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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유봉이 송화, 동호와 함께 봄볕 좋은 청산도에서 진도아리랑의 흥에 겨워있다.
▲ 영화<서편제>의 한 장면 소리꾼 유봉이 송화, 동호와 함께 봄볕 좋은 청산도에서 진도아리랑의 흥에 겨워있다.
ⓒ http:blog.daum.net/1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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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원작〈서편제〉를 1993년에 임권택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1백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청산도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더니 2006년에는 KBS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두 남녀의 순애보적 사랑을 다룬〈봄의 왈츠〉가 청산도의 때묻지 않은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방영되면서 다시 한 번 사람들마다 가슴 저편에 묻어두었던 아련하고 순수한 향수를 일깨웠다.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야트막한 산들, 층층이 정갈하게 자연석을 쌓아 만든 산비탈의 논과 밭, 알록달록 어우러진 마을들이 돌담을 병풍삼아 바람을 피해 엎드려 있는 청산도는 자연경관이 잘 보전되고 전통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어 2007년 12월에 전남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장평면, 신안군 증도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인증을 받았다.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9.7㎞ 거리에 있는 청산도를 찾은 것은 봄볕이 따사롭던 지난 4월1일이었다. 독서클럽에서 북투어(Book Tour)를 목적으로 선택한 장소였다. 육지에서는 3월말까지도 꽃샘추위에 쭈빗거리던 매화, 산수유, 목련 그리고 개나리가 하루 사이에 풀어진 날씨 탓에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려 꽃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완도여객터미널에서 차량을 가득 실은 철부선을 타고 50여 분 다도해를 헤집고 들어가면 아름다운 청산도다. 33.28㎢의 넓은 섬 안에는 도청리, 당리, 양지리, 진산리, 국화리 등 예쁜 이름을 지닌 24개의 자연부락이 저마다의 유래를 담고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상대대로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다.

<봄의 왈츠>세트장인 ' 바닷가 언덕위의 하얀집'이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영화<봄의 왈츠>촬영장 <봄의 왈츠>세트장인 ' 바닷가 언덕위의 하얀집'이 다소곳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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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리 선착장에서는 4월8일부터 치러지는 "2011 청산도 슬로우 걷기 축제"를 앞두고 탐방객을 위해 30분 간격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었다. 느리게 가는 셔틀버스에는 문화관광해설가가 동승하여 가는 곳마다 지명의 유래와 해설을 덧붙여 여행의 깊은 맛을 가미해 주었다.

첫 기착지는 당리였다.〈서편제〉와〈봄의 왈츠〉촬영지였던 당리 입구의 소나무 언덕에 서니 갯내음을 실은 봄바람이 탁한 정신을 씻어준다. 밭두렁과 밭두렁 사이로 돌담을 쌓아 만들 황톳길이 수선스럽지 않고 수수하다. 영화〈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과 서로 혈육이 다른 남매 송화와 동호가 소리를 팔며 남도를 떠돌다가 "진도아리랑"을 타령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란다. 그 소리만 들어도 어깨춤이 절로 나는 구성지고 애절한 "진도아리랑"은 "심청가"와 함께 서편제의 백미이다. "진도아리랑"의 한 소절이 송화의 노랫소리인 양 귀에 쟁쟁하여 읊조려본다.

문겨엉~ 세에재에는 웬 고개엔가아~ 굽이야~ 굽이가 눈무울이 나안다
노오다 가세에~ 노오다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아 가세에~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낫네에~ 에헤 에헤~
아리랑 으음~ 흐음~ 흐음 흐음~ 아라리이가 나앗네에~

사안천 초모옥은 달이 변해두오~ 우리드을 먹은 마아음 벼언치이~ 말자
만겨엉 창파에 두둥둥 뜨은 배에~ 어기 여어차~ 노오를 저어라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앗네에 에헤 에헤~
아리라앙 으으~ 흐음~ 아라리이가 나앗네에~

범바위에서 바라본 여서도가 해무에 덮여 신비롭다.
▲ 여서도 범바위에서 바라본 여서도가 해무에 덮여 신비롭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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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상처 하나씩은 가슴에 안고 살아갈 터, 이곳 청산도를 찾는 사람들 모두 인간본연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약한 영혼을 감싸 안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묘약을 얻어 가시길…,〈봄의 왈츠〉세트장인 '바닷가 언덕위의 하얀집'으로 가는 길, 양 옆으로 심은 유채는 지난 엄동에 모두 얼어 죽고, 최근에 다시 어린모를 이식해 언제 꽃을 피울지 모르겠다.

청계리에서 범바위까지는 도보로 왕복 2시간 거리다. 봄기운에 연녹색으로 물들어가는 들녘이 평화롭다. 이랑을 따라 잘 정리된 마늘밭이 생기가 넘친다. 한가로이 산길로 접어드니 사스레피나무가 숲을 이뤄 한참 피우기 시작한 꽃향기가 얄궂다. 산기슭 여기저기 진달래가 함초롬이 피어나 운치를 더한다. 어린시절 추억이 생각나 진달래 한송이를 잎에 넣으니 쌉소롬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호랑이의 형상을 그려낼 수 없는 범바위에 오르니 해무에 덮인 바다에 떠있는 여서도가 신비롭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와 거문도가 또렷이 보인다는데 오늘은 멀리 남지나해가 아득할 뿐이다. 1년 후에 편지가 배달된다는 느림보우체통에서 엽서라도 한 장 보낼까하고 쉼터를 찾았더니 주인은 간데없고 산새들만이 낯선 방문객에게도 놀라지 않고 한가로이 오간다.

다시 내려와 청계리 들머리에 이르니 저만치 가던 버스가 우리를 보고 돌아와 태워준다. 사람 사는 냄새가 절로 나는 곳이다. 버스는 구들장 논이 있는 부흥리를 지나간다. 논바닥에 넓적한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은 덮어 만든 구들장 논은 섬사람들의 지혜와 애환이 함께 서려있다. 그러고도 큰애기들이 쌀 서말 먹고 시집가기 어려웠다고 하니 그네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담쟁이 덩굴에 애워 싸인 돌담이 우물과 함께 조화롭다.
▲ 등촌리 우물 담쟁이 덩굴에 애워 싸인 돌담이 우물과 함께 조화롭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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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흥리 해변 소나무 정자에서 준비해간 김밥도시락으로 요기를 하고 등촌리로 발길을 옮겼다. 한 세기를 돌아서 다시 온 듯 돌담을 두른 마을의 집들은 서로 어깨를 붙이고 앉아 정을 나누며 고단한 살이를 행복으로 엮고 있었다. 돌담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담쟁이가 장구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 박두진의 시〈청산도〉부분

청산도의 남은 길을 쉬엄쉬엄 버스를 타고 돌았다. 길섶에 핀 개나리가 병아리 떼처럼 색깔이 선명하고 귀엽다. 봄을 맞은 주민들의 늦은 부산함이 아지랑이와 함께 어우러져 봄의 왈츠가 된다. 눈 맑은 가슴 맑은 볼이 고운 나의 사람, 청산도의 봄이여!


태그:#청산도, #서편제, #봄의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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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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