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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효 아빠, 삭발하면 안 돼!"

장발머리를 제발 좀 다듬고 가라는 아내의 닦달을 견디지 못해 간판조차 다 낡은 면 소재지에 있는 미용실을 찾아 갔습니다. 이발을 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게 된 것은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아내가 전속 미용사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전속 미용사라 해봤자 별 거 없습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긴 장발을 입산수도 하러가는 까까머리 스님들처럼 산뜻하게 삭발을 했기 때문입니다. 삭발한 머리가 다시 긴 장발이 되는 초여름이 돌아오면 무성한 풀밭을 제거하듯 여지없이 삭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아내의 등쌀에 못 이겨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머리를 다듬었습니다.

빡빡 밀고 다니면 스님 보다는 조폭에 더 가까워 보인다며 만나게 될 사람들이 놀래 자빠질 것이라니 어쩌겠습니까? 조폭이나 입산수도 스타일을 포기하고 사회성 있어 보이는 속세 스타일로 잘 다듬었습니다. 미용사 아줌마에게 "그냥 대충 깍어줘유" 했더니 깔끔하게 잘 다듬어 줬던 것입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고 새구두까지 신고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도 단정하게 다듬고 새구두까지 신고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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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장비 스타일의 덥수룩했던 수염까지 짧게 다듬었는데 아내는 이 날을 위해 구두까지 턱하니 대령했습니다. 아내는 내가 좀생이처럼 쓸데없이 왜 사왔냐고 닦달할까봐 구두를 내놓자마자 2만 원 짜리 구두라고 실토합니다.(딱 하루 신고 나자 앞 부분에 실밥이 터졌습니다.)

주로 겨울에는 털신, 여름에는 고무신만 고집해왔기에 구두 역시 결혼식장에서 신어보고 처음이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옷차림도 아주아주 단정했습니다. 아내가 아래·윗도리 옷가지 하나하나, 구멍 나지 않은 양말까지 챙겨줬습니다.

선보러 가는 것은 아닐 터이고, 도대체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러 가길래 그렇게 요란법석을 다 떨었냐구요? 싱겁게도 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재미가 없어 한 한기 마치고 그만둔 대학에서의 강의를 할 때도 평상시 그대로 털신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초등학교 방과 후 논술을 가르치는 첫 수업이 있던 날, 그렇게 때 빼고 광을 냈던 것입니다.

때 빼고 광 낸 뒤 만난 아이들... "선생님! 무섭게 생겼어요"

도화초등학교 방과 후 독서 논술을 선택한 아이들은 네 명. 단출해서 좋았습니다. 어떤 녀석들일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녀석들은 만나자 마자 논술선생에 대해 탐색전을 펼치는 듯 했습니다.

빡빡머리 조폭은 아니더라도 짧은 머리, 거기다가 짧지만 여전히 턱수염이 난 선생. 아마 수염 기른 선생은 처음이었던 모양입니다. 조폭에 버금가는 우악스러운 인상으로 보였을 것이리라. 하지만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녀석들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녀석은 책상에 두 팔을 올려 턱까지 괴고 있었습니다.

"뭘 봐? 짜식들이 왜? 수염?"
"예, 수염 만져 보면 안 돼요?"
"안 될 것 없지, 그려 만져 봐라, 만져 봤자 꺼끌꺼끌하지 별거 읎어."

녀석들이 하나 둘 다가와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더니 한술 더 뜹니다.

"선생님, 수염 잡아 댕겨 보면 안 돼요?"
"그려? 그려, 당겨봐라 짧아서 잘 안 잡힐걸?"

영재, 재희, 서로, 유경이, 그렇게 네 명의 아이들과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선생과 학생 사이보다는 허물없는 친구로 만났습니다. 칸칸이 숨 막히는 원고지 대신 백지를 나눠주고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은 글, 자유로운 글쓰기를 했습니다.

첫 수업을 마치고나자 녀석들이 좀 더 놀다 가자며 내 손을 이끌고 자신들의 교실로 안내했습니다. 녀석들과 번갈아 가면서 머릿속에 그려놓은 낱말 맞추기 놀이를 했습니다. 2시간짜리 첫 수업이었는데 3시간 수업을 했습니다.

또 다른 학교, 나로도에 있는 봉래 초등학교에서는 승연, 세은, 우현, 승민, 수지, 민서, 진영, 수빈, 유진, 효경, 예빈이. 11명의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도화초등학교 보다 작은 학교, 봉래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첫 대면에서도 역시 한 방 먹었습니다.

"선생님! 무섭게 생겼어요."
"내가?"
"때리지 않으실 거죠?"
"때려? 왜 때려! 누가 너희들 때리디?"

내가 정색하고 말하자 녀석들이 빙그레 웃으며 그럽니다.

"아녀요, 그냥 말해본 건데요."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뭘 써야 할까 고민이 되면 '뭘 써야 할까 고민이 된다'라고 쓰라 했습니다. 글쓰기가 싫다면 '글쓰기가 싫다'라고 생각나는 대로 쓰라 했습니다. 하지만 녀석들의 고민은 잠깐 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백지 위에 말 달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타닥 타닥 쓰고 싶은 글을 두려움 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또 다른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대안학교 아이들입니다. 순천에 자리한 사랑어린 학교(예전 평화학교)에 다니는 3명의 7학년 아이들입니다. 녀석들은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는지 초등학교 아이들에 비해 말수가 별로 없습니다.

 순천에 자리한 사랑어린 학교(예전 평화학교)에 다니는 7학년 아이들입니다. 승보 윤수 현수. 세 녀석들은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는지 초등학교 아이들에 비해 말수가 적었습니다.
 순천에 자리한 사랑어린 학교(예전 평화학교)에 다니는 7학년 아이들입니다. 승보 윤수 현수. 세 녀석들은 사춘기로 접어들고 있는지 초등학교 아이들에 비해 말수가 적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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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과는 한 달에 두 차례 만나기로 했는데 한 번은 순천에서 수업하고 또 한 차례는 우리집에서 2박 3일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수업을 우리 집에서 했는데 딱히 정해진 프로그램도 없이 놀메놀메 공부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한 영상 관련 공부를 하다가 우리집 개 곰순이와 함께 바다에 나갑니다. 녀석들은 해변에 자갈돌로 글씨를 새겨놓거나 갯바위에 붙어 있는 굴을 따 먹어 보기도 합니다. 갯바위를 성큼 성큼 뛰어 다닙니다. 저만치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갯바위에 앉아 탁 트인 바다를 바라봅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른들이 사회적 관념으로 짜 맞춘 두려움 따위를 심어주지 않으면 본래 두려움이 없습니다. 무쏘의 뿔처럼 두려움 없이 혼자서도 제 갈 길을 잘 갑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서 배웁니다.

바다에서 돌아오면 바닷가에서 놀았던 일을 글로 옮겨 보거나 우리집 한 구탱이에 마련된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곤 합니다. 녀석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틈틈이 밭일을 합니다.

공부 시간이 돌아오면 흙손을 씻고 들어와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2박 3일이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고흥 버스터미널에서 순천 가는 버스표를 챙겨주고 뒤돌아서면서 이것저것 하자는 대로 잘 따라줬던 녀석들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 이런 말 써도 돼요?"... 순수한 마음가짐 가진 아이들

 바닷가 작은 학교 아이들과 공부하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오십줄에 접어 들어 그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닷가 작은 학교 아이들과 공부하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오십줄에 접어 들어 그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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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공부하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오십줄에 접어 들어 그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놀아가며 함께 공부하고 싶은 그 꿈 풀이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실 첫 번째 이유는 충남 홍성 풀무농업고등기술 학교로 떠난 큰 아이 인효 녀석의 유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대안학교 중에서 기숙사비며 학비 부담이 가장 적은 풀무고등학교지만 전남 고흥으로 이사 오면서 방송일을 그만뒀기에 소규모 농사일(올해는 3000평 가까운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유학비였습니다. 부담이 컸습니다. 부담스러운 만큼 돈 벌이를 해야만 한다는 두려움이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강압에 못 이기는 척 해가며 전에 없이 때 빼고 광내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단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닌 친구처럼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돈벌이로 가르쳐야 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고 생활에 대한 두려움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글쓰기 시간에 아이들이 내게 묻곤 합니다.

"선생님 이런 말 써도 돼요? 이거 쓰면 혼날지 모르는데…"
"누가 혼내? 니들 마음을 니들 마음대로 쓰겠다는 데 누가 뭐라고 혀, 쓰고 싶은 거 얼마든지 니들 마음대로 써…"
"앗싸!"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자유롭게 열어주면 쓰고 싶은 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갑니다. 글뿐 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이 가고자 하는 길목을 막아서거나 위험한 장애물을 설치해 놓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얼마든지 혼자서도 잘 갑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그 두려움 없는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하여 가르친다는 것은 동시에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글 쓰는 농부가 되어 아이들과 더불어 배우고자 합니다. 아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생명의 땅이나 다름없습니다. 생명의 땅을 일굴 때 땅에 대해 알지 못하면 싱싱한 밭작물을 제대로 얻어내지 못하듯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우지 않고 어떻게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지혜를 얻지 못하면 오히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해치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 온갖 것에 닫혀 있는 아이들 본래의 마음자리를 활짝 열어놓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을 그렇게 번지르르 하게 하고 있지만 사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워나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봤자 나는 온갖 마음의 장애를 가진 두려움 많은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이런 어른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또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바로 어제였습니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글을 쓰라 해놓고서는 옆에 앉은 아이에게 떠들어 대며 장난을 거는 아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조용히 하고 빨리 쓰지 못 혀!"

부드럽게 좋은 말을 건네도 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억압적인 말투가 튀어 나오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가 학교에서 배워왔던 방식을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우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입니다. 내 어린 시절 마음 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억압 교육'을 툴툴 털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우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기도 입니다. 내 어린 시절 마음 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억압 교육'을 툴툴 털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를 배우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는 일이기도 입니다. 내 어린 시절 마음 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억압 교육'을 툴툴 털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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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손질#방과후 학습#자유로운 글쓰기#두려움 없는 아이들#억압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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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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