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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 5일 낮 12시 ]

'부미방' 김은숙씨 모금행렬... 5천만원 넘어

지난 3일 김은숙씨 사연이 알려진 뒤로 그를 돕겠다는 후원물결이 쇄도하고 있다. 모금액은 5일 현재 5천만원이 넘어섰다. 1천만원을 보낸 익명의 기부자도 있다.

트위터를 통해 이 사연을 처음 알리고 모금운동에 나선 임수경(@su_corea)씨는 이날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이 정도로 함께 해주실 줄은 몰랐다, 뭐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익명의 기부자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전했다.

김은숙씨 사연은 트위터을 통해서 뿐 아니라 김씨의 지인들을 통해 이메일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모금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편, 임수경씨가 기획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는 5일 오후 7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1층 로비에서 열리며, 이 자리에는 고은 시인 등 80년대를 함께 해온 인사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2신 : 4일 오후 5시 50분]

'부미방' 김은숙씨를 위한 모금, 3800만원 돌파

지난 3일 언론을 통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주범으로 현재 말기 위암을 앓고 있는 김은숙씨 사연이 알려진 뒤로 그를 돕겠다는 후원의 손길이 쇄도하고 있다. 모금액수는 4일 오후 3800만원이 넘어섰다.

트위터를 통해 이 사연을 처음 알리고 후원모금운동에 나선 임수경(@su_corea)씨는 4일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전직 운동권보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시민들이 5분 단위로, 10분 단위로 정성을 보내고 계시다"며 "지금까지 모금에 동참한 분들은 대략 300여명"이라고 전했다.

그는 "80년대를 살아낸 무수한 사람들이 김은숙님을 기억하고 부미방을 기억하면서 동참하시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편, 임수경씨가 기획한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는 5일 오후 7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1층 로비에서 열리며, 이 자리에는 고은 시인 등 80년대를 함께 해온 수많은 인사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1신 : 3일 오후 3시 30분 ]

말기암 투병 '부미방' 김은숙씨를 아십니까?

 1982년 3월 18일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1982년 3월 18일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 ⓒ 연합뉴스

늦은 밤 병원은 고요했다. 컴컴한 복도로 새어나온 흐릿한 불빛과 말소리. TV였다. 지난달 31일 녹색병원 6층 한 병실 안에선 사슴 눈을 닮은 한 여인이 자정 무렵 시작되는 <KBS 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덜컹 문소리에 고개를 돌려 날마다 찾아오는 후배 '통일의 꽃' 임수경씨와 마주치니 힘없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그는 김은숙(52)씨였다. 서울 녹색병원에서 말기 위암으로 투병 중인 그는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약칭 부미방)의 주범이다. 한국 반미운동의 효시가 됐던 이 사건은 내년이면 꼬박 30주년이 된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1980년 광주학살을 은폐했던 시기, 그는 미국 문화원에 불을 질러 전 세계에 이 사실을 알렸다.

찬란했던 1982년 3월의 봄. 이십대 초반의 앳된 여대생은 미문화원에 노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들어가 경비의 제지를 뚫고 인화 물질을 복도 바닥에 부었으며, 공범 문부식은 현장에서 불을 당겼다.

비슷한 시각, 부산 국도극장 앞과 유나백화점 앞에서는 "미국과 일본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살인마 전두환 북침 준비완료" 등이 적힌 '반미투쟁' 유인물이 살포됐다.

대학생들이 겁도 없이 미국의 심장부를 정조준하다니. 전두환 정권은 고정간첩의 사주나 좌익 불순분자의 소행이라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현상금 2천만 원이 걸렸다. 고신대생 김은숙과 문부식은 공개 수배됐고, 도망 끝에 원주의 최기식 신부를 찾아갔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매질을 당하다

 부미방 사건으로 연행되고 있는 최기식 신부(사진 가운데). 범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최 신부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부미방 사건으로 연행되고 있는 최기식 신부(사진 가운데). 범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최 신부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 연합뉴스

최 신부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활동하던 함세웅 신부에게 연락했고, 수배 14일 만에 두 사람이 자진 출두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살벌했던 군사독재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두 사람은 모진 고문과 매질을 당했으며 결국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은 무기징역형에 처해졌다. 범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최 신부에게도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전두환 정권과 어용 언론들은 천주교가 종교를 앞세워 좌경분자를 숨겨주고 불순활동을 방조했다고 연일 공세했다. 허나, 민주화운동진영은 1980년 광주학살이 미국의 묵인 하에 치러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 전두환정권이 군대를 동원해 광주민주항쟁을 진압했을 리 없다는 유추 때문이다.

게다가 1980년 8월 8일엔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의 길을 따라갈 것"이라며 "한국민에게 민주주의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대한 분노는 높아졌고, 그해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 회원 정순철이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으며 1985년 5월 23일에는 대학생 73명이 광주 사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따지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벌였다. 1986년 4월 28일에는 서울대생 이재호·김세진이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1982년 부미방은 근·현대 사회운동사에서 길이 남을 족적이다. 반미운동은 1990년대까지 계속 됐고,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SOFA)는 2006년 평택미군기지이전투쟁 등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영어의 몸이 됐던 김은숙씨는 5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법정에서도 1980년 5·18 광주의 참극을 고발하며 이를 방조한 미국을 비판했던 그다. 재판장이 "피고인들의 방화는 광주와 관계없이 사회주의 이념에 젖어 그런 게 아니냐"고 제지했어도 물러서지 않고 광주의 비극을 고발하고, 또 고발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무기수 생활을 하던 부산 고신대 신학생 문부식씨가 가석방돼 서울민협으로 올라와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무기수 생활을 하던 부산 고신대 신학생 문부식씨가 가석방돼 서울민협으로 올라와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있다. ⓒ 연합뉴스

리영희 교수는 왜 '부미방' 재판에 오셨을까

부미방 재판엔 함께 했던 이가 있었다. 작고한 리영희 교수다. 리 교수가 부미방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법정에 섰다. 당시 이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모든 사건에 직접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 주범인 문부식, 김은숙 두 사람의 재판에도 나는 증인으로 불려나갔어요. 내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들이 진술했으니까."

1970~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 리영희는 시대의 징표다. 엄혹했던 유신시절 리 교수는 탈냉전을 주장하면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 등으로 젊은이와 지식인을 사로잡았다.

군사독재와 싸우고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29년. 김은숙씨는 가정도 꾸렸으나 이혼했고, 두 딸을 홀로 키워야했다. 주로 번역을 했고, 뒤늦게 등단한 작가이기도 했다. 꽃향기가 백리를 간다해서 붙인 '김백리'라는 필명으로 지금까지 약 20권의 책을 번역했다. <펼쳐보는 이슬람> <밥 딜런 평전> <흑색수배> 같은 어른들을 위한 책, <아프리카 소녀 나모>나 <꿈길의 요술램프> 같은 어린이 책도 번역했다. 아프기 직전인 지난해 가을까지는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지역아동센터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김은숙(이하 김) "맛있는 냄새난다. 뭐 먹었니?"
임수경(이하 임) "맥주. 치킨도."
"나 아까 체해서 죽는 줄 알았다. 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거든. 지금은 다 토해내서 속이 편안해서 너무 좋다. 흐흐."
"언니. 의사선생님이 덩어리는 안 된대."
"마치 눈이 툭 튀어나올 것처럼 아팠어. 맛만 보고 삼키진 말았어야 했는데. 큭큭"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바싹 마른 김은숙씨는 병상 위에서 니은자로 앉아 임수경씨와 수다를 떨었다. 환자는 깨어 있는데 잠들어 있는 간병인 아주머니를 깨워야 한다는 임씨와 작은 실랑이도 했다. 아주머니를 향한 비판이 나올라 치니 김씨가 임씨의 손을 살짝 꼬집는다. "좀 지켜보지. 어젯밤 나 때문에 한숨도 못 주무셨거든." 시한부 생을 살면서도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씨가 참 고운 사람이었다.  

키 163cm에 몸무게 52.5kg을 유지했던 날씬한 그녀. 지난해 9월부터 암과 싸우면서 지금은 20kg 정도 살이 빠졌다. 살집 하나 없이 온몸의 골격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배는 복수가 차올라 불룩했다. 발과 다리는 퉁퉁 부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한 발 두 발 걷기조차 불편한 사람. 그래도 운동을 해보겠노라 몇 걸음 왔다갔다 했다.

 앞줄은 고 리영희 선생님과 사모님, 뒷줄은 왼쪽부터 '부미방' 김은숙씨, 임수경씨, 소설가 유시춘씨. 임수경씨에 따르면 2년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인데, '서정' 블로그에 올려져 있다.
앞줄은 고 리영희 선생님과 사모님, 뒷줄은 왼쪽부터 '부미방' 김은숙씨, 임수경씨, 소설가 유시춘씨. 임수경씨에 따르면 2년 전에 함께 찍은 사진인데, '서정' 블로그에 올려져 있다. ⓒ

"언니, 1982년 사건 이후로 뭐 힘든 거 없었어?"
"야. 옛날 생각난다. 양평 햇살. 딴 사람들은 볕이 뜨거워서 모두 그늘로 숨는데 유독 너랑 나만 햇볕으로 나가 광합성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

"하하. 맞아. 나 지금도 내복 입고 다니잖아. 징역살이 오래 한 사람들은 추운 걸 너무 싫어해서 항상 햇볕을 쫓아다니지. 보통사람들은 뜨겁다고 해도 우린 따뜻하잖아. 그치? 그날도 언니가 배 아프다고 했었어."
"그랬나? 하여간 우린 너무 추운 감옥에 오래 살아서 아무튼 따뜻한 곳이 좋아."

"큰딸과 작은딸. 뭐가 됐으면 좋겠어?"
"큰애는 철학공부 하고 싶다고 했고. 둘째는 미학 하고 싶대. 큰 애는 유학시험도 치고 싶은 모양인데, 엄마가 아프니 뭐. 당장 학교 가고 싶은가봐. 딱 1년 다니고 내가 이렇게 돼서 계속 같이 병원 다니니까 저도 왜 안 힘들겠니."

"두 딸 너무 예뻐. 잘 길렀어."
"(피식 웃으며) 나 여기 오기 너무 잘한 것 같아. 계속 자연요법으로 음식 조절하고 운동하고 그랬는데 점점 더 통증이 심해지는 거야. 그날 저녁 딱 죽겠더라고. 병원 가야지 했다. 딱 위기가 느껴지더라고."

"주치의 선생님 너무 고맙지."
"그럼. 내가 건석이(리영희 교수 둘째 아들, 녹색병원 외과 과장)를 아주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난 너무 든든해. 실은 내가 1982년 사건으로 감옥 갔다 와서 줄곧 리영희 선생님 댁에 살았어. 윤영자 엄마 밥이 너무 맛있어 가지고. 김치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 줄 아니? 난 그때 돼지 간에 계란 입혀 먹는 걸 처음 배웠는데, 너무 맛있었어. 이 반찬, 저 반찬 많이도 꺼내먹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책 쓰시면 교정 봐드리고 밥 얻어먹고 그렇게 살았지 뭐. <역경의 시대> 그거 나도 같이 교정 봤지."

"언니네 사건 재판 때도 오셨다며."
"호호. 그럼. 재판 때 참고인으로 오셨지. <전환시대의 논리>를 봤잖아. 그 책 읽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까 재판부가 선생님을 증인으로 채택한 거야. 선생님 늘 갖고 다니시던 검정 가죽가방 있어. 그거 갖고 오셔서 재판정에 얌전히 앉아계시다 진술하셨지."

"리영희 교수님하고 추억도 많겠다."
"그럼. 재밌었어. 필담 많이 했어. 일본어로."
"왜?"
"공부하라고. 그땐 사회과학서적이 한국말로 된 게 없었어. 일본어나 독일어 원전을 봐야했거든. 책이 없었으니까. 일부러 어학공부를 안 하면 안 됐지."

"언니야. 안 외로웠냐?"
"외로웠지. 삶 자체가 쉽지 않았고. 먹고 사는 것도 참 힘들었어. 다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슴 아플 때가 많아. 늘 돌아보면 아픈 게 많잖아. 애들한테는 82년 사건을 잘 얘기 안했어. 역사공부에 도움 되라고 80년 광주사태를 얘기하긴 했지만 엄마가 뭔가 했었다 그런 얘기 하기 그래서 아예 안 했어. 애들은 잘 몰라. 그런데 뭐랄까, 성향은 있는 모양이더라. 둘째는 자기 친구들하고 촛불집회 따라다니고 그러더라. 춤추고 놀았대."
"하하하하하."

후원 물결 쇄도... 5일엔 작은 음악회도 열려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대화는 계속 됐다. 중간에 기자도 끼어들어 몇 마디 묻기도 했다. 말이 길어지자 따뜻한 무언가를 먹고 싶다고 하더니, 인스턴트 콘스프를 떠올렸다. 작은 플라스틱 통에 인스턴트 콘스프를 '삼박자 커피'처럼 타더니 티스푼으로 몇 숟가락 떠넘겼다. 많이 먹지는 못해도 이렇게 따끈한 걸 먹으면 식도가 시원해진다고 했다. 엄청난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였지만 순간순간 재기발랄했다.

무려 1시간이나 대화를 나누니 피곤해했다. 눕고 싶다고 했다. 그를 눕히고 인사를 하려는데 임수경씨가 슬쩍 내 얘기를 했다.

"여기도 아줌마야. 애엄마."
"그래? 얼른 가요. 애들이 얼마나 기다릴까."

인사치레로 하는 예의,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을 그는 꺼내지 않았다. 차라리 임수경씨가 부추겼다. "자기 또 와야겠다. 언니가 편안해하네. 역시 여자들이 좋아!" 깔깔거렸다. 임수경씨는 마치 큰 언니에게 재롱떠는 막내 여동생처럼 굴었다. 장난도 잘 쳤고 농담도 잘 했다.

어디서 힘이 났을까.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악수 잘한다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더 세게 그는 내 손을 잡았다.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다가 "이제 가라"며 손을 놓았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았다. 임수경씨는 담요를 덮어주었고, "내일 다시 올게"라며 손을 흔들었다. 간병인 아주머니는 미안하다는 말과 꼭 다시 오시라는 말을 연거푸 하며 사람좋게 웃었다. 임수경씨는 허리를 수차례 굽혀 인사하며 "어머니, 우리 언니 잘 부탁드려요"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병원에서 내려와 지인들이 모여 있는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 자리엔 김은숙씨의 주치의이자 리영희 선생님의 둘째 아들 이건석 녹색병원 외과 과장이 함께 했다. 이 과장은 "말기 상황"이라며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임수경씨는 "언니를 외롭게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다. 트위터(@su_corea)에 사연을 올리니 하루만에 500만 원이 넘는 후원금이 모였는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도록 못 하겠다고 악을 썼다. "자, 보라!"며 통장을 내밀었다. 네 장째 익명의 사람들이 돈을 보내고 있었다. 응원 메시지도 간절했다. 전직 운동권부터 이름난 소설가까지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이런 데도 "언니를 쓸쓸하게 보내야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오는 5일 오후 7시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선 '김은숙을 위한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여기에는 시인 고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 이은봉, 소설가 윤정모, 유시춘, 이창학(벗이여 해방이온다 작곡가), 평화의 나무 합창단 시민악대, 새벽 출신 이성호, 전대협 출신 연출가 김정환, 한총련 출신 시인 황선 등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이건석 과장은 "나는 김은숙의 주치의지만 보호자이기도 하다"고 했다. 어릴 적 봐온 김은숙씨는 어떤 분이냐고 물으니 "참 예쁜 누나"라며 배시시 웃는다. 평소에도 의사가운 없이 병실에 와서 곧잘 김은숙씨의 상태를 살필 정도다. 누구에게나 이 과장같은 주치의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속으로 부러웠다.

임수경씨는 "우리 모두 김은숙씨의 보호자가 되자"며 "그녀가 치열하게 살았던 격랑의 1980년대, 이제는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겨져야 하느냐"고 개탄했다. 무엇보다 임수경씨는 "그녀는 지금 지치고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며 "82년 사건 이후 줄곧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사위어간다"고 울부짖었다.

함세웅 신부는 "툭 하면 용공좌경으로 몰았지만 김은숙씨는 의로운 의인"이라며 "한 학생이 죽는 비극을 낳긴 했지만 그래도 부미방이 있었기 때문에 광주의 비극이 전 세계로 알려졌고 전두환 군사독재의 끔찍한 실상이 외부로 알려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신부들은 본디 기도만 할 줄 알아 모금운동 같은 건 생각도 못했는데, 임수경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우리 신부들도 조금씩 돈을 모아 김씨를 위로할 생각이라며 작은 미소를 보냈다.

후원계좌
말기암 투병중인 김은숙님을 위한 희망 계좌를 만들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임수경씨 트위터(@su_corea)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애초 기사에 언급됐던 계좌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 삭제했습니다. 독자여러분들의 양해부탁드립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반미운동#김은숙#임수경#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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