유동적이다. 교섭을 체결한다고 해도 강제할 방법도 없다.

2007년도에 제작사 50개 정도와 집단교섭을 체결했는데 그때는 근로기준법을 그대로 갖다 넣었다. 백화점식으로 나열했다. 최저임금 보장해라, 격주 임금 지급해라, 1주일에 최대 66시간 일해라, 1일 근로 시간(8시간) 초과하면 추가수당 지급해라, 야간근로·휴일근로 수당 지급해라, 4대보험, 여성들의 경우에는 월 1일 유급 생리휴가 보장해라 등등. 잘 안 되더라.

2009년에는 교섭도 하지 못했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단속적 노동환경에 있는 사업장에서 (사측과) 교섭을 해서 안을 만들어낸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교섭할 때는 딱 몇 가지만 확실히 할 계획이다. 4대보험 확실하게, 계약금·중도금·잔금식으로 주지 말고 월급 지급해라. 노동시간 지키자, 넘어가면 오버차지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교섭에 담으려고 한다. 최저임금도 지키고."

- 영화산업노조 조합원이 2600명이다. 조직률이 낮은 거 아닌가.
"1년에 영화가 100편 정도 만들어지면 스태프가 50명. 1년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은 5000명인데 여기에서 두 탕 뛰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3000~4000명 정도가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 수다. 쉬는 사람들은 그보다 두 배 정도 많다. 그렇게 따지면 '영화산업종사가'가 1만 명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 조직률이 낮은 편이 아니다. 

중요한 건 조직률이 아니다. 프랑스도 노조가입률이 10%가 안 된다(예술노조). 그런데도 프랑스 예술노조가 파업을 하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70~80%가 따라간다. 공감대가 있으면 같이 하는 거니까. 노조는 현장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실무적으로 이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뿐이다. 노조조직률로 뭔가를 해봐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해관계 걸려있는 '잘 나가는 사람들', 말 못한다"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남긴 송모씨의 집 출입문에 붙인 쪽지.
 시나리오 작가 고 최고은씨가 남긴 송모씨의 집 출입문에 붙인 쪽지.
ⓒ 민중의소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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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20대 조감독의 자살에 이어 최고은 작가의 죽음까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노조 차원에서 들고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계약이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언제나 우월적인 건 회사고 스태프들은 약자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그 안에서 뭔가를 하기가 쉽지 않다. 한 가지 예로 임금체불 문제, 지난해 공식적으로만 40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왔다. 실제로는 더 많을 거다. 일반적으로는 임금체불을 하면 노동부에 진정을 하거나 민사소송을 한다. 그런데 스태프들은 이게 불가능하다. 민사소송? 가압류? 가압류 집행한다고 해서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나라는 영화 투자자금이 영화발전기금에서 나온다. 공기금으로 만들어 놓은 거니까 법 안 지키는 사업장(제작사)한테는 투자자금을 안 주면 되는 거 아닌가.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 차원에서 체불 사업장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도록 하고 있다.

이게 지난해부터 시작을 했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영향이 있을 거다. '너희들 왜 파업 안 하니'. (파업)하고 싶다. 그런데 파업이 목적이 아니지 않나. 이제는 '운동'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정부와 제작사와 교감하면서 제도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다."

- 이른바 '힘 있는' 영화인들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
"아주 유명한 영화가 있다. 돈 많이 번 영화의 시나리오다. 그런데 이게 도용된 거라고 신고가 들어왔다. 계약금만 준 시나리오였는데, 결국 (신고 후에) 잔금만 받고 끝났다. 일반 사람들 같았으면 손해배상 걸어버리겠지. 엄청 흥행한 영화니까. 그런데 그렇게 못했다.

시나리오 마켓? 시나리오 다 도용된다. 아이템 다 빼간다. 원래 이 판이 그렇다. 그래도 시나리오 작가들은 말 못한다. 시나리오는 저작권이 핵심인데…."

- 그게 일종의 '관행'처럼 생각된다고 하더라.
"저작권 요구, 개개인은 못하지만 개개인이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다. 1~2% 그룹들, 잘 나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다. 그게 사회적 책임 아닌가. 그런데 다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에 말 못하는 거다.

업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늘 함구해왔다. 그런데 나는 함구하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제작사야 당연히 말 안 하는 거고, 사용자성이 강한 감독들이 이 문제를 과연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의식 있는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문제제기가) 나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 왜 말 안 하니' 이럴 필요는 없다. 그 사람들 정체성이 그거다. 밖에서 볼 때는 의식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 노사관계 안에서는 분명히 사용자들이다. 그 사람들의 위치를 보면 된다. 당연히 못하지 않겠나.  

영화라는 게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것 같지만 굉장히 이기주의적이다. (영화에서는) 노동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정작 내 안의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포장만 화려하다.

그래서 요즘 김여진씨 같은 배우 보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다 해준다, 한 번이 아니라 끝까지. 김여진씨 같은 사람들은 굉장히 멋진 사람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편하고 고마운 거지,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걸 탓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바꾸고 있으니까."

"예술인 복지법, 이번에 처리 안 되면 10년 기다려야"

최고은 감독의 영화 <격정소나타>의 한 장면.
 최고은 감독의 영화 <격정소나타>의 한 장면.
ⓒ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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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석 감독은 최고은 작가 죽음의 '인력과잉'에서 찾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경제학과 나온다고 해서 모두 경제관료가 되거나, 정치학과 나와서 모두 정치쪽에 진출하는 건 아니다.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한 건 어디에서나 똑같은 거고, 그런 것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건 아닌 것 같다.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그간의 과정을 모르는 게 아니지 않나. 극장을 가지고 있는 3개의 대기업이 투자에 배급에 제작까지 다 같이하게 된 '수직계열화'만 해도 그렇다. 그게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보면, 그걸 주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에 수혜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책임이 없다', '모호하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자. 분명히 책임자가 있다."

- 영화인들이 침묵하는 사이 트위터에서는 최고은 작가의 '사인'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사인이 뭐가 중요한가.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면서 살아온 한 청춘이 사회보장제도의 그늘에서 어렵게 살다 죽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많이 죽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중요한 거 아닌가. <한겨레>에 대한 비판도 많던데 나는 <한겨레>가 언론의 책무를 다 했다고 본다. '밥 좀 주오'라는 말을 안 한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건 핵심이 아니다.

정치인들에게도 '해놓은 것도 없이 밥숟가락 얹어놓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 역할이 그거다.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문제인 거지, 그걸 가지고 문제 삼는 건 정치 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 '예술인 복지법' 이야기를 해보자.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2009년 '예술인 복지법'을 발의한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해당 법안 처리를 촉구하기도 했는데. 야당 역시 같은 의견이다(인터뷰 다음 날인 18일 전병헌 민주당 의원은 예술인 공제조합을 통해 예술인들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예술인 복지지원법', 일명 '최고은법'을 발의했다).
"솔직히 2009년에 예술인 복지법이 발의되는 걸 보면서 놀랐다. 이렇게 세상은 변하는 구나. 입법기구의 힘이라는 게, 의지만 있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해도 안 됐던 걸 이렇게 쉽게 할 수 있구나.

예술인 복지법의 골자는 예술인의 노동자성 인정과 4대보험이다. 예술인들을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의 틀에 포괄적으로 포함시키는 거다. 저희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엄청난 일이다. 이게 통과가 되면 문화예술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거다. 물론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에 예술인들을 넣게 되면 돈 문제도 있고, 법 문제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수정·보완해서, 이번에는 꼭 처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번에도 미뤄지면 또 10년을 기다려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제도들이 다른 산업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특수한 게 아니다. '노동 다양성'을 인정하는 하나의 지원제도가 만들어지게 되면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좀 잘 해서 다른 데도 도움이 되고싶다."


태그:#최고은, #영화산업노조, #영화노조, #최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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