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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이라는 곳에서 <교과서를 믿지 마라(아이들과 교사를 바보로 만드는 초등 교과서의 비밀)>(초등교육과정연구모임 저, 바다출판사 펴냄)라는 책을 냈다.

 

책은 제법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몇 번의 기사화로 알려졌고 특히 초등학교 1~2학년을 자녀로 둔 학부모들은 책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함께 모여 이야기도 나누는 듯하다. 초등학교 학년별 교과서를 교사들이 분석해서 내놓은 책은 처음인지라 교사인 나도 한 번 읽어보았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인 나로서는 '누덕 누덕 기운 듯한 5, 6학년 교과서'라는 말에 가장 공감이 갔다. 교육과정 개정은 한 해에 두 개 학년씩 점차적으로 도입이 되는데 2011년에는 5학년과 6학년 교과서가 새롭게 도입되었다.

 

특히 사회와 과학 과목 교과서 중 절반에 가까운 내용이 바뀌었는데 쉽게 생각하면 교과서가 바뀐 게 뭐 대수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새로 바뀐 6학년 1학기 과학 교과서 중 단원 2개는 학생들이 이미 배운 내용이라서 실제로는 수업을 하지 않는 내용이다. 대신 교과서가 바뀌면서 내용이 빠져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게 된 내용은 따로 교사들이 교재를 만들어 가르쳐야 한다. 결국 여기저기 짜깁기한 프린트물로 학생들은 배우게 된다. '교과서를 기웠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사실적 표현이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속이 시원하게 교과서를 파헤쳐 놓았다. 이제까지 교사들끼리 모여서 욕하던 교과서를 교사가 아닌 사람들도 보기 쉽게 조목조목 정리했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교사라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갖고 어떻게 연구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하는 책이라 교사인 나로서는 고맙기도 하다.

 

<교과서를 믿지마라>, 학원 선생님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책

 

교사가 되기 전 난 고3 수능시험 직후부터 과외를 했다. 많을 때는 동시에 5~6개를 한 적도 있었고 운좋게 과외를 계속 구할 수 있어 말 그대로 다경력 과외 교사 생활을 한동안 했다. 많은 과외 학생들 중 나를 가장 애먹였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애를 먹은 건 분수단원이었는데 그 학생은 문제에 대해 늘 정답을 써냈지만 개념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약분을 하면 4/16이나 2/8이나 둘 다 1/4이지만 초등수학에서는 다르다. 4/16은 점을 네 개씩 묶은 것이지만 2/8은 두 개씩 묶어 센 것이다. 이런 개념을 '묶어세기'라고 한다. 묶어세기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분수를 배울 때 그리고 이후에 비례식을 배울 때에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하여 활용할 수 있다.
 
곱셈 역시 구구단을 외워 곱셈을 하는 학생과 덧셈의 동수누가를 이용해 곱셈을 배운 학생은 개념의 이해 수준과 활용에 있어 차이가 난다. 주황색이 빨강과 노랑을 섞은 색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늘 주황색 물감을 사서 써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 학생은 묶어세기 개념을 익히지 못하고 이전의 과외선생님에게 분수계산과 약분을 바로 배워버린 상태였다. 그림으로 원리를 물어보는 문제는 늘 틀릴 수밖에 없었다. 묶어세기를 설명하고 개념을 바로잡으려고 꼬박 두 달을 애썼지만 이미 머리에 자리잡힌 생각을 고치기는 쉽지 않았다. 학생 입장에서는 계산문제를 계속 맞추는데 잘못 풀고 있다고 잔소리하는 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사가 된 후에 이런 경우를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교육과정 단계에 대한 이해 없이 바로 상위개념을 학원에서 배우고 온 학생들은 이미 흥미가 떨어져 수업을 듣지 않았고 개념도 수정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며 학원 선생님들께서 읽어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공교육 제도 안에서 밥벌이를 하는 내가 학원 선생님들을 입에 올리는 게 주제넘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무책임하기도 하지만, 내가 학원에서 일해본 경험을 떠올려보면 내가 가르치는 학년, 내용 외에 전반적인 교육과정을 흟어볼 기회가 없었다. 가르치는 학생이 내년에 어떤 내용을 배우는지, 지금 배우는 내용 중 어느 부분이 다음에 공부할 부분의 전단계인지를 모르고 수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만약 학원 선생님들이,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초등학교 전 학년의 교육과정을 단적으로라도 분석해놓은 이 책을 읽으신다면 그런 부분들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교과서의 '절대적 위엄'이 문제... 다양한 변주 가능해야

 

이 책에 대해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다. 이 책에서는 교과서가 의미없이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되풀이한다고 비판한다. 나 역시 그 부분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만약 교과서가 의미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교사는 그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에서는 빠뜨린 듯하다.

 

교과서는 수업에 쓰이는 자료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교사는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수업 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의 수업을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수업연구다. 교과서 지문이 너무 길어 수업에 흥미가 떨어진다면 그 지문을 편집하고, 교과서에 질문이 너무 많고 어려운 용어가 많다면 질문을 줄이고 쉬운 말로 풀이하여 수업해야 한다. 교과서 때문에 수업이 엉망이 된다고 비판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교사를 교과서대로 수업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취도평가와 교과서에 나오는 것은 다 배워야 한다는 오해 때문에 교과서는 학교교육에서 '절대적'이다. 하지만 수업이 엉망이 되고 있는 것이 다 교과서 때문이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이 책의 후반부에서 지적하고 있듯 현재 교과서가 대충대충 제대로 검증되지 않고 만들어지는 과정도 문제이고 제작진이 제대로 연구할 수 없는 환경에서 교과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것, 그리고 초등 교육과정 기준 자체가 양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어려운 것은 분명 문제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과서의 절대적 위엄'이다. 모든 지역, 모든 학생에게 적합한 교과서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이 동일한 내용을 배우고 시험지에 동일한 답을 써낼 수 있도록 똑같은 교과서로 공부하는 것은 교육이라기 보다 복제에 가깝다. 학교마다 교사마다 교과서의 다양한 변주, 여러 가지 교육자료를 활용한 수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개별화 교육이고 수월화 교육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교과서를 아무리 잘 만들더라도 "교과서를 믿지 마라!"이지 않을까.

 

<교과서를 믿지 마라> 중에서

· 걸음마 떼자 달리라고 하는 1학년 교과서: 쓰기 일색인 국어 교과서는 한글을 막 익힌 아이들에게 자기 소개서를 쓰라고 하고, 수학 교과서에서는 뺄셈, 덧셈의 재미를 알기도 전에 뺄셈식을 덧셈식으로 바꾸라며 아이들을 울린다.

 

· 아이들의 자신감을 갉아먹는 2학년 교과서: 국어 교과서 속의 지나치게 많은 질문과 쓰기가 교과서를 지루하고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대는 수학 문제는 부모도 풀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다.

 

· 사교육의 유혹을 부추기는 3학년 교과서: 지나치게 많은 내용이 실린 국어 교과서는 깊이 있는 수업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며, 붙임딱지는 아이들 생각의 싹을 자르고 있다.

 

· 열등생을 만들어 내는 4학년 교과서: '영역, 좌표, 축척' 등 어려운 학습 용어가 가득한 사회 교과서와 후다닥 실험을 끝내야 하는 과학 교과서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앗아 간다.

 

· 누덕누덕 기운 듯한 5, 6학년 교과서: 올해 새로 바뀐 5, 6학년 교과서는 사상 최악의 누더기 교과서라는 말을 듣고 있다. 체계 없이 뒤섞인 교과과정으로 역사 교과 등은 심각한 학습 결손이 우려된다.


태그:#교과서, #초등교육,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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