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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말한다. '①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②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③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대한민국에 사는 장애인들은 외친다. '법은 법전 속 문구일 뿐이다'라고. 근로의 권리행사도, 근로의 의무이행도, 존엄성을 보장하는 근로조건도 장애인에겐 해당사항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 기자 주

한 달 월급 5만원, 핸드폰비도 안 나와

 지체장애 3급인 박성애(가명) 씨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300여 통의 이력서를 썼다고 밝혔다.
지체장애 3급인 박성애(가명) 씨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300여 통의 이력서를 썼다고 밝혔다. ⓒ 그림. 박수정

정신지체 장애인인 장내원(44)씨는 여러 곳의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거쳐 왔다. 보호작업장은 일반고용이 어려운 중증 장애인에게 보호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재활시설 중 하나다.

첫 작업장은 20여년 간 머물렀던 인천의 한 지적장애인 생활시설이었다. 그 시설엔 '장애인의 자립기반 조성'을 위한 보호작업장이 있었고, 장씨는 그곳에서 양초를 만들었다. 한 달을 꼬박 일해 그가 받았던 월급은 5만원 내외. 자립은 고사하고 핸드폰비 내기에도 빠듯한 액수다.

그 보호작업장이 특별히 박한 건 아니다. 상당수 재활시설이나 복지관의 장애인 보호작업장이 상자 접기, 비누 만들기, 종이봉투 붙이기 등 단순 임가공 수준의 작업들을 행하고 있다. 그 노동에 대한 임금은 최저임금을 논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빈약하다. 10만원을 넘지 않는 곳이 많다.

구성회 사회복지사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집에만 있느니 그것도 나름의 사회생활이니까 그렇게라도 훈련 받길 원하는 경우도 있다. 그와 반대로 그걸 받을 바에는 일하지 말라면서 장애인 자녀들을 집에만 두는 부모님들도 있다"면서 선택지가 별로 없는 장애 노동의 현실을 전했다.

장씨는 재활 시설을 옮기면서 일터도 옮겼다. 이번엔 동인천의 장애인 보호작업장에서 병따개 만드는 일을 했다. 임금은 그 전보다 무려 10배가 오른 50만 원. 물론 자립생활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탓에 6개월 전, 인천 남구 용현동에 있는 장애인 세탁장인 '미추클린센터'로 다시 작업장을 옮겼다.

 인천 남구 미추클린센터에서 일하는 장내원 씨가 빨랫감들을 세탁기에서 빼내고 있다.
인천 남구 미추클린센터에서 일하는 장내원 씨가 빨랫감들을 세탁기에서 빼내고 있다. ⓒ 노동세상

그 전보다 일은 좀 고되다. 하루 종일 서서 호텔과 외식업체에 납품하는 수건 등을 커다란 세탁기와 다리는 기계 등에 넣고 빼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도 월급은 최저임금 수준을 받아서 이전보다 생활이 좀 나아졌다. 월급은 어떻게 쓰냐는 질문에 장씨는 "통장에 넣어요. 장가갈 때 쓰려고…"라고 느리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회식 같이 가자는 바른 곳도 있구나'

 서울시 한 구청에서 장애인행정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오순애 씨.
서울시 한 구청에서 장애인행정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오순애 씨. ⓒ 노동세상
정부는 장애인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장애인행정도우미, 장애인복지일자리사업 등 장애인 공공일자리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순애(여, 51)씨는 경력 4년차의 장애인 행정도우미다. 서울의 한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문서수발과 간단한 컴퓨터 작업, 전화 응대 등 행정업무를 보조하고 있다.

오씨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결혼 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눈을 다쳤다. 별로 개의치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세수를 하려는데 앞이 뿌옇게 보여 안경점을 찾았다. 안경점에선 안과에 가 보라고 했고 뒤늦게 서울의 대형병원들을 찾아다녔지만 완전히 죽어버린 한쪽 시신경을 살릴 수는 없었다. 한쪽 시력은 완전히 잃은 채 시력 0.1의 다른 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시각장애 3급이다.

그 후 집에서 아르바이트나 부업 같은 일만 했던 그가 정식 일자리를 찾아 나선 건 생존의 절박함 때문이었다.

"우리집 아저씨가 건설업에서 20년을 일했어요. 그런데 IMF 때 회사가 부도나서 퇴직금도 못 받고 나온 다음부터는 지금까지 돈을 제대로 못 벌고 있어요."

거의 15년을 고생하던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직후였던 2007년, 오씨는 '공공근로라도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동 주민센터를 찾았다. 공공근로 신청을 하고 나오는데 게시판에 시행을 막 앞두고 있던 장애인행정도우미 모집공고가 보였다.

"운 좋게도 둘 다 됐는데 공공근로는 3개월밖에 못 한다고 해서 1년 계약직인 장애인행정도우미를 했어요."

장애인행정도우미는 계약기간이 긴 대신 임금이 공공근로보다 적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월급은 4대 보험 빼고 70만원 정도 나와요.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자마자 임대아파트 임대료랑 관리비, 각종 공과금, 교통비 등 빠지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그 임금으로는 살 수가 없어요. 우리 아저씨한테 '반찬도 간장이면 간장, 김치면 김치 식으로 하나만 놓고 먹자'고 했어요. 빚 얻어서 반찬 사먹을 수 없잖아요."

그 돈마저 받지 못했던 기간이 있다. 2007년부터 3년 동안 동 주민센터에서 장애인행정도우미를 했던 오씨는 2009년 말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이도 많고 컴퓨터도 못해서 평가점수가 미달됐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다시 살 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하던 2010년 4월, 구청에서 대기자로 있던 장애인행정도우미에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매달 생활비도 부족해 저축은 꿈도 못 꿨던 생활, 수입이 없던 4개월을 어떻게 버텼냐고 물었더니 오씨의 눈에 설핏 눈물 방울이 맺혔다.

구청에서 일하게 되니 주민센터에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회식에 참여하게 됐다. 오 씨는 "저는 겉으로 보기엔 장애인인줄 모르니까 차별받는 게 별로 없는데 제가 아는 다른 구에서 일하는 친구는 너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은 다리를 좀 저는데 같이 일하는 공무원들이 시책이 내려오면 말도 안 해주고 무시한대요. 이번에 새로 계약해야 하는데 책상 치워버리고 다른 사람을 앉히고선 말도 안 해줘서 너무 속상하다고 연락 왔어요"라면서 "여기 와서는 같이 회식도 하자고도 하고 잘 대해줘서 이렇게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바른 곳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다시 장애인행정도우미를 하게 되자 오씨는 바로 컴퓨터를 배웠다. 다시 일을 못 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12월이 오는 게 두렵다. 다시 계약이 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한 달 한 달이 허망해요. 월급 받으면 다 나가고 남는 게 없으니까 삶에 회의도 느껴지고요. 모든 게 원망스럽죠."

오씨는 작년에 전국에 있는 장애인행정도우미들이 한국장애인개발원에 모여서 교육을 받을 때 관계자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애로사항을 물었을 때 장애인행정도우미들은 입을 모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낮은 임금을 꼽았고, 당시 정부 관계자는 2011년부터는 대책을 세우겠다고 답변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오씨가 올해 초 한국장애인개발원에 월급 인상은 어떻게 되고 있냐고 전화를 걸었다고. 정부는 그에 화답했다. 작년까지 유지했던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의 근무시간을 올해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늘렸다. 대신 금요일 근무를 빼 주4일제가 됐다. 당연히 월급은 그대로다.

"재계약 원하면 불법으로 장애등급 바꿔 오라고 해"

박성애(가명·여·39)씨는 지난 15년간 많은 직장을 다녔다. 서류정리, 홈페이지 관리, 공공근로도 해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의 극성으로 처음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후, 컴퓨터는 그의 친구였다. 그렇게 컴퓨터랑 놀아왔지만 지체장애3급인 그의 장애는 그를 전공과 상관없는 일도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일을 많이 할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까이기도 많이 까였다"고 말했다. 이력서를 무려 250~300통을 쓰면서 발품도 많이 팔았다.

"경력 쌓고 가면 나을까 싶어서 경력 쌓고 갔더니 경력이 너무 화려해서 그것도 부담스럽다고 해요. 경력이 없을 때는 더 공부하고 오라고 하고. 딱 까놓고 장애인이어서 못 받겠다고 하는 사장들도 있어요. 어떨 때는 차라리 그렇게 말해주는 게 더 편해요."

시원스레 말한다고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박씨의 바로 전 직장은 피아노 교습 관련 인터넷회사였다. 그는 서류정리와 홈페이지 관리를 했다. 사장은 면접 때 3개월 일하는 걸 보고 정직원으로 채용할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장은 3개월 동안 그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 3개월 동안 공짜로 쓰겠다는 게 사장의 진짜 속셈이었던 게다. 그는 사장과 대판 싸우고 직장을 나왔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한다.

"장애인 친구들한테는 많이 얘기했는데 일반인들한테는 이런 경우가 별로 없을 것 같아서 말해요. 전에 어떤 회사에서 2년을 일하고 재계약을 앞둔 때였어요. 사장이 비서를 시켜서 여기에서 계속 있으려면 지체장애 3급을 뇌병변 1급으로 받아와야 한다는 거예요. 뇌병변 1급 여성은 장애보조금을 최고로 받거든요. 그렇게 장애등급을 바꿔주는 병원들이 있는데 그건 불법이에요. 나 정도면 가능하니까 불법인데도 시키더라고요. 같이 일하던 언니는 싸우기 싫다고 바꿔왔는데 저는 물었어요. 뇌병변 1급이 되면 비행기 탈 때도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고 불편한 점이 많은데 왜 굳이 그걸 해야 하냐, 그렇게 바꾸면 평생 직장으로 해줄 거냐고요. 그랬더니 안 할 거면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쫓겨 나왔어요."

이런 아픔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일터를 찾았다.

"6년 동안 일했던 곳에서 차별과 무시를 겪으면서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마지막에 폭발해서 나온 적이 있어요. 나를 찾고 싶어서 6개월 동안 일을 쉬었는데 그때 굉장히 피폐해지고 더 아프더라고요. 일을 하면 깨어있다는 걸 느끼죠."

그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일을 하는 이유다.

박씨는 현재 장애인자립공장 '노란들판'에서 일하고 있다. 일반 사업장에서 일하면서 하도 상처를 받아서 '장애인과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우연히 노란들판을 소개받았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면서 장애를 문제 삼지 않는 노란들판에서의 생활이 그는 행복하다.

"일을 해보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일을 하더라도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장애인들은 일하고 돈 버는 게 꿈이라고, 그런 꿈을 꾸는 것조차 어렵다고 하는데 그동안 저는 일을 하면서도 그게 좋은지 몰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꿈꾸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앞으로도 계속 지금 일터에서 일하고 싶다고 환하게 웃었다. 계속 일하고 싶은 일터는 모든 사람, 특히 장애인들에겐 범접하기 힘든 꿈이다. 현재까지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4월호(www.laborworld.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고용#미추클린센터#노란들판#장애인의무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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