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롯이 기억 속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풍경
▲ 천호묘채의 거리 풍경 오롯이 기억 속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풍경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카이리의 아름다운 국수집

카이리 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대십자(大十字)에서 내린다. 카이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먼저 숙소를 수소문해 카이리 대주점(凱里大酒店)에 짐을 풀어놓고, 점심을 먹으러 나선다.

낯선 곳에서 가장 힘든 것이 먹을 데를 찾는 일이다. 입맛에 맞는 집을 찾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음식 이름조차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겨우 찾아들어간 식당에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일쑤다.

숙소에서 나오며 보니, 호텔 옆의 국수집이 눈에 띈다. 간판도 깔끔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는 윤이 반짝반짝 나는 양은그릇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들도 깨끗하게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맛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청결만은 보장이 될 것 같다.

손바닥만큼 좁은 식당이지만, 환하게 웃는 아주머니들의 모습만 봐도 음식 맛이 짐작된다.

"국수 되나요?"

문도 없이 뻥 뚫린 식당 안으로 들어서며 묻자, 아주머니 한 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 장사는 끝났는데…. 국수가 조금 남았는데 해 드려요?"

아마도 끝물인가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일행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앉자, 아주머니는 한 종류밖에 안 된다며 돼지고기 다리 살을 얹은 국수를 내온다. 국물 냄새가 구수하다.
양푼에 담긴 국수보다 먼저 국물을 마시니, 맛이 아주 그만이다. 마치 진국으로 우려낸 설렁탕 국물 같다. 면도 입에 착착 감긴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모두들 양푼에 코를 박고 국수 맛에 홀려 있다.

한 그릇에 7위안, 값도 싸다.

"내일 몇 시에 열어요? 새벽에 먹으러 와도 돼요?"

마치 우리나라 음식 같은 카이리의 국수에 반해 묻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양푼 가득 담아주는 국수, 국물맛이 끝내준다
▲ 카이리의 국수집 양푼 가득 담아주는 국수, 국물맛이 끝내준다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다음 날 아침에는 호텔에서 주는 뷔페를 먹느라 찾아가지 못했지만, 카이리를 떠나는 마지막 날 새벽에도 우리는 기어코 그 국수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을 정도로 국수는 맛있었다. 중국 여행에서 맛본 최고의 국수였다. 아쉬운 것은 오후 세 시만 되면 국수가 다 팔려버려, 저녁에는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수집을 나오며 바라보니, 가게 이름이 '지아카샤오취(佳凱小吃)'다. '아름다운 카이리의 작은 식당' 쯤 될까? 사람이 여행지를 다시 기억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기도 하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을 떠올려서일 수도 있다. 그 중 중요한 하나가 그곳에서 먹은 음식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카이리라는 구이저우성의 도시를 떠올리면 언제나 제일 먼저 그 국수집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국수가 먹고 싶어서 카이리를 다시 찾을 것 같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그만큼 카이리 작은 식당의 국수는 맛있다.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이유

점심을 먹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시지앙 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로 가기 위해서다. 버스는 20여 명 남짓 탈 수 있는 작은 미니버스다. 차에 타고 한참 기다리는데도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하다. 분명히 자리를 꽉 채운 뒤에야 출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두껍게 틀어 올리고, 붉은 색 큰 꽃 장식을 꽂은 아주머니 한 분이 차에 오른다. 옷차림이 유난해서 슬쩍 말을 붙여본다.

"아주머니, 무슨 민족이세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나를 한번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마지못한 듯 대답한다.

"미야오족(苗族)이야." 
"사진 한 장 찍어도 돼요?"

시지앙 가는 길, 버스에서 만난 묘족 아주머니
▲ 묘족 아주머니 시지앙 가는 길, 버스에서 만난 묘족 아주머니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내가 카메라를 들이밀자 아주머니가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다.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는 얼른 배낭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주머니에게 보여준다.

"사진 한 장 찍어서 드릴게요."

그러자 아주머니 표정이 비로소 환해진다. 여행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고는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면 현지인들은 무척 아쉬워하곤 했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조그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 꼭 갖고 다니곤 했다. 사진을 뽑아 주면 너무나 좋아했다. 평생 사진 한 장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했을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이다.

내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이대자 아주머니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옷매무새와 머리를 다듬고 포즈를 취한다.

먼저 디지털 카메라로 몇 장 찍고 난 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아주머니를 찍는다. 인화지가 카메라에서 나오는 동안, 아주머니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카메라를 들여다본다.

다 나온 인화지를 흔들며, 기다리면 사진이 보일 것이라고 하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차 안이라서 사진은 금방 인화되지 않는다.

"태양을 쬐어야 사진이 빨리 나와요."

내가 차창 밖으로 인화지를 내밀고 햇볕을 쬐이면서 아주머니에게 설명을 한다. '태양을 쬐다'는 말을 내가 "쟈오타이양(照太陽)"이라고 하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셔타이양(射太陽)"

쬔다는 말은 쟈오(照)가 아니라 셔(射)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된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주머니는 사진을 달라고 하더니 들고 차에서 내려 태양을 향해 쳐들고 흔든다. 어서 사진을 보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얼마 후 사진이 인화지 위에 새겨지자 아주머니 입이 환하게 벌어진다. 내게 고맙다며 고개를 까딱인 아주머니가 사진을 들고 옆에 서 있는 버스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차에 탄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한다. 아마 다른 곳으로 가는 지인인가본데,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아주머니 표정이 어린 아이 같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환해진다. 여행은 이런 한 순간의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묘족이 사는 한적한 마을, 시지앙 천호묘채

예상대로 버스는 승객을 다 채운 뒤에야 출발한다. 가는 도중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눈치 챈 기사가 슬며시 제안을 해 온다. 몇 시에 카이리로 돌아올 거냐, 돌아오는 시간이 늦으면 버스가 끊기니까 너희들 시간에 맞춰 내가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늦게까지 천호묘채를 구경하다 보면 늦을 것 같았는데, 말 그대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 감히 청하지는 못했지만 진실로 바라던 바다.

묘족의 낟가리는 가운데에 나무가 있다.
▲ 낟가리 묘족의 낟가리는 가운데에 나무가 있다.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차는 꼬불꼬불 산길을 돌고 돌아 천호묘채로 향한다. 곳곳에 추수가 끝난 한적한 논이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벼 낟가리다. 우리는 볏짚을 원으로 빙 둘러 쌓아올리는데, 이들은 나무를 이용해 쌓아올렸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나무가 꼭 외투를 두텁게 걸쳐 입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낟가리는 볏짚을 빼다 썼는지, 윗부분에만 나뭇잎처럼 볏짚이 걸려 있다. 아래에 있는 볏짚부터 뽑아다 쓰나보다.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한참 지난 뒤에야 마침내 천호묘채에 도착한다. 입장료 받는 곳에도 사람이 거의 없다. 겨울 여행의 고즈넉함을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다.

시지앙 천호묘채(西江千戶苗寨)는 구이저우 성 치엔동난(黔東南) 묘족 동족 자치주(苗族侗族自治州) 레이산(雷山)현 동북쪽의 레이꽁산(雷公山)에 자리 잡고 있는 묘족 마을이다. 카이리에서 36Km 정도 되는 가까운 곳이라 접근이 용이하고, 묘족 전통 양식의 마을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 카이리 여행자는 대부분 이곳에서 소수민족 여행을 시작한다.

시지앙(西江)은 묘족 말 "dlib jangi"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신선들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시(西)는 서씨(西氏)를 뜻하며, 지앙(江)은 '정벌하다(討)'는 뜻과 서로 통하기 때문에, 시지앙은 서씨들이 정벌하러 온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도 있다.

길에서 만난 묘족 여인의 환한 모습
▲ 묘족 여인 길에서 만난 묘족 여인의 환한 모습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묘족은 원래 약 4천 년 전,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에 이르는 넓은 땅에 살았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묘족의 조상은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셋째 아들이다. 치우천황이 황제(黃帝)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죽자, 그의 셋째 아들이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들이 바로 묘족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 개의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세  개의 강을 그들은 혼수(渾水), 청수(淸水), 흑수(黑水)라고 부른다.

치우는 동이(東夷)의 신이다. 반면 황제는 중원의 신이다. 신화에 따르면 동이의 신과 중원의 신이 탁록(涿鹿)에서(혹은 기주 冀州라는 기록도 있다) 맞붙어 일전을 겨루었고, 결국 동이의 신인 치우는 패배해 목이 잘린다. 죽은 치우의 차꼬와 수갑에 묻은 피에서 단풍나무가 자라났다.

신화는 신화적 어법으로 전승되지만, 그 내면에는 은밀한 암호처럼 당시의 현실을 암시하는 음어들이 존재한다. 이 신화 또한 그렇다. 묘족이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받드는 것과, 세 개의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주했다는 것은 그들의 과거와 이동 경로를 동시에 암시한다. 묘족은 치우와 황제의 전투에서 동이의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치우는 동이와 남방부족의 연합세력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치우에게는 81명 혹은 72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도 연합한 부족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중원에서 패하여 남방으로 밀려 이동해야 했을 묘족의 온간 우여곡절이 그들의 신화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숱한 강을 건너고, 온갖 방해 세력과 맞서 싸우며 마침내는 구이저우 변방 지역에 자리 잡아야 했던 묘족은 지금도 여전히 치우를 기억하며, 단풍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묘족의 생김새는 어찌 보면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현재 시지앙 천호묘채에는 모두 1,285가구 5,12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 99.5%가 묘족이라고 한다. 이제는 원주민보다 한족이 더 많은 곳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단일한 소수민족이 주민 대부분인 경우는 극히 드문 편이다.

비탈에 모여있는 묘족의 가옥들
▲ 시지앙천호묘채 비탈에 모여있는 묘족의 가옥들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천호묘채 백수하에서 빨래하는 묘족 여인
▲ 빨래터 천호묘채 백수하에서 빨래하는 묘족 여인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마을로 들어서니 골짜기 아래쪽으로 강이 흐르고, 상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양쪽 산비탈로는 민가들이 처마와 처마를 마주대고 늘어서 있다. 마을 전체가 마치 오밀조밀하게 전통 가옥으로 산비탈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산 위로는 묘족의 고단한 노동이 엿보이는 계단식 논이다.

시지앙 천호묘채는 그저 스적스적 걸어 다니며 골목 곳곳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산비탈로 형성된 민간 가옥들의 골목을 들어가 보면, 마치 어린 시절 우리가 도시로 이동해 살았던 공간 속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 

먼저 상가가 늘어서있는 곳을 휘둘러 본다. 상가라고는 해도 주로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탓인지, 상업적인 면보다는 시골마을 장터 같은 분위기다. 지금이 비수기인 겨울이라서 더 그런 모양이다. 느긋하게 말을 끌고 가는 아저씨 곁으로 묘족 전통 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가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구경한다.

석탄을 가득 실은 낡은 트럭이 골목을 막고 있다. 그래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그들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일까? 그저 웃으며 비켜가거나, 아니면 석탄 하차 작업 하는 것을 구경할 뿐이다.
화려한 무늬를 수놓은 가방 같은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있는 사내도 있다. 이곳에서는 남자들이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가 보다. 내가 덮개를 열어봐도 되느냐고 묻자 그가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포대기 속에는 귀여운 사내아이가 콜콜 잠자고 있다.

길 귀퉁이에 앉아 구두를 수선하는 사람, 당나귀에 짐을 실어 나르는 사람, 건초 더미를 가득 실은 수레를 미는 아저씨에 마른 나무를 메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 길의 풍경은 우리네 과거의 한 장면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것 같다. 그래서 돌아다니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 진다. 과거는 그리움이면서 동시에 안식처 같은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나이 들면 자꾸 과거를 돌아보며 산다는데, 그것은 살아온 날들이 모두 그리움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시지앙 천호묘채에서는 그 그리움의 한 갈피 속으로 돌아간 자신을 만날 수 있다.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 아이가 길가 계단에 앉아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아이는 활짝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준다. 내게만 그러는가 했더니, 누구든지 카메라만 들이대면 아이는 자동으로 웃으며 손을 들어올린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손을 들어주던 아이
▲ 천호묘채의 모델 카메라만 들이대면 손을 들어주던 아이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꼬마 모델이군. 천호묘채의 모델이야."

내가 아이를 보며 중얼거리자,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다시 한 번 생끗 웃어준다. 내 마음조차 환하게 밝아진다. 마을 가운데로 개울물이 흐른다. 수량이 제법이다. 저 물이 빠이수이허(白水河)다. 골짜기를 흐르는 개울물의 양쪽 비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천호묘채다.

개울물을 따라 걸어본다. 외지인 관광객 하나 없이 한적하다. 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맑다. 물 위로 돌을 쌓아놓고, 그 위에 나무를 얹은 다리가 있다. 다리 위에서 묘족 아주머니 한분이 빨래를 하고 있다. 그 아주머니의 빨래 바구니는 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걷다보니 개울가로 넓은 광장이 나온다. 성수기에는 여기에서 묘족 전통 공연이 있다는데, 요즘은 비수기인 겨울이라 공연을 하지 않는단다. 공연을 한다면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는 얘긴데, 공연을 보지 못한 아쉬움보다 이렇게 한적한 천호묘채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지금이 차라리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본다. 골목은 미로처럼 얽혀있다. 한 아주머니가 야채를 메고 올라오자 골목이 꽉 찬다. 부서진 기와와 낡은 나무판자가 세월의 더께를 켜켜이 묻힌 채  집이 자리 잡고 있다. 더 올라가니, 마당 가득 배추를 심어놓은 집도 있다. 푸르디푸른 배춧잎이 더 싱싱해 보이는 것은, 지금이 한겨울이기 때문이리라.

좀 더 올라가자 작은 공터가 나온다. 공터 가득 돌로 조각을 해 놓았다. 돌을 촘촘하게 심어 문양을 만든 것인데, 가운데에 커다란 해가 선명하다. 묘족의 전통 문양이다. 묘족 설화에 나오는 해의 문양이다.

돌로 만든 묘족의 문양. 가운데에 태양이 돋보인다.
▲ 묘족의 태양 문양 돌로 만든 묘족의 문양. 가운데에 태양이 돋보인다.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아주 오래 전, 묘족이 살던 곳에는 해가 없었다. 달도 없었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암흑 천지였고, 일 년 내내 추위만 가득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양작이라는 이가 돌판 아홉 개를 쪼아 해 아홉 개를 만들고, 돌판 여덟 개를 쪼아 달 여덟 개를 만들었다. 양작은 그것들을 하늘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러자 낮에는 하늘에 아홉 개의 해가 떴고, 밤에는 여덟 개의 달이 떴다. 세상은 따뜻해졌고, 환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해와 달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너무 밝았다.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견딜 수 없었고, 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풀과 나무들도 모두 말라 죽고 말았다. 세상에는 오직 한 그루의 나무만이 살아남았다.

이것을 본 양작은 그 나무를 베어 활을 만들었다. 그는 그 활로 여덟 개의 해를 쏘아 떨어트렸다. 일곱 개의 달도 쏘아 떨어트렸다. 그러자 하나씩 남은 해와 달은 무서워서 먹장구름 뒤에 숨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세상은 캄캄하게 변하고 말았다.

양작은 해와 달을 달래 구름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얼룩암소를 하늘로 보냈다. 얼룩암소는 하늘로 올라가 뿔을 곧추 세우고 세 번 길게 울었다.  울음소리를 듣고 해가 얼룩암소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소리가 아주 거칠고 머리에 칼 두 자를 꽂고 있는 걸 보니 나쁜 놈 같다. 얼른 도망가야겠다."
해와 달은 구름 속으로 꽁꽁 숨고 말았다.

얼룩암소가 돌아오지 않자 양작은 비룡을 하늘로 보냈다. 비룡은 하늘에 올라가 고개를 젖히고 꼬리를 흔들며 발굽을 구르고 입을 쫙 벌려 울부짖었다. 그것을 본 해와 달은 깜짝 놀라 몸을 더 숨기고 말았다.

비룡도 소식이 없자 양작은 수탉을 불렀다.
"네가 성격도 부드럽고 점잖으니 가서 해와 달을 모셔오너라."
수탉은 날개를 푸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라가 오색 구름 위에 앉아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질렀다.
"꼬끼오, 꼬끼오."
수탉의 곱고 청아한 목소리를 들은 해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참 고운 목소리네. 저렇게 곱게 부르는데 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수탉이 세 번 홰를 치고 나자 해는 산꼭대기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너도 어서 나와. 안심해도 되겠어."
해가 달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달은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내가 먼저 앞으로 갈 테니 잘 보고 괜찮으면 너도 나와."

해는 그렇게 말하고 점점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달은 하루 종일 해가 무사한지 살펴본 뒤에야 산꼭대기로 나와 해를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해와 달은 자신들을 불러내준 수탉이 고마워 금으로 만든 빗을 수탉에게 선물했다. 그 금 빗을 소중하게 여긴 수탉은 늘 머리 위에 꽂고 다녔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가 지나간 자리를 달이 따라 가게 되었고, 수탉은 금 빗을 머리에 꽂고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묘족의 하늘에는 해와 달이 늘 밝게 비추게 되었다.

묘족의 설화는 그렇게 해와 달이 생기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묘족 설화에는 유난히 해와 달이 많은 편이다. 우리의 주몽 설화에서도 유화부인은 햇빛을 쬐고 주몽을 잉태한다. 유화부인의 남편은 해모수이다. 이때의 해는 신성성을 상징한다.

신화연구자인 조현설 교수의 말에 따르면 해가 여럿인 것은 무질서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무질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활을 쏘는 행위는 신화에서 흔히 발견되는데, 이는 수렵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견해에 따른다면 묘족의 이 설화 역시 해와 달이 다수인 무질서의 상태를 양작이라는 묘족의 영웅이 나타나 활로 극복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설화에서는 영웅도 무질서의 상태를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한다. 양작은 하나씩의 해와 달만 남기고 활로 쏘아 없애버렸지만, 남은 하나씩의 해와 달은 양작의 생각과 달리 숨어 나타나지 않는다. 숨은 해와 달을 나오게 한 것은 수탉이다. 인간이 아닌 수탉이 해와 달을 불러내올 수 있었다는 묘족의 의식 속에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자연물이 결코 우열을 가리는 존재가 아니라 평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 아닐까?

또한 무섭게 해와 달을 다그친 얼룩암소와 비룡보다 점잖은 수탉이 해와 달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것은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묘족의 성품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지나친 억측일까? 특히 해에 대한 이야기가 묘족 신화에 많은 것은, 지형적으로 늘 비와 안개에 쌓여 햇빛을 보기 힘든 구이저우의 자연환경에서 살아야했던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 아닐까?

나는 시장 천호묘채 산비탈에서 해를 새긴 돌 문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어느새  어둑어둑 날이 저물고 있다.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묘족 전통 식당에서 햇빛처럼 바알간 화롯불을 보면서도, 해처럼 밝은 얼굴로 술을 따라 건네주던 묘족 아낙네들의 전통적인 손님 맞이 풍속을 보면서도, 그리고 카이리로 돌아오는 캄캄한 길에서 때때로 나타나는 마을의 불빛들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묘족의 해에 대해 생각했다.

오리 몇 마리 물위에 떠 있다. 한가로운 천호묘채 풍경
▲ 백수하에 놓인 다리 오리 몇 마리 물위에 떠 있다. 한가로운 천호묘채 풍경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늘 마음속에 해에 대한 그리움 하나쯤 품고 살아가는 것 아닐까? 영원히 맑은 날을 만나지 못할지라도, 그리움이야말로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속의 해 같은 그리움은 무엇일까? 한때는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내 힘이 중요한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청춘의 한 시절을 거기에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해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있다. 어쩌면 나는 그때 양작이나 수탉이 되기를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해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지우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살아보니 삶이란 의미 쪽보다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쪽에 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일 테고,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기 때문이리라.

묘족 마을에서 돌아온 오늘 밤은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그리운 해에 대한 꿈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카이리 시내로 접어들면서 내 머릿속에 양작의 해처럼 떠올랐다.       
 
한가하고 편안하다. 집도 사람도, 개들까지 어울려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천호묘채
▲ 천호묘채 풍경 한가하고 편안하다. 집도 사람도, 개들까지 어울려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천호묘채
ⓒ 최성수

관련사진보기



태그:#시지앙천호묘채, #서강천호묘채, #묘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