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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매서운 한파를 뚫고 뜨거운 혁명의 바람이 중동에서부터 전 세계로 전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그 바람은 진행 중이다. 뜨겁고 가슴 벅찬 바람이 중동에도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곤욕스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치솟는 물가와 청년실업, 살기 어려워진 민중은 울었고 정부는 이들을 외면했다. 순박한 노동자이자 농민이었을 그들 혹은 그저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은 외면에 분노했고 정부퇴출이라는 철퇴를 휘둘렀다. 순하디 순한 양 같던 민중이 투사로 혁명가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외신을 타고 들려오는 혁명의 소식들 속에서 우리는 데자뷰를 보았다. 그것은 2011년 대한민국의 삶도 팍팍하기만 하다는 현실인식에서 오는 데자뷰였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데자뷰가 존재한다. 존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이다.

 

소설 <분노의 포도>를 지금 시점에 읽는 것은 수많은 데자뷰와 마주하는 일이다. 살인적이었던 대공황의 모습에서 우리는 치솟는 유가와 치솟는 생필품 가격으로 인해 하루하루 한숨이 늘어가는 우리네 삶을 본다.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이란 말로 설명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지속하던 미국 경제가 3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황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민총생산은 1933년에 1929년의 56%, 국민소득은 45.8%, 공업 생산액은 62.1%, 도매물가는 69.2%, 농산물 가격은 49%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농업부문은 상당히 심각했다. 농산물 가격이 29년에 비해 32년에는 81%나 폭락하고 농업 노동자의 임금이 63%나 감소한 것이다. 개간을 하여 농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나는 농산물로 살아가던 농민들에게 이는 산지옥과 다름이 없다. 대출을 받아 농사를 짓고 결국에는 은행으로부터 집을 빼앗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땅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긴 자들은 일거리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게 은행이 트랙터로 이 집을 밀어버리려고 왔을 때, 너희 식구들은 버틸 작정이었어. 네 할아버지가 소총을 들고 여기 서서 트랙터 헤드라이트를 날려 버렸으니까 그런데도 트랙터가 계속 밀고 오더라고. 네 할아버지는 트랙터 운전사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 윌리 필 리가 운전사였어. 녀석도 네 할아버지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밀고 들어와서 집을 들이 받았어" -1권 94쪽-

 

주거자가 있음에도 들이밀어 주거자를 내쫓는 모습은 세밑에 있었다는 도곡동 철거사태를 떠올리게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일자리를 찾아 헤맸지만 일할 사람은 넘치고 일자리는 줄어 일거리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다 여물어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일들은 수확하여 파는 것이 손해여서 그것이 썩어문드러지도록 방치하는 모습들은 값싼 농산물의 수입으로 인해 수확의 즐거움보다 수확의 슬픔을 먼저 느껴야했던 이 땅의 촌부들과 겹쳐서 울려 퍼진다. 그래서 이 책은 데자뷰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그 삶이 고스란히 내 삶을 덮쳐서 동일한 삶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자주색 서양자두가 익어서 부드럽고 달게 변한다. 젠장, 저걸 따서 말릴 수도 없고 유황처리를 할 수도 없어. 인부들 품삯을 아무리 싸게 쳐줘도 그 돈을 지불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래서 자주색 서양자두가 양탄자처럼 땅을 덮는다. 처음에는 껍질이 약간 쭈글쭈글해지고, 파리들이 몰려들어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썩어가는 열매의 달콤한 냄새가 계곡을 가득 채운다. 과육이 검게 변하고, 열매가 땅위에서 시들어간다." -2권 252쪽-

 

그러나 <분노의 포도>가 그리는 진정한 잔혹함은 이렇듯 생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공황이 던지고 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파괴이며 나아가 공동체에 대한 파괴이다. 그는 기계가 일괄적으로 밀어 개간시킨 땅은 생명의 가꿈이 아니라 강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돈을 위해서 이웃과 친구를 저버리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대공황이 파괴시킨 휴머니즘에 대해서 말한다.

 

가난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생존 때문에 인간성을 파괴해야 하고 소중한 것을 빵 한 조각, 우유 한 컵과 바꿔야 하는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에 생존을 택하고 그것으로 우리 가족이 연명할 수 있음을 슬픈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가난의 무서움이며 잔인함이다. 존 스타인 벡이 휴머니즘을 통해서 대공황을 바라본 것은 이와 같은 잔혹함의 근원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과 광기 그리고 생존에 대한 욕구만이 남아 인간성이라고는 소멸 되어버린 세상, 그것이 정녕 무간지옥이라고 이 책은 어쩌면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 무간지옥을 읽다보면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난다. 반복되는 그 무간지옥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서글픈 데자뷰 앞에서 무릎이 절로 구부려진다.

 

그러나 존 스타인 벡은 소설의 결말에서 결국 희망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함께 가는 것이라고 암시를 준다. 아이를 사산한 로즈가 굶어 죽어가는 남자에게 서슴없이 자신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젖을 물리는 장면에서 말이다. 결국 희망은 사람이라는 간결하면서도 가슴 벅찬 진리를 그는 이 장면으로 보여준다. 비록 그 때문에 결말이 흐리다거나 소설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이 장면이 보여주는 가슴 뭉클함은 그 비난을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수정후 중복게재됩니다.


#서평#분노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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