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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절을 일깨워준 독자

 

어제(2월 28일) 저녁, 부산에 사는 한 독자(ID 영양고추)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일이 3 ․ 1절이기에 문득 내 생각이 나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안부와 근황을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자리에서 곰곰 생각해 보니까 그분은 삼일절을 맞아 나에게 기사 한 꼭지를 들려달라는 주문 같았다.

 

사실 나는 이즈음 오는 여름에 펴낼 책의 원고 집필로 그 일에 빠져 골몰하지만 그 독자의 후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판 앞에 앉았다. 어느 작가는 그랬다. "한 독자를 위하여 글을 쓴다"고.

 

지난해 국치일인 8월 29일, 망국 100주년에 맞춰 <일제강점기>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을 쓴다고, 이즈음에는 새 원고를 쓰기 위해 근현대사 문헌 속에 파묻혀 지낸다.

 

서양에서 못된 제국주의를 배운 일본이 그 실습지로 택한 곳이 지난날 은혜의 나라 조선이었다. 그들은 1875년 9월 20일, 운양호에 대포를 싣고서 강화도 초지진에 나타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하면서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4백여 년 '소중화(小中華)'에 도취된 채 바깥세상의 물정을 모르던 조선은 마치 어뢰를 맞은 함정처럼 시나브로 가라앉기 시작하여 1910년 마침내 완전히 침몰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일제 무단통치에 이 땅의 흰옷 입은 백성들의 분노가 "대한독립만세!"로 용암처럼 쏟아진 게 기미년 3 ․ 1 만세운동이었다.  이 3 ‧ 1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 4월 두 달 동안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으로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한 전 민중이 참여한 건국 이래 최대의 만세운동이었다.

 

최근 10여 년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거나 우리 역사, 특히 근현대사의 책장을 넘기며 울분한 것은 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대한 무감각이요, 한편으로 감동하면서 우리 겨레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은 흰 옷 입은 백성들이 제국주의자에게 끊임없이 항쟁하였다는 사실이었고, 이에 가슴 뿌듯했다.

 

망해 가는 나라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이도 무지렁이 백성들이요, 이미 망한 나라를 되찾겠다고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디하지 않고 제국주의자의 총칼에 맞아 죽고, 굶어죽고, 얼어 죽은 이들도 거의가 이름없는 백성들이었다.

 

오성술 의병장

 

3 ․ 1절을 92주년을 맞아 지금 내 머리 속에는 숱한 인물이 명멸하고 있다. 그 가운데 호남의병 답사 길에 만난 오성술 의병장의 손자 오용진씨에게서 당신 집안을 이은 이야기를 들은 바, 이를 3 ․ 1절 아침에 전해 드린다.

 

오성술 의병장은 1884년 전남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로 본명은 인수(仁洙), 자를 성술(成述), 호를 죽파(竹坡)라 하였다. 참봉이었던 아버지 오영선(吳榮善)은 마을에서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분으로, 외아들 오성술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906년 1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충남 논산 노성의 궐리사에서 각지 유림을 모아 시국강회를 열고는 국권회복투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시국강회에 참석한 오성술은 강회가 끝난 뒤 면암에게 창의의 뜻을 밝히고는 마침내 1907년 2월, 고향마을 용진산을 근거지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의 깃발을 들었다.

 

오성술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그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오 의병장은 외아들이었다.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어머니는 부대로 찾아가 아들에게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아들은 차마 어머니의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옷 갈아입고자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치마로 방문을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이 고맙습니다."

 

오용진씨는 이야기 도중에 고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는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였다.

 

 

단장의 영산강 포구

 

오성술 의병장은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오성술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곧 대구감옥으로 이감케 되었다. 당시에는 육로 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구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목포로, 목포에서 다시 부산으로, 부산에서 육로로 대구에 갔다고 한다.

 

오 의병장이 일본 순사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자 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서 영산포 포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산강 포구 뱃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차마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 갓난아이를 사이에 둔 젊은 부부의 영산강 나루터 이별은 아마도 창자가 찢어지는 아픔이었으리라.

 

"여보, 잘 가시오."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 잘 부탁하오."

"염려 마시오."

"………"

 

부인 나씨는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당신 아들을 누가 볼세라 시집을 떠나 몰래 길렀다. 일제 군경과 밀정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나주군 문평면 쌍정마을 친정 남동생 집에서 키웠다고 한다. 아버지 오성술 의병장은 일제강점 직후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했지만, 그 아들은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자라면서도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악몽 같은 일제강점기를 넘겼다고 했다.

 

처음에는 오용진씨 이야기를 웃으며 들었는데 곧 내 눈시울이 젖었다.


태그:#3 . 1절, #오성술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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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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