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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지난 7일은 3월의 첫 월요일이었다. 3월부터 봄이라 친다면, 올 봄의 첫 월요일, 봄의 첫 여의도 '거리미사'가 열린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서울을 갔다. 지난해 11월 29일 이후로는 단 한 번인가 빠졌을 뿐 월요일마다 서울을 가니, 정말 의무감과 관성의 맹렬한 작용이 아닌가 싶다. 여의도 거리미사에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정임을 일찍이 고백했다.

 

 4대강과 민족문제와 민주주의를 생각하면 여의도 거리미사에 가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면 너무도 참담한 마음이 되고 눈물이 난다. 그래서 여의도 거리미사 참례는 오늘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며 희망이다.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여의도 거리에 나와 미사를 지내시는 신부님들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또 함께 미사에 참례하는 형제자매들이 더없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신자들은 대개 100명 안팎이다. 20여 명씩 참여하시는 신부님들에 비하면 신자 수가 너무 적은 편이다. 신자들 중에는 나처럼 거의 매번 참례하는 고정멤버(?)가 상당수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대교구 신자들보다 다른 교구 신자들이 매번 더 많다는 사실이다.

 

 수도권도 아니고 중부권도 아닌, 광주·대구·부산·마산·안동 등지에서 올라오는 신자들도 있다. 그들을 대할 때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미사 때마다 사회를 보시는 신부님이 교구 호명을 하는데, 제주교구에서 온 신자도 있어 놀란 적도 있다.  

 

 함께 거리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감정도 있다. 그들 모두도 나와 똑같은 심정을 지니고 살기에 그처럼 여의도 거리미사에 기를 쓰고 참례하는 것이리라. 기가 막히고 눈물 나는 심정, 한사코 간절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려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함께 모여 거행되는 거룩하고도 고귀한 거리미사를 일컬어 '전례남용'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언어창조 능력은 지녔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차가운 가슴일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여의도 거리미사와 '두물머리' 미사 등에 참례하는 사제와 신자들에게는 테러나 다름없는 언어폭력일 법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공격에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다만 뜨겁고 진실한 가슴 가슴에 눈물겨운 소망을 담아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할 뿐이다.

        

 나는 상이군경 신분이라 요금의 30%를 할인 받는 버스를 주로 이용하지만, 이번에는 차를 가지고 갔다. 내 글과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승용차를 타고 서울을 가는 것에도 시비를 하는 이가 있다. "환경을 말하는 사람이 2500cc 소렌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매연을 내뿜느냐"고 비아냥거린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7월 노친의 퇴원에 맞추어 10년을 채운 승합차를 승용차로 바꾸었다. 무려 8개월의 병상생활 끝에 퇴원하신 노친을 집에 모시면서 새 기분을 갖고자 하는 뜻이었고, 노친이 차에 오르고 내리시는 데는 문턱이 높은 승합차보다 승용차가 덜 무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거지반 노친을 위한 용단이었다. 

 

 그리고 이번 서울 나들이에 승용차를 이용한 것은 최근 신림동 고시촌으로 거처를 옮긴 아들 녀석의 원룸에 가져갈 짐도 있고, 또 상도동 처형 댁에 맡겨놓은 딸아이의 짐 중에서 태안 집으로 실어올 물건도 있기 까닭이었다. 오로지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승용차를 이용한 것은 아니니, 내 승용차 이용을 비판하시는 분께 특별히 이해를 구한다. 생활필수품인 자동차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2>

 

  7일 저녁의 거리미사는 내게 좀 더 특별한 미사였다. 미사 중간에 내가 처음으로 '시낭송'을 했으니 말이다.

 

 추운 저녁 한데서 지내는 여의도 거리미사는 절절하고 비장하면서도 각별한 생동감과 즐거움이 있다. 제1독서 다음의 '화답송'을 특별한 노래로 대신하기도 하고, 영성체 후 공지사항 발표시간에 작은 음악회를 갖기도 해서, 딱딱하지 않은 '재미있는' 미사가 되곤 한다.

 

 앞으로 한동안 화답송은 강을 주제로 한 대중가요들을 엄선해서 부르기로 해서 7일 미사에는 '소양강 처녀'를 불렀다. 그리고 영성체 후에는 내가 시낭송을 했다. 나는 매번 영성체 후에 노래와 악기연주 등 음악 선물을 접하면서, 문학(시)도 함께 한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2월 28일 미사 후 거의 매번 사회를 보시는 김인국 신부님(청주교구 금천성당 주임)께 시낭송을 하고 싶은 뜻을 표했다. 김 신부님은 즉각 응낙을 하셨고, 7일 미사에 나를 불러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작시를 생각했다. 4대강에 관한, 또 여의도 거리미사에 관한 시를 하나 새로 지어서 외워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형기 님의 '낙화'와 조지훈 님의 '낙화', 두 편의 시를 선택했다. 3월, '새봄'을 생각한 탓이었다. 봄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시라는 생각이었다. 나무들마다 새움이 트고 꽃망울이 생겨나는 계절에 역으로 '낙화'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우리 인간 아니던가.              

 

 하지만 마이크를 잡은 순간 마음을 바꾸었다. 바람이 꽤나 불고 추운 날씨이기 때문이었다. "오늘같이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운 날에는 이육사 님의 '광야'라는 시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라는 말로 운을 뗀 다음 열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광야'를 낭송했다.

 

 모국어로 빚어진 수십 편의 명시들을 외우고 살면서, 또 평생 동안 이런 자리 저런 기회에 무수히 시를 읊으며 살아온 중에, 어쩌면 가장 열렬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내 마음이 그만큼 뜨겁고 비장한 까닭이었다.

 

 신자들은 하나같이 감동했고,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한 편을 더 낭송해야 했다. 다음에는 천주교 신자 생존 시인이신 홍윤숙 님의 '장식론'을 낭송했다. 형제님들보다 자매님들 수가 더 많은 것을 고려한 것이기도 했다. '광야'와는 다른 감미로움 속의 절절함을 나긋하고 질척하게 안겨줄 수 있는 시였다.    

 

 <3>

 

 이로써 여의도 거리미사에는 영성체 후에 음악과 함께 시(詩)도 자리하게 되었다. 내 시낭송이 7일 저녁의 여의도 거리미사, 추운 날씨 속의 전례 분위기를 한결 장중하고 뜨겁게 고양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감히 자부한다. 나는 시낭송을 하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회원입니다. 전체 회원들 중에서 가장 짱짱하고 맑은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별로 짱짱하지도 않은 탁한 목소리를 지닌 일부 회원들이 가끔 이상한 짓을 하고 괴상한 소리들을 지르는데, 대다수 회원들과는 상관없는 짓들입니다. 전체 회원들을 도매금으로 망신시키는 짓들일 뿐이고, 전체 회원의 집약된 의사표현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대다수 회원들은 제대로 된 사리분별력을 지니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른 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부 얼치기 회원들의 경거망동을 가지고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를 오해의 눈으로 보시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신자들이 환호하며 박수로 화답했다. 시낭송을 마친 내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김인국 신부님은 더욱 재미있는 말을 했다.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를 오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후로 고엽제전우회에 대한 제 선입견을 과감히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모든 신자들이 소리 내어 웃으며 또 박수로 호응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혹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회원 동지들도 있으시다면 내가 고엽제전우회를 바르게 홍보하였음을 이해하시라. 천주교의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로부터 고엽제전우회가 박수까지 받았으니 이보다 더 뜻 깊은 일이 어디 있으랴.

 

 미사가 끝난 후 여러 신부님들과 많은 신자들로부터 감사와 찬사를 받았다. 슬픔 가운데서도 행복을 느꼈다. 평생 동안 시를 사랑하고,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서 무수히 시를 읊으며 살아왔지만 2011년 초봄에 여의도 거리미사에서 시낭송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어디 그뿐이랴. 60여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금수강산이 오늘 저토록 무참하게 파괴되고 망가지게 되리라는 것은 정녕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전혀 내 상상 속에도 있지 않았던 일이 오늘 저리 흉포하게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 나는 더욱 시를 사랑할 것이다. 4대강 상실과 함께 시도 잃어버리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마음을 한결 오지게 먹고 더욱 열렬히 절절히 시를 읊으며 살 작정이다. 철저히 파괴된 4대강의 복원을 뜨겁게 갈망하는 마음으로…!


태그:#4대강, #여의도 거리미사, #정의구현사제단, #시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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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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