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란 시를 즐겨 외던 때가 있었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동학년 곰나루의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시 구절 읊조리다 보면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지고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혁명은 그렇게 엄숙하고 비장한 느낌이었다.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을 읽기 전까지는.

 

겉그림 <일단 웃고 나서 혁명>
겉그림<일단 웃고 나서 혁명> ⓒ 푸른숲

케난 장군은 퇴역한 지 오래였지만 집 안에서만 들어앉아 있지 않았다. 정원의 모든 과실수를 일렬로 맞춰 심었고, 닭과 칠면조, 거위를 길렀으며, 아침마다 이들의 수를 점검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닭들이 줄 맞춰 행진하다가 해산해 풀밭에서 모이를 먹도록 훈련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책 속에서)

 

<암호가 뭐기에>의 주인공 케난 장군을 묘사한 부분이다. 뼛속까지 군인 정신으로 길들여진 습관은 퇴역 후에도 모든 가족의 일상을 단속하고 닭과 칠면조 고양이 등의 집안 동물의 행동까지도 통제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읽다 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하지만 단지 웃고 넘겨버릴 이야기가 아니다. 일제 지배를 거쳐 30년이 넘는 군인들의 통치를 거쳐 온 우리 주변에서도 주인공 케난 장군처럼 정해진 사고의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조금만 시야를 돌리면 다양한 세상을 느낄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

 

케난이 만든 질서는 허약하지 그지없다. 중풍에다 손자의 중위 진급 실패 소식 앞에서 이틀간 침실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동안 저택의 질서는 엉망이 되고 만다. 자정이 넘도록 잠을 안 자는 사람, 정오까지 늘어지게 자는 사람, 벽의 액자마저 비뚜름 걸려 있고, 의자와 탁자 또한 흐트러져 있다. 정원의 개마저 제때에 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닭들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꼬끼오' 운다. 

 

엄숙하지도 비장하지도 않게 혁명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다고 알맹이 외면한 채 변죽만 두드리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정곡을 찔러준다. 사회 전반에 독소처럼 퍼진 부패, 부조리, 악습을 향해 유쾌, 상쾌, 통쾌한 풍자의 칼을 겨누고 그 모순을 여지없이 까발린다.

 

온갖 거짓 기사로 명성이 높던 기자가 딱 한 번 거짓말 한 마디 보태지 않은 있는 그대로 사실 기사를 썼다가 체포되었다는 <민주주의 영웅 되기 참 쉽죠?>, 미국인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물건 다 빌려다가 집안 장식했다가 된통 창피만 당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우리 집에 미국 손님이 온다>, 반정부 운동을 그만두고 무허가촌에 이주해 살던 사람에게 이웃 사람들이 방값 외상값 안 갚아도 좋으니 제발 이사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이유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찾아오는 경찰들로 인해 매상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 등등….

 

터키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지즈 네신'이 쓴 작품이지만, 읽다보면 먼 나라 낯선 이야기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부조리와 위선을 꼭 꼬집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34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풍자 문학상을 휩쓴 터키 문학의 거장이 빚어낸 작품이라서 그런 걸까. 웃음 끝 여운이 오래오래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아지즈 네신/이난아 옮김/푸른숲/2011.3/12,000원


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푸른숲(2011)


#혁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