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가 오늘(2월 22일)로 창간 11돌을 맞았습니다. 그간 오마이뉴스와 함께 시민참여저널리즘을 일궈왔던 독자, 시민기자,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11살 생일 날, 시민기자들의 소회를 모아 기사로 내보냅니다. [편집자말]
16살 공장에서 일하다 철판에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한 달여 정도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태어나서 읽었던 책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책을 병원에서 읽었다. 며칠에 한 번씩 병원에 오는 아버지는 내가 종이에 적어준 책 목록을 가지고 서점에 들러서 소설, 수필 등의 책을 사다 주었다. 아버지의 심정(공부를 더 가르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헤아리지 못한 철부지 같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고인이 된 아버지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이때 나도 소설이나 수필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노트를 펼쳤지만 머릿속에서 생각만 맴돌 뿐, 단 한 줄도 나가지 못하고 덮었다 펼쳤다를 며칠간 반복하다가 쓰게 된 것이 자서전 형식의 일기였다. 그 당시 '000의 비망록' 류의 책이 유행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몇 년간 일상의 느낌을 일기처럼 쓰고는 했다가 군대를 가면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보물처럼 숨겨둔 노트 몇 권은 서너 번의 이사를 하면서 분실했는지 찾지 못한 것이 지금도 무척이나 아쉽다. 그 때 이후로 글쓰기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서 글쓰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기자'라는 말이 무척 부담스러웠지만...

2000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회원에 가입을 하고 글쓰기에 다시 시동을 걸었지만 자꾸만 '기자'라는 단어가 부담이 되었다. 기자라는 것을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높은 수준의 지식이 필요한 특수 전문직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정규 학력의 전부인 나의 매우 짧은 (학교) 지식으로 함부로 덤빌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감을 가지고 글을 써보기로 했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기자는 어떤 사건을 가지고 써야 한다는 형식에 얽매이기 시작하자 글이 안 나왔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또 일기형식으로 써보는 것이었다. 내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창간 첫해 9월에 내보낸 첫 기사가 '버금'(오마이뉴스는 잉걸, 버금, 으뜸, 오름으로 기사 배치를 한다)에 오르자 기쁨과 함께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로 1년여간 13개의 기사를 송고해서 버금 4개, 잉걸 6개, 생나무 3개를 기록했다.

이후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7년간이나 기사쓰기는 중단되었다. 일 때문에 기사쓰기는 중단했지만, 틈틈이 시민기자들의 기사를 읽는 재미를 느끼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해 보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내 실력으로는 어림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마이뉴스의 영향력과 시민기자들의 필력은 전문기자 못지 않았기에 기사쓰기는 사실상 완전히 포기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 오창균

관련사진보기


그러다가 2008년 11월 한 통의 전화를 받은 것이 다시 기사쓰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기사에 댓글을 쓴 것을 보고 편집부에서 기사로 써달라고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이다. 흔쾌히 수락하고 기사를 송고해서 톱 기사인 '오름'에 등록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후로 꾸준히 '사는이야기'를 주제로 기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호사다마'라고 하던가. 편집부 응모글에 올린 기사가 다시 '오름'의 영광과 함께 당선작으로 선택되었지만 후폭풍이 너무 거셌다. 각종 포털의 메인에 뜬 기사를 아내가 읽은 것이다. 집안 이야기를 세상에 까발린 나에게 당장에 기사를 삭제하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변명으로 빌어도 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 감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자로서의 자존심이 발동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졌지만 그 후로는 집안 관련 이야기는 조심하게 되었다.

'사회부' 시민기자로 거듭나다

사는이야기만 쓰다보니 소재도 고갈되고 글 쓰는 재미도 반감이 되는 시기가 왔다. 그러다 보니 별 시시콜콜한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되는 '권태기'가 찾아온 것 같아서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기사가 될 만한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노인들을 상대로 '저질쇼'를 보여주고 물건을 강매하는 홍보관이란 곳에 들어가서 두시간 동안 몰래 사진도 찍고, 끝난 후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을 인터뷰도 해보면서 사회부 시민기자로 거듭나고자 하기도 했다.

한 초등학교 공사현장의 문제점을 취재한 기사를 올리자 난리가 났다. 학교측에서 기사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며 당장 내리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오마이뉴스와 나에게 압박을 해왔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일에 무척 당황을 했지만 당시 통화를 하면서 내막을 알아보던 오마이뉴스 상근기자가 기사내용이 사실이라면 걱정하지 말라며, 법적인 것은 오마이뉴스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힘을 줬다.

학교에 가서 행정실 책임자, 공사 책임자와 기사내용을 가지고 설전을 벌였다. 서로 고성이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사진, 동영상) 앞에 그들은 일단 물러섰고, 오해가 될 수 있는 일부 문구에 대해서만 수정을 했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 기사를 내릴 것을 재차 요구하는 바람에 교장을 만나 취재경위와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거자료를 내밀어 결국 사과를 받아냈고, 다음날 가정통신문을 통해 공사현황을 학부모에게 알리게 했다. 그때의 일이 시민기자로서 가장 힘들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된 계기도 되었다.

그후로도, 집회를 하는 철거민이나 노점상 인터뷰도 해보고, 사실 확인을 위해서 지식경제부처의 사무관과 전화통화도 해보면서 시민기자라고 해서 위축될 필요는 없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취재원에게 자신있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취재를 하고 있다. 몇 차례 취재는 사실여부 확인이나 객관적인 기사가 어렵다는 판단으로 폐기하거나 중단한 경우도 있었다.

시민기자 학교도 글쓰기에 도움, 적극 활용해 보시라

취재수첩과 카메라 등은 항상 내 몸과 함께 다닌다.
 취재수첩과 카메라 등은 항상 내 몸과 함께 다닌다.
ⓒ 오창균

관련사진보기


오늘(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1주년을 맞이해서 시민기자들의 활약을 더 많이 기대해 본다. 자주 기사를 올리는 시민기자가 안 보이거나 기사채택이 안 된 것에 불만을 드러내는 경우는 무척 안타깝기도 하다.

기사는 쓰고 싶은데 어렵다고 느낀다면 '사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뛰고 싶은 지점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도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적극 활용해 보시라.

☞ 16기 시민기자 글쓰기 강좌 신청하기

올해는 발로 뛰는 기사를 많이 쓰려고 한다. 카메라와 취재수첩 외에 녹음기도 필요할 것 같아서 주문 완료했다.


태그:#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학교, #비망록, #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