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굳게 잠긴 정문에서 바라본 용정중학교 운동장.
 굳게 잠긴 정문에서 바라본 용정중학교 운동장.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항일 유적과 함께 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14일)은 오전에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와 '대종교 3대종사 묘역'을 참배하고, 용정으로 이동하여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를 방문하였다.

한 번 다녀간 곳이어서 친숙하게 느껴졌다. 겨울방학 기간이어서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에 소복하게 쌓인 눈이 동심을 자극했다. 전시관 관람도 좋지만,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눈 쌓인 벤치에 깜찍하게 써놓은 낙서. 글에서 귀여움이 묻어났습니다.
 눈 쌓인 벤치에 깜찍하게 써놓은 낙서. 글에서 귀여움이 묻어났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어른보다 학생들이 더 즐거워했다. 처음 방문하는 조선족 중학교여서 호기심이 동하는지 신기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손가락질하면서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항일시인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새겨진 시비를 보며 감탄사를 터뜨리기도 했다.

다희, 다영이, 지혜는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다 오더니 은빛으로 반짝이는 눈 위에 낙서를 해댔다. 지혜는 윤동주 시비 앞 벤치에 "열심히 공부해요~",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써놓고 자기 이름과 하드 마크까지 집어넣고 빙긋이 웃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지혜는 겸연쩍은지 얼굴을 붉혔다. 중국 조선족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구경하고 싶다고 말하는 지혜는 용정중학교 학생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

용정중학교 교가. 첫머리는 ‘해란강’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용정중학교 교가. 첫머리는 ‘해란강’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민족교육의 발상지 용정중학교는 1921년 7월 11일 대성중학교로 개교했고, 일제 수난기를 거쳐 1946년 9월 16일 대성중학교, 은진중학교, 광명중학교, 명신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여자중학교 등 6개 학교가 연합해서 조선족만 다니는 '길림성립 용정중학교'가 되었다.

건물은 신관과 구관으로 나눠 신관은 용정중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구관 2층에는 대성중학교 역사와 용정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족교육 운동, 독립운동 관련 사진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관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 민족이 처음 용정에 이주하여 발견했다는 용두레 우물,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정순만, 여준 등 민족 운동가들이 사재를 털어 1906년 8월 서전평야 이름을 따 설립했다는 최초 교육기관 '서전서숙'(瑞甸書熟) 기념비 등은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갈피가 촌스러운 방명록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겨울임에도 많은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장학금을 내놓고 간 사람도 여럿 있었다. 방명록에 서명은 못 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교문 밖에서는 인솔자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해댔다.

비암산(琵岩山) 일송정(一松亭) 가는 길

용문교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를 관통하는 해란강. 선구자 노래에도 나오지요.
 용문교에서 바라본 용정 시내를 관통하는 해란강. 선구자 노래에도 나오지요.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버스는 비암산 일송정으로 방향을 잡았다. 용문교를 지나는데 시계는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둘러볼 유적지는 일송정, 명동촌, 주덕해 옛집, 15만엔 탈취사건 기념비, 용정역 등이지만, 10분~15분 거리를 두고 있어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용정은 19세기 후반부터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이 청국의 견제와 일제에 저항하며 삶의 터전을 마련한 도시이며, 인기드라마 토지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눈에 익은 건축물과 도로는 아내와 함께 왔던 여섯 달 전 기억들을 살아나게 했다.

시내를 벗어나 10분도 채 달리지 않았는데, 민족의 한(恨)이 서린 일송정이 가물가물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니까 옆에 서 있는 소나무도 보였다. 일송정은 가까운 곳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감상할 때가 감격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일송정 입구에 있는 ‘용정찬가’비(좌측 위), ‘비암산 진달래’ 시비(좌측 아래) 일송정 비(우측) 용정찬가와 비암산 진달래 시가 새겨진 바위에는 원래 ‘선구자’와 ‘고향의 봄’ 가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선구자 노래 가사는 일송정 비 아래 기단에 자그맣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일송정 입구에 있는 ‘용정찬가’비(좌측 위), ‘비암산 진달래’ 시비(좌측 아래) 일송정 비(우측) 용정찬가와 비암산 진달래 시가 새겨진 바위에는 원래 ‘선구자’와 ‘고향의 봄’ 가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선구자 노래 가사는 일송정 비 아래 기단에 자그맣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버스에서 내리니 눈이 쌓여 있었다. 언덕길을 걸어가는데 '비암산 진달래' 노랫말이 적힌 큰 바위와 일송정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20여 개 계단 위에 서 있는 우람한 사각의 비석은 일송정을 지키는 보초병 같았다.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얀 김을 내 품으며 눈 쌓인 산길을 걷다가 오르막길 소나무 숲에서 화살표와 용주사(龙珠寺)가 적힌 안내판을 발견했다. 나무판자에 붉은 글씨로 써놓은 안내판도 세월의 나이를 거스르지 못하고 잔뜩 퇴색되어 있었다.

강경애 작가 기념비. 강경애는 평양 숭의여학교 시절 양주동 박사와 연애가 무르익을 무렵 동맹휴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서울로 내려가 동덕여고 3학년에 편입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거기에서 끝났다고 합니다.
 강경애 작가 기념비. 강경애는 평양 숭의여학교 시절 양주동 박사와 연애가 무르익을 무렵 동맹휴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서울로 내려가 동덕여고 3학년에 편입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거기에서 끝났다고 합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눈 밟는 '뽀드득' 소리가 재미나게 들리는 산길을 올라 중턱에 다다르니 돌계단 위에 우뚝 선 강경애 문학비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돌비석이지만,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산속에 있으니 외로울 것 같았다. 순간 박영희 시인이 앞으로 나왔다.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강경애가 <북간도>를 썼던 안수길 선생과 '북향회' 동인지를 만들었던 곳이 용정입니다. 또 평양 숭의여학교 시절 한글학자 양주동 박사와 연애 스캔들이 있었던 작가이기도 하지요.

문학비에는 "인간사회는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므로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발전한다"는 글귀가 새겨 있는데요. 저는 항일투쟁을 직접적으로 작품화할 수 없었던 1930년대에 노동자와 농민을 전면에 내세우며 일제에 항의하는 글을 신문에, 그것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그의 용기를 높이 삽니다."

박 시인은 자신의 책 <만주를 가다>에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딱 두 컷 들어갔는데 하나가 강경애 문학비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산문에 가까운 단편들을 통해 간도의 봄을 잊을 수 없다며 1930년대 용정 모습을 신문에 기록했던 강경애에게 매력을 무척이나 느꼈던 모양이었다.

독립군이 결사항전 의지 다졌던 일송정

눈 내리는 겨울밤 이불 속에서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한 박 시인의 얘기에 정신을 팔다 보니 '용정팔경'의 하나인 비암산 일송정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항일 선구자들의 상징이자 독립군들이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던 장소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옆 봉우리에서 바라본 비암산 일송정. 오른편 나무가 2003년 당시 한국 통일부가 백두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소나무입니다.
 옆 봉우리에서 바라본 비암산 일송정. 오른편 나무가 2003년 당시 한국 통일부가 백두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소나무입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일송정은 여름과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옆의 남학생이 해란강이 어디냐고 묻기에 알려주었더니 "저게 해란강이에요?"라며 표정이 변했다.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귀 아프도록 듣던 유명한 강이어서 강폭이 넓고 강물도 양양하게 흐르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일송정은 원래 정자를 닮은 소나무가 비암산 정상에서 낙랑장송으로 그 위용과 자태를 떨쳐서 그렇게 불렀는데, 일본이 껍질을 벗기고 속에 고춧가루를 넣어 고사시켰단다. 독립 운동가들이 종종 이곳에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저지른 짓이라고. 지금 소나무는 1991년 3월에 심은 것이고, 그해 9월에 정자를 준공했다 한다.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과 세전벌. 중국 만주는 탄광이 많아서인지 어디를 가도 흙이 검었습니다.
 일송정에서 내려다본 해란강과 세전벌. 중국 만주는 탄광이 많아서인지 어디를 가도 흙이 검었습니다.
ⓒ 조종안

관련사진보기



일송정 난간에서 보는 들녘은 여름과 달리 거칠고 쓸쓸했다. 오른쪽으로는 용정시와 세전벌이, 왼편으로는 해란강과 평강벌이 합죽선처럼 펼쳐졌다. 옅은 안갯속으로 말려들어 갈 듯 끝없이 펼쳐지는 겨울 들녘은 기분이 우울해질 정도로 칙칙했다.

박 시인은 "1세기 전만 해도 청기와를 얹은 팔각 정자처럼 생긴 소나무가 있었는데 사라져버려 안타깝다"며 "예전 사진이라도 보고 싶어 수소문해보았으나 일본군이 베어냈다는 입소문만 들려옵디다"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한국의 많은 사람이 보수한 시기와 관계없이 일송정을 찾는다. 선조들이 개척해놓은 옥토를 바라보며 말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독립군의 얼과 채취가 묻어나는 선구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시계는 오후 2시 3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날도 춥지만, 저항시인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선구자 노래도 합창하지 못하고 비암산 일송정에서 내려와 버스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용정중학교, #일송정, #해란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