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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독립유공자 유족 찾기 김세호 태안군수 일행과 함께 꼬불꼬불 비포장 소로길을 따라 독립유공자 유족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 험난한 독립유공자 유족 찾기 김세호 태안군수 일행과 함께 꼬불꼬불 비포장 소로길을 따라 독립유공자 유족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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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군에도 독립유공자 유족들이 10가구 거주하고 있지만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태안의 대표적인 애국지사하면 원북면 반계리 출신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해 개화운동을 추진하고 1910년 강제합병 이후 독립투쟁을 전개했으며,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과 더불어 남면 몽산리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했으며, 1907년부터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를 창설하여 대동공보를 발행하는 등 구한말·일제강점기간 동안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로 활발한 재미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우운 문양목 선생을 들 수 있다.

이 두 항일운동가는 태안의 대표적인 애국지사로서 후세에도 이름을 떨치며 생가지 복원 등 성역화를 추진하는 등 태안군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더해 이름은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옥파 선생과 더불어 원북면 출신으로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고 이익교 선생을 비롯해 홍순대, 한춘산, 김봉국, 이문협, 장태형, 고계문, 최기석, 김정진, 최중삼 선생 등 10분의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이 태안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익교 선생은 비록 서산 부석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지만 태안 출신 애국지사로서 그동안 안타깝게도 그 이름이 묻혀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난해 제91주년 3·1절을 계기로 정부포상이 확정되면서 대통령 표창을 전수받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다.

1883년 원북에서 태어난 고 이익교(1883~1975) 선생은 중일전쟁이 종지부를 찍은 1939년 1월부터 3월 중 인근 서산 부석에서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여 조선이 일본의 착취에서 벗어나 다시 부흥할 수 있다"고 선전하다 일본 순사에게 체포돼 징역 8월을 선고받는 등 항일투쟁의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다.

고 장태형 선생(1906~1945)도 비록 태안 출생은 아니지만 함경남도 원산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안타깝게도 광복을 보지못한 채 1945년 4월에 순국, 2005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는 등 태안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희생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유족이지만 정부 관심 및 지원부족으로 어려운 생계 유지

할머니의 눈물 이익교 선생의 외손녀 김순식 할머니는 최근 쌀이 떨어졌는데 이날 전달받은 위문품인 상품권으로 쌀을 구입하게 됐다며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 할머니의 눈물 이익교 선생의 외손녀 김순식 할머니는 최근 쌀이 떨어졌는데 이날 전달받은 위문품인 상품권으로 쌀을 구입하게 됐다며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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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의 생활은 어떨까. 지난 25일 독립유공자 유족들을 위문하기 위한 김세호 군수 일행과 동행을 자청해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거주하는 세대를 방문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 이익교 선생의 외손녀인 김순식(80) 할머니의 집. 원북면 소재지를 지나 작은 소로길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타고 한참을 찾아들어간 곳에 위치한 김 할머니의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살림살이가 힘들어보이지는 않았다.

나무를 하러 가던 중에 만난 김순식 할머니 이익교 선생의 외손녀인 김순식 할머니는 직접 나무를 구해서 아궁이의 불을 지피며 살고 있다. 불편한 몸이지만 한 손에 톱을 들고 땔감을 구하고 있다.
▲ 나무를 하러 가던 중에 만난 김순식 할머니 이익교 선생의 외손녀인 김순식 할머니는 직접 나무를 구해서 아궁이의 불을 지피며 살고 있다. 불편한 몸이지만 한 손에 톱을 들고 땔감을 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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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80년에 준공한 것으로 적혀있는 머릿돌과 뜯겨져 나간 흙벽, 나무로 불을 지피는 아궁이를 보는 순간 '아직까지 이런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초라해보였다. 그러면서 첫 대면에서 김 할머니가 불편한 몸을 이끌며 톱을 들고 나무를 구하러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겨우 몸을 마루에 기댄 채 말을 잇는 할머니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외할아버지 이익교 선생님에 대해서 기억나시는 거 있어요?"
"예전 기억에는 외할아버지가 호랑이처럼 엄했던 것 같다"
"그럼 독립운동 하셨던 것에 대해 아세요?"
"몰랐다. 이렇게 군수가 찾아와서 위문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살아왔으면서도 김 할머니는 이익교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는지 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정부의 무관심을 반증하는 것으로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외할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아주 큰 일을 하셨다"며 충남도와 군에서 준비한 1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건네는 군수의 손을 부여잡은 김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며 "쌀도 다 떨어져 가는데 너무 고맙다"고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독립유공자 장태형 선생의 유족을 찾은 김세호 군수 장태형 선생의 둘째 아들인 장기송씨의 집 현관에는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장씨가 아들과 함께 25만원을 들여 제작해 내걸었다고 전했다.
▲ 독립유공자 장태형 선생의 유족을 찾은 김세호 군수 장태형 선생의 둘째 아들인 장기송씨의 집 현관에는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장씨가 아들과 함께 25만원을 들여 제작해 내걸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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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에 이어 방문한 곳은 장태형 선생 아들이 살고 있는 원북면 동해리.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내걸린 현판과 함께 번듯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집은 번듯하지만 내부사정을 전해들은 일행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태형 선생의 둘째 아들이라고 밝힌 장기송(76)씨는 "원산이 고향인데 가족들과 함께 월남해 동해리에 자리를 잡은 뒤로 줄곧 남의 농사를 지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며 "이 집도 정부로부터 받은 융자와 농사지면서 꼬박꼬박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이라고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

현판의 오자를 지적하는 김세호 군수 원북면 동해리 장태형 선생의 아들인 장기송씨와 대화를 나누던 김세호 군수가 현판의 오자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현판의 오자를 지적하는 김세호 군수 원북면 동해리 장태형 선생의 아들인 장기송씨와 대화를 나누던 김세호 군수가 현판의 오자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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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군수 일행을 따라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나봤지만 마땅히 국가로부터의 보호테두리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됐던 후손들이 어려운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들을 위한 국가적 지원이 확대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김순식 할머니의 경우에는 군으로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서 받는 금액 이외에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받는 혜택이 전무한 상태여서 도움이 절실해 보인다.

이와 관련해 태안군 관계자는 "독립유공자 가족에게는 의료비 지원 등 지원이 되고 있지만 보훈청에서 재산 등을 고려해 지원대상을 선정하기 때문에 김 할머니가 제외된 상태"라고 전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면서도 녹록치않은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보훈가족들을 위한 지원이 확대돼 보훈가족의 사기를 높이고 사회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배려가 절실해지는 대목이다.

독립유공자 장태형 선생 유족 장기송 씨
부친 장태형 선생, 서대문 형무소 고문 후유증으로 39살에 순국
유족들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월남해 동해리에 정착

독립유공자 장태형 선생의 아들 장기송씨 월남 후 태안군 원북면 동해리로 내려와 남의 집 농사를 지으며 쉽지 않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 독립유공자 장태형 선생의 아들 장기송씨 월남 후 태안군 원북면 동해리로 내려와 남의 집 농사를 지으며 쉽지 않은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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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31호 동해리 1구 독립유공자의 집, 故 장태형 子 장기송'

제92주년 3·1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유족 위문을 떠나는 김세호 군수 일행을 따라 동행해 찾아간 원북면 동해리의 장기송씨 집 현관에는 이와 같은 현판이 걸려 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했던 옥파 이종일 선생, 대동보국회를 조직해 활발한 재미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우운 문양목 선생은 익히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애국지사다.

하지만, 이름도 낯선 장태형 선생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 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기자 또한 이날 동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장태형 선생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지켜보지 못한 채 39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장태형 선생에 대해 칠순을 넘어선 그의 아들인 장기송씨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장태형 선생은 1906년 9월 27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당시 조직되었던 원산청년동맹회에 가입,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원산청년동맹회는 사회주의 계열 청년단체로 일제식민지 지배체제를 배척하고 청년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단체다.

장태형 선생은 그렇게 청년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체포돼 1932년 3월 징역1년을 선고받고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아들 장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9살이었는데 은닉생활로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면서 "돌아가실 당시 7명의 동지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된 6명의 동지를 대신해 옥살이를 대신했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뒤 항일투쟁을 벌이다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보지못한 채 광복을 4개월여 앞둔 1945년 4월 3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또 "아버지의 순국 이후 원산에서 내려와 곧바로 원북면 동해리에 터를 잡고 남의 농사를 지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며 "하지만 아버지의 묘소는 현재 이북에 있고 당시 항일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분들로부터 공동묘지 모처에 묘소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어 묘소 위치는 알고 있지만 갈 수 없다"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장씨는 아버지의 묘소를 직접 찾지는 못하지만 해마다 3·1절이 되면 서울 국립현충원과 천안 독립기념관을 오가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한편, 국가보훈처에서는 장태형 선생의 항일투쟁 공적을 인정해 지난 2005년도에 건국포장을 수여한 바 있다.

덧붙이는 글 | 태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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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의 지역신문인 태안신문 기자입니다.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밝은 빛이 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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