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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필리핀에서도 대표 빈민가로 꼽히는 까부야오(Cabuyao)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아시안브릿지(Asian Bridge)에서의 자원활동을 통해 만난 UPSAI(Urban Pootr Southville Association Inc. ; 도시 빈민 사우스빌 연합회) 회원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까부야오 사우스빌의 유일한 고등학교. 이곳에서 UPSAI 회원들을 다시 만났다.
 까부야오 사우스빌의 유일한 고등학교. 이곳에서 UPSAI 회원들을 다시 만났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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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존시티(Quezon City)에서 자가용으로 약 2시간. 오전 10시 가까워 도착한 곳은 까부야오 내 사우스빌1 지역 유일한 고등학교. 그곳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주민들을 상대로 열띤 강의를 하고 있었다. 교실 밖에 있던 몇몇 이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표정으로 아는 체를 했다.

UPSAI 회원들이 가르치고 있던 것은 그들이 얼마 전 '강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배우고 익힌 '성(性)인지 훈련(Gender Sensitivity', '여성·아이 반(反)폭력(Anti-Violence against Women and Children, '생명샘 건강(Reproductive Health), '재무 지식(Financial Literacy)' 네 가지 주제였다. 학생(Trainee) 신분일 때 떠들고 장난치던 모습과 달리 교탁 앞에 선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진중한 교사였다.  

일요일(10일) 오전, 사우스빌 고등학교 교실 안에선 UPSAI 회원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아시안브릿지에서 자신들이 배웠던 강의를 다시금 들려주고 있었다.
 일요일(10일) 오전, 사우스빌 고등학교 교실 안에선 UPSAI 회원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아시안브릿지에서 자신들이 배웠던 강의를 다시금 들려주고 있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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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부야오는 한국 언론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필리핀 정부가 2003년 마닐라를 관통하는 남북통근열차 사업을 추진하면서 한국에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요청했고, 우리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전체 구간 중 남부철도(South Rail) 36킬로미터 시공을 대우 인터내셔널이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부 소유의 철길 주변에 판자촌을 형성해 살던 빈민들이 대량(1만 여명)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우스빌1 지역은 개발구역에 묶인 마카티, 마닐라, 까부야오에서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첫 번째로 정착한 마을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자체 조직한 단체가 UPSAI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통근열차 ODA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주민들이 거주했던 사우스 레일, 사우스빌1 지역에 있는 일명 '쓰레기산(山)', 쓰레기산 지척에 농장과 그곳의 소들이 떼지어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통근열차 ODA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 주민들이 거주했던 사우스 레일, 사우스빌1 지역에 있는 일명 '쓰레기산(山)', 쓰레기산 지척에 농장과 그곳의 소들이 떼지어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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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뒤에서 수업을 참관하다 학교 밖이 궁금해졌다. 혼자 나가려는데 국내외로 이슈화되고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어 주민간 갈등은 물론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며 UPSAI 회원이자 이곳 고등학교 교사인 크리스가 자청해 동행했다. 

교문을 나온 지 5분여. 말로만 듣던 '쓰레기산(山)'이 보였다. 양 옆에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ㄴ자 골목을 지나자 마을 한가운데 말그대로 산처럼 쌓인 쓰레기장이 나타났다. 무더운 날씨에 역한 냄새는 물론 그 앞으로 경계도 없이 개인 농장과 그곳 소유일 가축들이 떼를 이루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사우스빌 주민들은 물조차 맘 놓고 마시지 못하는 상황이다.

점심시간. 학교로 돌아오자 UPSAI의 나이 지긋한 여성 회원들이 3등분 된 식판에 국과 밥, 생선 한 마리씩을 옮겨 담았다. 수업이 먼저 끝난 주민, 회원들이 식사를 시작했다. 예고도 없이 온 지라 행여 부족한 먹거리를 더 축내는 게 아닐까 싶은데 가장 고령인 듯한 회원이 밥을 듬뿍 담은 식판을 내밀었다. 점심 후엔 바나나를 튀겨 만든 간식까지 챙겨주었다.

뭐 하나 충족한 것 없는 빈민가 사우스빌.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처음 만난 이방인을 위해 귀한 식사와 간식을 선뜻 내주었다.
 뭐 하나 충족한 것 없는 빈민가 사우스빌.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처음 만난 이방인을 위해 귀한 식사와 간식을 선뜻 내주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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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빈 의자에 앉아 나른함을 느끼는데 오전 내내 학교 마당서 뛰놀던 소녀 둘이 곁에 와 앉았다. 그 중 한 명은 간간히 교실 밖 창문에 매달려 어른들 공부하는 냥을 지켜 봤다. "헬로우" 했더니 수줍어 고개를 돌리면서도 웃으며 다시 본다. 7살 프린세스와 9살 라일라였다.

잠시 후 둘 중 보다 적극적인 성격의 프린세스가 펜을 달라더니 금세 카드 하나를 만들어 손에 쥐어줬다. 이어서 라일라도 강의 자료를 만들다 버려둔 종이를 가져와 무언가를 써서 줬다. 두 개 다 "Dear Norah(친애하는 노라)" 외에는 알아볼 수 없는 따갈로그였지만 왠지 다 이해한 것도 같았다.

교실 밖 창문에 매달려 어른들의 수업을 지켜보던 7살 프린세스(앞)와 9살 라일라.
 교실 밖 창문에 매달려 어른들의 수업을 지켜보던 7살 프린세스(앞)와 9살 라일라.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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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경 한번 더 외출을 했다. 이번엔 또다른 UPSAI 회원인 쟁과 함께였다. 근처 그들이 원래 살던 사우스레일을 보기 위해서였다. 오전에 본 쓰레기산을 지나, 쓰레기산의 정문인 듯한 곳을 지나고 벽돌과 시멘트로 집짓기가 한창인 곳을 지나자 풀숲에 묻힌 철길이 나왔다. 오나가나 오물과 악취다. 지금 19살인 쟁은 "전엔 철도가 지나다녔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게 믿어지냐"고 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너무 힘든 시간(too hard time)"이라고 강조했다. 쟁의 꿈은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이었단다. 하지만 사우스빌로 옮겨오면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다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삶을 포기했으며(abandon) 세 오빠 모두 실업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약 140페소 하는 교통비를 댈 여력이 없다고 했다.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까. 그들에 비하면 가진 게 너무 많은, 짧게 머물고 결국은 떠날 이방인의 신분으로 감히 위로라는 걸 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며 걷는 내내 그녀 이야기만을 들었다.

오후 4시. 이날 마지막 일정인 UPSAI 회원들의 졸업식이 열렸다. 6주간 진행한 아시안브릿지의 강사 양성 프로그램에 100% 출석한 이들에게 졸업장이 수여됐다. 황량한 교정, 십여 명의 졸업생, 그들을 지도한 강사들, 아시안브릿지 관계자,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몇몇의 객이 함께 했다. 식 중간쯤에 라구나 시장(市長)도 참석했다.

축사 시작과 함께 감격에 목이 매인 로스비 모이카씨.
 축사 시작과 함께 감격에 목이 매인 로스비 모이카씨.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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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촐한 기념식이었지만 졸업장을 받는 UPSAI 회원들과 그들의 지난한 시간들을 함께 헤쳐온 관계자들의 표정에 감격이 서렸다. 이번 강사 양성 프로그램의 예산 요청부터 전 과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아시안브릿지 까부야오 프로젝트 P/J 담당 로스비 모이카 씨가 축사 시작과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정말이지 여러분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순간, 내내 유쾌하던 UPSAI 회원들도 하나둘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당장 먹을 것도, 편히 누워 잠잘 곳도 없는 삶 가운데 '희망'의 씨를 뿌려온 그들이 서로에게 전하는 감사와 위로 같았다. 그 노고를 다 알 길 없는 내 눈가도 내내 뜨거움이 북받쳤다.  

아시안브릿지의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이수한 UPSAI 회원들의 졸업식.
 아시안브릿지의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이수한 UPSAI 회원들의 졸업식.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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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내게 묻는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또다른 너무 많은 사람과 사람 아닌 생명들이 불행한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 꿈을 좇는다 하지만 내내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다.


태그:#까부야오, #ODA, #UPSAI,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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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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