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용성(金容誠) 선생님께서 어제 다시는 오지 못할 길을 떠나셨다. 1940년 11월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일흔 둘이시다. 아무리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十 古來稀)라 하여 70년을 산다는 것이 드문 일이라 했지만, 아직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는 젊음이셨는데 그렇게 훌쩍 떠나셨다.
일본 고베(神戶)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현재의 철도고와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마치셨고, 인하대학교와 경희대학교 강사를 거쳐 <한국일보> 기자를 지내신 뒤 줄곧 전업작가로 활동하셨다. 그러다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 2006년 2월 정년퇴임하셨으며 이후 <황순원문학촌> 촌장으로 일하셨다.
1961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잃은 자와 찾은 자>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리빠똥 장군>(1971), <도둑일기>(1983), <이민>(1998), <기억의 가면>(2005) 등 많은 작품을 남기셨고 현대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김동리문학상, 요산문학상, 경희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두루 받으셨다.
특히 '군대 조직 내의 비인간적인 폭력 구조를 통해 현대사회의 메커니즘을 비판'했다는 평가를 받는 <리빠똥 장군>은 문학을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읽은, 어쩌면 아주 또렷하게 영감을 준 작품이다.
정년퇴임 후 아직도 써야할 것이 많다던 선생. 그렇기에 마지막 가는 길이 나를 더 안타깝게 했다. 인하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임하시고 맞은 인생의 제3부. 선생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 소나기마을>의 촌장으로 일하시며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계셨다. 그리고 감기 기운에 찾았다는 병원에서 내린 암이란 진단. 당신의 병의 상태를 알고는 입원수술을 거부하고 댁에 칩거하셨단다.
선생을 뵌 어느 소설가의 전언에 따르면 암투병으로 많이 수척해지셨단다. 그런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을까. 전화와 병문안을 거절하시고 온전히 홀로 지내신 두 달여.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조용히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런 소식을 들은 것이 바로 지난 주 있었던 한국작가교수회의 모임에서였다. 그러나 '한 번 찾아뵈야지…',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신다는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안타까운 마음만 더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였지만 가까이에서 뵐 수 있었던 것은 <한국작가교수회>가 결성되고 선생이 제2대 회장을 내가 총무이사를 맡으면서였다. 선생을 모시며 일했던 총무이사로서의 일, 선생은 참 많은 배려를 해주셨고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여러 모로 힘을 써주셨다.
그렇게 공적으로는 총무로서 회장을 모셨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차례 술자리를 같이 하며 그 분의 성품을 접할 수 있었기에, 게다가 그분의 작품을 읽으며 소설쓰기를 꿈꿨기에 선생의 죽음이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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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4월 있었던 작가교수회의 문학기행에서 2010년 4월 있었던 작가교수회의 문학기행에서
(뒷줄 좌측부터, 채희윤, 김용만, 한용환, 김용성, 필자, 홍성암, 유금호, 정소성, 앞줄 좌로부터 이재홍, 서용좌, 조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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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으로 인한 육체의 피폐, 그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으셨는지도 모른다. 그저 평소 왕성한 활동을 하던 모습으로 기억해 달라는 것이 아닐까. 공주와 같은 부끄러운 마음…… 선생이 지니신, 평소 알지 못했던 선생의 새로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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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교수회의 문학기행에서 김용성 선생과 필자 작가교수회의 문학기행에서 김용성 선생과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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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선생님.
작년 4월에 뵈었던 건강하고 활기찬, 넉넉한 웃음으로만 기억하겠습니다.
오늘, 영안실에서나마 선생과 마지막 소주 한 잔 해야겠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 먼저 올렸습니다.
http://lby56.blog.me/150107692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