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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내려다본 호텔 뒷골목. 내부는 겉보기와 달리 화려하게 꾸며놓았다고 합니다.
 숙소에서 내려다본 호텔 뒷골목. 내부는 겉보기와 달리 화려하게 꾸며놓았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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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14일)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주도(州都) 연길(옌지)에서 아침을 맞았다. 눈을 뜨니 오전 5시30분,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하고 만주관련 자료집을 보면서 하루를 준비했다.

밖이 환해지기에 커튼을 걷었더니 조막만 한 지붕들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옛날 고향동네 피난민 촌을 연상시켰다. 북방식 가옥형태에 상처난 굴뚝들이 하나같이 지붕 중간을 뚫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다섯째 날 둘러볼 유적지는 연길에서 1시간30분~2시간 거리에 자리한 '청산리전투' 유적지와 대종교 3종사(나철, 서일, 김교헌) 묘역,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 여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일송정, 명동촌, 주덕해 옛 집터, 용정역 등으로 일정이 빡빡했다.    

그러나 모두 2010년 여름(8월)에 다녀간 곳이어서 호기심이 덜했다. 청산리전투 기념비, 일송정, 대종교 3종사 묘역 등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해서 끝까지 동행할 것인지 작은 갈등이 일기도 했다. 그래도 만주의 겨울산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중식에 양식이 가미된 뷔페식 아침. 한식만 먹다 튀김을 먹으니까 별미였습니다.
 중식에 양식이 가미된 뷔페식 아침. 한식만 먹다 튀김을 먹으니까 별미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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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가 조금 넘어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은 중식에 양식을 곁들인 뷔페식이었다. 튀김 종류로 배를 채웠는데, '속마음 알기 어려운 중국사람'이란 우스갯소리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야채튀김인 줄 알고 먹으면 고기요, 고기튀김인 줄 알고 먹으면 야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먹을수록 입맛이 당겼다.

아침을 맛있게 먹고 방으로 가서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침 먹는 사이에 눈이 내렸는지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안전 가이드는 추운 지역이어서 눈이 조금만 내려도 쌓이고,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 쌓인 눈은 이듬해 봄까지 간다고 했다.

가루눈을 뿌려놓은 것처럼 눈이 얇게 깔린 호텔 뒷골목. 연길 기차역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가루눈을 뿌려놓은 것처럼 눈이 얇게 깔린 호텔 뒷골목. 연길 기차역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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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두툼하게 입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머플러로 얼굴을 감싸고 목을 잔뜩 움츠린 모습에서 날이 얼마나 추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칼바람이 볼때기를 얼얼하게 했다. 연길 추위도 만만치 않았으나 한국에서 가장 추운 평안북도 '중강진'보다 한참 북쪽이니 더는 따질 게 없었다. 

숨을 들여 마시는데 목이 막혔다. 중국 건물들은 집체난방이고, 겨울 땔감이 석탄이어서 찬바람에 섞여오는 매캐한 연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맵다며 기침을 '콜록콜록' 해댔다. 그래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밉지 않았다.

버스에 오르니 8시20분, 기사는 핸들을 용정·화룡 방향으로 꺾었다. 조금 어색해서 더욱 정겹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한글 간판들. 연길 거리 분위기는 그동안 다녔던 흑룡강성 하얼빈, 목단강 등과 완연히 달랐다. 그래서인지 만주기행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차창 밖 다채로운 풍경이 있는, 연길에서 용정-화룡 가는 길

들녘의 소들. 만주는 독한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까 가축을 마음 놓고 내놓는다고 합니다.
 들녘의 소들. 만주는 독한 농약을 뿌리지 않으니까 가축을 마음 놓고 내놓는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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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과 용정은 아이가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을 닮아 이름을 붙였다는 모아산(517m)이 경계선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시내 중심으로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을 지나니 세전벌이 펼쳐졌다. 산, 구릉, 논, 밭, 강, 촌락 등 차창 밖 정경도 영화 화면처럼 자주 바뀌었다.

영하 20도 추위에도 산과 들에 방목해 놓은 소나 말들이 자주 보였다. 아침에 풀어놓았다가 저녁에 몰고 들어간단다. 만주의 소들은 밭에 널려 있는 마른 옥수수가지를 즐겨 먹는다고 했다. 그래서 가을에 옥수수를 거둬들일 때 소들의 겨울 먹이를 남겨 놓는단다.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서 먹이를 찾는 소들은 여름과 사뭇 다른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방목해놓은 것으로 보이는 송아지 예닐곱이 자칫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만주의 겨울 들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연길에서 용정까지 25분, 용정에서 화룡까지 40분, 화룡에서 청산리까지 35분으로 청산리대첩 기념비까지는 2시간 가까이 걸렸다. 화룡에서 청산리까지 24km 정도 되지만, 좁은 빙판길인데다 비탈길 코스가 있어 거북이 운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엔 시원하게 흐르던 냇가가 꽁꽁 얼어버린 청산리 이웃마을. 시골의 정겨움이 묻어났습니다.
 여름엔 시원하게 흐르던 냇가가 꽁꽁 얼어버린 청산리 이웃마을. 시골의 정겨움이 묻어났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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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마을로 접어들자 참변을 당한 주민과 그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청산리 전투 기념비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우거진 숲과 잡초의 싱그러움, 시냇물이 자갈과 부딪치는 소리가 아름다웠던 여름에 왔다가 하얀 겨울에 오니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감회가 새로웠다.

박영희 시인 설명에 따르면 조선족 동포들은 독립군이 마을에 나타나면 서로 먼저 집을 내주고, 자신들은 한뎃잠 자는 걸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게 주민들의 협조가 있었으니 독립군의 사기가 충천해서 대승을 거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녹색 향기가 하얀 눈으로 변했을 뿐 집들은 그대로였다. 2010년 광복절에 다녀가서 그다지 새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풍찬노숙하며 추위와 싸우고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던 독립군의 구국 항쟁 정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기념비가 세워진 산에 올랐다.

박영희 시인의 설명을 들으며 놀라운 표정으로 청산리전투 기념비를 바라보는 일행들.
 박영희 시인의 설명을 들으며 놀라운 표정으로 청산리전투 기념비를 바라보는 일행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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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에서 내려다본 마을. 만주의 시골도 모두 도시로 나갔는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념비에서 내려다본 마을. 만주의 시골도 모두 도시로 나갔는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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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앞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선열들을 위한 묵념을 올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묵념을 마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 덮인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농가 몇 채가 이웃한 평화로운 산골 마을이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경신년(1920년) 참변 때 일제의 만행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신년 참변은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에서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제가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로 투입시켜 가족을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지르고, 농민과 부녀자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사건이다. 확인된 사망자만 3469명, 확인되지 않은 수를 합하면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고.

청산리 전투 유적지... 이름 없는 별 '최인걸' 이야기

눈 쌓인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일본군을 대파한 전적지들이 민족의 종산 백두산 자락에 있어 의미를 더했습니다.
 눈 쌓인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일본군을 대파한 전적지들이 민족의 종산 백두산 자락에 있어 의미를 더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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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는 독립군 5000명이 일본군 2만 5000명을 상대로 1920년 10월21일 아침부터 26일 새벽까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二道溝)와 삼도구(三道溝) 일대에서 유례없는 승리를 거뒀던 독립전쟁이다. ('道溝'는 '골짜기'를 뜻함)

주요 전투로는 '백운평전투(21일)', '천수평전투(22일)', '어랑촌전투(22일)', '맹개골전투(23일)', '서구·천보산전투(24, 25일)', '고동하곡전투(26일)' 등이 있는데 독립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지형을 이용한 전략전술, 우수한 무기, 주민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단다.
 
특히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부대가 연합하여 싸웠던 '어랑촌전투'는 의미 깊게 느껴졌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어랑촌은 협소한 골짜기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독립군에 가담하였단다. 또한 아낙들은 날아오는 포탄을 무릅쓰고 행주치마에 주먹밥을 날라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고.

어랑촌 전투의 이름 없는 별 '최인걸(崔麟杰)'에 얽힌 일화는 유명하다. 기관총 중대장이었던 그는 한 기관총 사수가 총에 맞아 전사하자 그 기관총을 자기 몸에 묶고 탄환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군에게 난사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단다. 영화 촬영장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 있었다니 놀라웠다.

아, 나는 북로 군정서 소년병 최인걸/ 자랑스런 대한독립군의 기관총 사수였다/ 지금도 나는 꼭 한 번만 더 살아나고 싶구나/ 언제고 한 번만 더 살아 일어나서/ 하나 남은 기관총에 다시 허리를 묶고/ 끊임없이 이 땅에 밀려오는 저 적들의 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가고 싶구나/ 밀림 속에 숨어 아직도 돌격 소리 그치지 않는/ 저 새로운 음모의 한복판을 향해/ 빗발치는 탄알소리로 쏟아지고 싶구나/ 늦가을 달 높이 뜬 삼천리 반도를 오가며/ 그때 부르던 기전사가 다시 부르고 싶구나. (도종환의 <기전사가:祈戰死歌> 중에서)

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만주기행을 두 번째 하면서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간 이름 없는 별들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에 기관총을 메고 일본군을 향해 울분을 토했던 최인걸도 그 중 한 사람. 기념비에서 내려오면서도 "나는 그들에게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한 마음으로.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산리전투, #최인걸, #연길, #화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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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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