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귀국에 이은 속전속결 검찰수사로 안원구 전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구속중)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림강매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안 전 국장은 지난해 1심과 2심에서 모두 '징역 2년, 추징금 4억 원'을 선고받은 뒤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안 전 국장에게 '유죄'가 선고됐지만, 검찰이 주요하게 제기해 온 공소사실들은 기각됐다. 국세청 고위공무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기업들에 미술품을 강매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는 검찰쪽 주장에는 사실상 '무죄'가 선고된 것. 그런 점에서 검찰수사의 실마리를 제공한 국세청은 물론이고 검찰도 표적수사를 했다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검찰(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은 지난달 28일과 지난 4일 각각 한 전 청장(피의자)과 안 전 국장(참고인)을 소환조사했다. 특히 한 전 청장의 연임로비-태광실업 표적세무조사 의혹 등과 관련, 두 사람의 진술이 완전히 달라 조만간 대질신문을 할 계획이다.
정권교체기 2007년부터 시작된 한상률-안원구 '악연사'
조만간 검찰에서 만나게 될 한 전 청장과 안 전 국장의 '인연'은 정권교체기인 2007년 12월과 2008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의성출신인 안 전 국장은 대통령직 인수위 파견자로 내정된 상태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참모인 주호영 한나라당 의원의 추천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안 전 국장은 인수위 파견을 접어야 했다. "한 전 청장이 그를 불러 인수위에 가지 말고 나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결국 인수위 파견자는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현동 현 국세청장으로 결정됐다.
'충남' 출신인 한 전 청장에게는 안 전 국장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대구·경북'(TK)출신인 안 전 국장의 힘(인맥)을 빌려 유임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안 전 국장은 정권 실세로 떠오른 박영준 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도 친분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차장은 오랫동안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을 보좌했다.
한 전 청장은 안 전 국장에게 "이상득 의원을 찾아가 내가 이명박 정부에서 유임될 수 있도록 말씀을 잘 드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후 안 전 국장은 두 차례 의원회관을 직접 방문해 이 의원에게 "한 청장이 유임할 수 있도록 인사를 잘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한 전 청장의 '유임로비 의혹'이 이런 인사청탁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한 전 청장이 10억 원을 마련해 정권 실세에게 전달하려 했다는 것.
안 전 국장의 주장에 따르면, 한 전 청장은 그에게 "정권 실세에게 줄 10억 원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7억 원을 마련할테니 안 (대구지방국세)청장은 3억 원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당신을 국세청 차장으로 청와대에 추천하겠다"는 '은밀한 유혹'도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한 전 청장은 결국 유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한상률의 국세청'은 태광실업을 대상으로 특별세무조사를 실시했고, 조사내용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 국세청은 2008년 11월 박연차 회장을 탈세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 회장을 같은해 12월 전격 구속했다. 이것이 '태광실업 표적세무조사 의혹'이다.
그런데 한 전 청장이 유임에 성공한 직후부터 '토사구팽'이 시작됐다. 먼저 대구지방국세청장이던 안 전 국장을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으로 발령냈다. '서울지방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은 '대구지방국세청장'보다 직책상 두세 단계 아래여서 사실상 '좌천성 인사'였다.
이어 한 전 청장은 안 전 국장에게 사퇴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서 안 국장이 지난 정권 사람이니 사표를 내라고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석연치 않은 인사고과 성적의 수정까지 이루어졌고, 해외교육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국세청 파견교육 대상자로 결정됐다.
한 전 청장은 사퇴 종용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안 전 국장의 주변을 은밀하게 내사했다. '은밀한 내사'는 안 전 국장의 가족과 사업하는 친구들, 부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와 거래업체들, 부인의 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 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사결과는 안 전 국장의 '그림강매 혐의'를 구성하는 밑바탕이 됐다.
그런데 2009년 1월 한 전 청장의 운명을 가르게 된 '두 가지 사건'이 잇달이 터졌다. 하나는 '학동마을 그림로비 의혹'(2007년)이고, 다른 하나는 '경주골프회동사건'(2008년)이었다. 한 전 청장은 처음엔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버텼지만, 1월 19일 결국 물러났다. 유임로비와 10억 원 정권 실세 전달 시도 등의 의혹까지 남기며 집착하던 국세청장 자리를 취임 15개월 만에 내놓은 것.
2009년 12월 입수한 안원구 문건에 '한상률 의혹' 다 들어 있다? 이것이 한 전 청장과 안 전 국장의 '악연사'다. 한 전 청장부터 시작됐던 사퇴 압박과 표적 감찰은 이후 허병익 청장대행(2009년 1월-2009년 7월)과 백용호 청장(2009년 7월-2010년 7월) 때에도 계속 이어졌다. 안 전 국장은 현 정권 실세와도 인맥이 닿았지만 국세청 내부의 암투로 인해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2009년 11월 20일 검찰(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은 안원구 당시 국세청 세원관리국장을 전격 구속했다. 세무조사 대상 기업들에 그림을 강매했다는 혐의였다. 한 전 청장 시절부터 진행된 내사와 표적감찰 결과가 검찰수사의 실마리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검찰은 안 국장의 구속 과정에서 '중요한 자료들'을 입수했다. 이 자료들에는 안 국장이 국세청 윗선들이 벌인 표적감찰과 사퇴압박뿐만 아니라 '한상률 의혹'에 관한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최근 취재에 따르면, 안 전 국장은 자신이 직접 겪은 내용과 전해들은 내용을 분리해 이를 문건으로 정리해놓았다고 한다.
일명 '안원구 문건'으로 불리는 이 자료들은 안 국장이 구속된 직후 민주당에도 건네졌다. 2009년 민주당이 폭로했던 '안원구 녹음파일'도 그 자료들 가운데 일부였다. 안 전 국장이 이런 자료를 직접 만든 이유는 '국세청 윗선들'의 표적감찰과 사퇴압박에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검찰은 안원구 문건의 입수를 통해 '한상률 의혹'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안원구 문건에 한상률 전 청장의 연임로비 의혹(10억 원 정권실세 전달 시도 의혹까지 포함)과 태광실업 표적세무조사 의혹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안원구 문건이 포괄하고 있는 '한상률 의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강남 도곡동 땅 실소유주'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여권에서 가장 긴장하고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안 전 국장이 대구지방국세청장 시절 포스코건설을 세무조사하면서 '강남 도곡동 땅 실소유주 문건'을 입수한 뒤 그것을 어떻게 처리했는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로 밝혀질 경우 정권을 위태롭게 할 '핵폭탄급' 내용인 셈이다.
게다가 '안원구 문건'에는 전직 검찰 고위간부와 관련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신성해운으로부터 로비자금 5000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검찰수사선상에 올랐던 한 전 청장이 전직 검찰 고위간부와 거래해 검찰수사를 피해갔다는 것이다.
한 전 청장은 검찰 고위간부를 지낸 L씨가 M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세무조사 과정에서 포착했다. 이후 신성해운 로비 의혹 사건이 터지자 L씨의 돈 수수 사실을 덮는 대가로 한 전 청장은 검찰수사를 받지 않았다. L씨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검찰 고위간부를 지낸 인물이다.
<노컷뉴스>는 7일 이러한 한 전 청장과 전직 검찰 고위간부의 거래 의혹을 보도했다. 검찰은 이러한 내용이 적힌 '안원구 문건'을 최근 입수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의 취재 결과, 검찰의 해명은 사실과 달랐다. 검찰은 안 전 국장을 구속하던 2009년 12월 관련문건을 입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수부 캐비넷에 잠들었던 '안원구 문건' 다시 꺼내나?
하지만 검찰은 이러한 내용들이 담긴 자료들을 입수해놓고도 그것의 사실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국장을 그림강매 혐의로 구속했는데도 그에게 관련내용조차 물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년여가 지난 현재 검찰은 공교롭게도 '안원구 문건'에 포함돼 있던 ▲ 인사청탁용 그림 로비 의혹 ▲ 국세청장 유임 로비 의혹 ▲ 태광실업 표적세무조사 의혹 등을 수사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캐비넷에 잠들어 있던 '안원구 문건'을 이제서야 꺼내든 형국이다.
검찰은 참여연대와 민주당 등의 고발에 따라 관련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인지수사'에 정통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1년여 전 이미 '안원구 문건'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정권의 눈치를 보며 '한상률 의혹'을 덮어온 것일 수 있다.
물론 1년여 전 검찰이 수사했던 것은 안 전 국장의 '그림강매 혐의'였기 때문에 '한상률 의혹'은 직접적인 수사대상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몇개월 전에 '안원구 문건'을 입수해놓고 한 전 청장이 유유히 미국으로 '도피'하도록 방조한 걸 보면 그때는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검찰이 불신받지 않기 위해서는 안원구 문건에 담겨 있는, 정권 실세와 전직 검찰 고위간부 등과 관련된 내용을 철저하게 수사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검찰에서는 '그림로비 의혹' 수사에만 집중하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깃털'만 수사하고, '몸통'을 외면할 경우 검찰이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