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만나게 된다. 사천왕상은 대개 '사천문(四天門)'이나 '사천왕문(四天王門)' 등의 현판을 단 곳에 있다. 이 '사천왕'은 '사대천왕', '사왕' 혹은 '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부른다. 세상을 보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천왕은 사방을 뜻하는 것으로, 동방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자리한다. 또한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이 있으며, 북방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한다. 사천왕은 두 분씩 모시기 때문에 한편에는 동방과 북방, 그리고 다른 한편엔 남방과 서방을 모신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동방 지국천왕과 북방 다문천왕이 있고,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이 모셔져 있다.
해질녘에 달려간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만나다지난 23일, 오후 5시가 넘어 길을 나서 달려간 송광사. 바쁘게 움직였지만 사천왕을 모신 전각의 문을 닫아걸려고 한다. "잠깐만요"를 외치며 쫒아갔다. 헐떡거리며 "사진 몇 장만 찍고요"하고는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고맙게도 일부러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 길을 묻고는 제대로 차에서 내려 인사라도 하고 싶지만, 갈 길을 재촉하다가 보면 예의를 제대로 차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늘 마음이 아프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소재한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소조사천왕상이다. 소조란 흙으로 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보기에도 커다란 이 소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사천왕상은 크기 면에서도 압도를 하고 있지만, 색을 입힌 모습이나 그 조성이 뛰어나다. 몇 번인가 들린 송광사인데도, 오늘따라 사천왕상이 달라 보인다. 그동안 자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속으로 반성을 해본다.
문을 달아 낸 전각 형태의 '사천왕전'완주 송광사는 사천왕을 모신 곳을 천왕문으로 하지 않고, '천왕전(天王殿)'이라 적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천왕문이 여닫는 문이 없는데 비해, 송광사는 여닫는 문이 있어 '문'이 아닌 '전'으로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의 사천왕상은 그 조성연대가 적혀있다는 것이 가치를 더욱 높인 것으로 보인다.
서방을 지킨다는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인 1649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글이 적혀있다. 또한 광목천왕상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성연대가 확실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은,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다.
사천왕은 '악귀를 쫒는 힘'을 갖고 있다사천왕상을 보러 달려갔는데 대웅전을 향한 우측 안 편에 있는 천왕상을 흰 천으로 가려놓았다. 북방 다문천왕의 팔이 훼손되어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언제 어떻게 자연적인 훼손이 될지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이 애써 보존을 하지 않는다면, 한 해에도 수많은 문화재가 우리 곁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한쪽 팔을 가린 북방의 다문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성한 동방의 지국천왕은, 팔을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띠를 왼쪽 옆구리에 걸쳐 두르고 있다. 남방의 증장천왕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다. 용은 팔뚝을 한번 감아 올라가고 있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왼팔을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놓았다. 이 보탑은 1786년에 새롭게 조성을 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사천왕상의 다리 쪽에는 악귀들이 있다. 이 악귀들의 형태도 각각 다르다. 이런 악귀의 모습으로 보아, 사천왕은 불법과 불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하네'사람들은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흔히들 농담 삼아 '지은 죄가 커서 그런가봐. 그 앞에만 가면 괜히 기분이 이상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정작 사천왕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스스럼없이 사천문을 드나들지만, 처음에는 옆으로 돌아다녔다. 아마 당시 나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 설명이라도 해주었다면, 좀 더 편하게 드나들었을 것을.
겨우 문을 닫는 것을 막아선 채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섰다. 다음에 복원이 다 끝난 다음에는 초라도 한 자루 켜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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