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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보건의 관사 제가 사는 나로도 보건지소의 모습입니다.
▲ 공중보건의 관사 제가 사는 나로도 보건지소의 모습입니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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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보건의들이 보건지소를 선택할 때 따지는 것 중 하나가 관사의 등급이다. 방이 넓고 욕실이 크길 바란다. 이왕이면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관사면 더 좋겠다. 혼자 사는 사람한테 방 많아서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내가 있는 나로도 보건지소는 살기 힘든 곳이겠다. 다른 곳은 방이 기본 2개라는데, 단칸방에다가 크기도 제일 작다. 유일하게 외부계단도 없다. 관사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1층으로 내려와서 보건지소 복도를 통과해야 한다. 복도에 서성이는 환자들과 여사님들의 시선이 은근히 신경쓰인다. 

그래도 괜찮다. 혼자 사는데 방이 크면 채우기만 힘들지. 발은 쭉 펴고 잘 수 있으면 되고, 주방도 있고 화장실도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욕심이 없어서 불만도 없다. 오히려 힘들었던 것은 물이었다.

나로도 보건지소 건물 꼭대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정수장에서 흘려보내온 물을 물탱크에 담는 시간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2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물공급이 끊긴다. 2시간 동안 받은 물로 24시간을 써야 한다. 그러다보니 목욕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감질맛 난다. 큰 냄비에 물을 다 받는데 1분이 걸린다. 손빨래를 하려고 대야에 물을 받으면 한동안 멍하게 기다려야 한다. 한 번은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세수를 하려고 물을 트는데, 샤워기에서는 병아리 눈물만 나올 뿐.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시간에 씻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비니를 뒤집어쓰고 진료실로 내려갔다.

수압을 강하게 만들어보려고 물탱크에 올라가 봤다. 전기펌프를 작동시켰더니 '웅웅'하는 소리와 함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그날은 신이 났다. 하지만 여사님들의 말 한 마디에 풀이 죽었다.

"펌프 틀면 물 빨리 닳아요. 저번 여름 때 그렇게 펑펑 쓰다가 오전부터 물이 안 나오는 거야. 누가 화장실에 똥을 쌌는데 물을 못 내리잖아요. 여름이라 냄새가 아주 그냥...  그날 화장실 출입금지 했잖아."

전기펌프를 끄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운명이다.'

누가 그랬던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떻게든 살아지는 법이다. 냄비에 물을 받으면서 책을 한 페이지라도 본다. 손빨래를 할 때는 주물럭 하는 동안 다른 대야에 계속 물을 받는다. 빨래감을 다 비벼놨을 즈음 대야에는 물이 가득 찬다. 아침에 목욕을 제대로 하기 위해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일어난다. 

이런 나에게 최근 슬픈 일이 일어났다. 물탱크를 청소하러 사람들이 왔단다. 청소하는 동안 밸브를 잠궜다. 일을 마치고 원상태로 해놓지 않아서 물이 아예 끊겨버렸다. 빨래가 급한데, 세탁기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물탱크에 서너 번 왔다 갔다하면서 서서히 짜증이 밀려왔다. 이토록 빨래가 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전기가 끊긴 소녀가장이 촛불을 켰다가 화재로 숨진 사건이 기억났다. 물과 전기를 끊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주말이 되었다. 구겨진 빨래감을 뒤로 하고 집에 갔다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세탁기를 틀었더니, 예전처럼 나오는 물줄기. 그래봐야 '콸콸'은 못 되고 '졸졸'이지만, 바싹 말라버린 논바닥에 가랑비는 폭우 부럽지 않은 법이다. 빨래를 널면서 통쾌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하찮은 일일지 모른다. 그깟 빨래쯤이야.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일도 위대하게 보일 수도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위대하게 만들어 준 이번 일에 대해 은근히 고마움까지 느껴졌다.


#나로도#보건지소#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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