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6일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카터 방북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 이뤄진 클린턴 장관의 방한은 전 세계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클린턴 장관의 이번 방한은 2009년 2월, 2010년 5월에 이어 세 번째이다. 클린턴은 한반도 정세의 중대한 고비마다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정부와 대북정책을 조율했다. 2009년 2월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 징후가 뚜렷해지는 시점이었고 2010년 5월에는 천안함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이번 방문도 카터의 방북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이뤄졌다.
이 때문에 클린턴의 이번 방한은 한반도 정세가 중대한 변화의 국면에 들어섰다는 분석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근거로 여겨진다.
분주한 한반도, 변화는 시작됐다
지난 7일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5박 6일 일정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김계관 부상의 방중 일정과 목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의 우다웨이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만나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재개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중국을 방문하였다. 이 때문에 "베이징을 무대로 미국과 북한이 6자회담 재개 해법을 놓고 간접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됐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한때 캠벨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의 베이징 회담 성사 가능성도 대두됐다.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접촉은 없었다. 그럼에도 북미 사이에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일정한 조율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하다.
김계관 부상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김 부상이 베이징에 도착한 7일 평양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4차 회의가 열렸다. 김 부상이 중요한 회의에 불참하고 중국을 방문했다면 그만큼 긴급한 현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캠벨 차관보의 방중 시점도 의문이다. 왜 굳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절묘한 시점에 중국을 방문했느냐는 것이다. 단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순진하게 믿기에는 최근 북한과 미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미국은 이미 대북 식량지원 재개를 검토하고 있으며 카터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독일에서는 북한과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이 만나 비공식 토론회를 열었다. 그리고 캠벨 차관보의 방중 직후 클린턴 장관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해 북핵 문제와 6자회담 재개 방안을 협의했다.
외교가에서는 김계관 부상의 방중은 중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신호로 볼 수 있으며 미국의 대북식량지원,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등으로 6자회담 재개 국면이 가시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느닷없이 6자회담의 재개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북·미 사이에 상당한 의견접근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양측은 어떻게 의견을 나눈 것일까? 캠벨 차관보가 김계관 부상의 휴대전화 번호라도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통한 것일까? 어떤 형태로건 당국 간 접촉이 있지 않고는 의견조율이 이뤄질 수 없다.
아마도 양측의 일차적 의견조율은 지난 3월 독일에서 열린 비공식 민간토론회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 토론회는 어디까지나 민간 수준의 비공식적 접촉이다. 설령 독일토론회에서 의견 접근이 이뤄졌다 해도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당국 수준의 공식적 접촉이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캠벨 차관보와 김계관 부상의 행보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수석대표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변의 이목 때문에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중매인이 양가를 오가며 혼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만남을 주선한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방자와 향단이었다.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베이징에서 북미 양자 협의가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클린턴 장관은 그 결과를 통보(한미관계에 엄밀한 의미의 협의란 없다)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것이다.
이미 북·미 사이에는 혼사가 무르익고 있다. 아마 카터의 방북은 양가 상견례가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결혼 날짜를 잡는 것뿐이다. 카터가 여러 가지 실무적 난점에도 중국을 거치지 않고 전용기를 이용해 서울로 바로 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결혼 날짜는 하객보다 신부가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묘한 온도차이, 이견은 없었다?
클린턴 장관은 한미외무장관회담 직후 "대북정책을 한국이 이끌고 미국은 지원하는 기조를 계속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장관은 대북정책의 한미 공조를 재확인(한미 사이에 이견이란 있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라면 더욱)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조기 비준 의지를 다짐한 후 일본으로 떠났다.
외교부는 한미외무장관회담에서 6자회담이 재개되려면 핵을 의제로 한 남북대화가 우선이고, 이를 통해 북한이 비핵화 진정성을 구체적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한 양측은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해 "북한의 책임 있는 태도를 촉구한다"고 합의했다. 클린턴 장관은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대북 식량지원 대해서 "한미 간에는 전적으로 신뢰관계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국과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한국과 협의는 할 수 있지만, 결정은 미국이 한다는 의미다.
클린턴 장관은 이번 방한을 통해 이미 북·중과 조율을 끝냈을 가능성이 큰 북한 비핵화 과정의 틀에 대해 한국 정부와 합의했다.
지난 17일 <중앙일보>는 한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클린턴 장관의 방한은 최근 북한과 중국이 던진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북·미 대화→6자회담'의 3단계 카드에 대해 한미가 의견을 정리해 공을 다시 넘긴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남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사찰 허용이나 핵실험·미사일 발사 중지 등 비핵화에 진정성을 보이는 조치를 개시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한미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2010년 말 북·러 외무장관회담에서 러시아 측이 북한에 전달한 입장이다. 북한은 이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소식통은 천안함, 연평도 사건과 관련해 "한미는 6자회담 재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는 점에 일단 합의했으나 회담의 전제조건이라고 속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공식 발표문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유연성을 둬야 한다는 미국의 태도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빠르면 이달 안 남북 비핵화 회담을 제안해 온다면 최초로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며 6자 회담의 재개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중앙일보>의 보도처럼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아니라 북한의 도발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분명히 온도차이가 있다. '북한의 도발'에 연평도 사건이 포함될 수도 있지만 천안함은 다르다. 연평도 사건은 북한의 행위가 분명하지만 천안함 사건은 한국과 북한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북한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북한의 도발에 천안함 사건은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해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천안함 사건이 포함됐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한미 양국은 책임 있는 조치를 3단계 회담의 전제조건이라고 못 박지도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명박 정부의 기조는 선 사과, 후 대화이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가 있어야 남북대화건, 6자회담이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미 발표문에는 이 점을 명확히 하지 않았다. 문맥상 전제가 아니라는 해석에 오히려 무게가 실린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생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미묘하지만 한미 간 시각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그럼에도 양측은 대북정책에 대한 공조를 재확인하고 "한미 간에는 전적으로 신뢰 관계가 형성돼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한미 사이에 그 어떤 이견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견이 없다면 발표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즉 이명박 정부의 대북 기조가 변화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양측 사이에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이 남북 비핵화 회담을 제의한다면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 없이도 남북대화를 할 수 있는 뜻이다.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미 사이에 일정한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클린턴의 방한으로 이견은 사라진 듯하다. 결국 이견은 미국의 입장대로 정리될 것이다. 천안함이 6자 회담 재개의 장애가 되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끌고 미국이 지원한다는 클린턴의 언급은 공치사에 불과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그랬다. 한국은 이끌고 미국은 지원했다. 과연 누가 주도한 것일까? 형법에 따르면 살인자보다 살인을 교사한 자가 더 엄격한 처벌을 받는다.
MB, 천안함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이제 공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넘어왔다. 늦어도 이달 안에 북한이 6자 회담 남북수석대표회담을 제의해 올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선 사과, 후 대화의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천안함 사과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대화하자는 것은 사실상 대화를 하지 말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최근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전략적 인내의 동력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지금 대화를 하지 않으면 북한은 추가 군사 조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핵실험이건, 탄도미사일 발사건, 전면전 대응이건 북한이 추가행동에 나설 경우 미국은 더 견디기 힘들어진다. 이렇다 할 대응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바마 행정부는 추가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카터가 평양으로 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추가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북한의 공세를 멈추는 방법은 단 한 가지이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미국이 이 요구에 응하지 않는 한 북한은 결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카터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비핵화와 평화협정, 북미수교를 맞바꾸는 통이 큰 대화를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
천안함은 이제 북한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미국의 골칫거리가 되어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끝까지 천안함의 키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미국도 함께 침몰할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을 매우 아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만일 천안함이 미국의 장애가 된다면 오바마는 가차없이 그것을 격침할 것이다. 천안함 문제의 또 다른 해결 방식은 그 누구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침몰하는 천안함에서 탈출해 구명선에 오르려면 그 기회는 지금 뿐이다. 지금 구명선에 오르지 않으면 거대한 변화의 지진·해일이 한반도와 청와대를 덮치게 될 것이다. 한반도의 대지각변동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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