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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출을 했다. 대학교 2학년(91년) 겨울방학 때 일이다. 언니 오빠도 다 결혼하고 부모님과 나 셋만 사는 집에서 훌훌 짐을 싸들고 나왔다. 사춘기 때도 안 해본 가출을 성인이 되어서 한 이유는 뭐냐고? 우습게도 성적표 때문이다. 곧 배달될 성적표를 아빠가 보면 맞아 죽을 거 같았다.

고등학생도 아닌 대학생이 설마 성적 때문에 맞아 죽겠냐고? 성적도 성적 나름이지. 창피하게도 2학년 2학기 내 성적은 '올 F' 였다. 사실 '올 F'는 한 학기 학비를 다 날려버리는 성적이다. 왜 그런 성적이 나왔냐 하면 일단 수업에 거의 안 들어갔기 때문이다. 학생운동도 해야 했고 동아리에서 무슨 연극을 한다고 해서 그 연극 연습하느라 수업에 몇 번 빠졌더니 영영 수업에 들어가기 뻘쭘해졌다. 그리고 내가 공대생이라 학사관리가 다른 단대보다 빡빡해서 학점받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아빠 팔순 생신에 맞춰 그린 그림
아빠 팔순 생신에 맞춰 그린 그림 ⓒ 강정민

그래서 성적표가 배달되기 전에 꼭 가출을 하리라 계획했다. 그런데 아빠 환갑잔치가 1월초에 떡하니 걸려있네. 잔치 사진에까지 가출한 증거를 남기면 두고 두고 욕 먹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출은 잔치 다음 날 하기로 정했다. 계획했던 날이 되자 주저없이 집을 나섰다. 자취하는 친구집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 매일 출근했다. 수업은 안 들어갔지만 난 학생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한 마디 말도 없이 가출한 뒤 집에 '올 F' 성적표가 배달되었단다. 그래서 부모님은 하늘이 '노랗게' 될 정도로 놀라셨단다. 아빠는 어쩌다 그런 성적이 나왔는지 궁금해서 학교 과사무실로 찾아와서 묻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돌아온 답변은 "수업에 안 들어왔다"였다. 얼마나 망신스러우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내가 참 많이 불효했다.

가출했다, 성적때문에... 그것도 올 F

엄마도 날 찾으러 학교에 몇 번인가 오셨다. 친구가 우리 엄마가 왔다고 알려주면 난 숨어있었다. 동아리 방으로 날 찾으러 왔다가 끝내 못 찾고 도서관 앞 벤치에 앉은 엄마는 혹시나 내가 어디선가 '톡' 튀어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셨다. 난 숨어서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왜소한 엄마는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다.

엄마는 그날 무슨 기운으로 집에 돌아가셨을까? 엄마는 또 내 중학교 때 친구네 집을 찾으려고 보광동을 돌아다니시기도 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빠가 엄마에게 싫은 소리 좀 하셨을 거 같다. "집구석에서 당신이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아이들이 하나 같이 학생운동 한다고 부모 속을 썩여?" 엄마는 아무 말도 못했겠지.

몇 개월이 지나고 오빠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엄마가 오빠에게 내가 가출한 것도 다 학생운동 했던 오빠를 보고 배운 것이니 책임지라고 했던 모양이다.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오빠는 엄마와 달리 나를 손쉽게 찾았다. 나를 만난 오빠는 다짜고짜 엄마에게 전화해서 나를 바꿔주었다.

"정민아~"

수화기 속에서 엄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이 메인다는 게 이런 건지 난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정민아, 집에 들어 와."
"(꺼이 꺼이 울며) 네."

한 마디 대답만 겨우 겨우 했다. 난 그렇게 집에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 간 나는 학교에 갈 이유가 없었다. 휴학을 한 상황이었고. 부모님께 죄송해서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교대신 다닌 아빠 회사, 모르고 산 시간들

 영화 <애자>의 한 장면.
영화 <애자>의 한 장면. ⓒ 시리우스 픽쳐스

그때 아빠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있는 농협 매장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하셨다. 아빠가 파는 물건은 화장품이었다. 기사 아저씨와 함께 봉고차에 화장품을 실고 농협 매장에 물건을 팔러 다니가다 저녁이 되면 봉고차에 있던 물건을 우리집 거실에 다 내려 놓았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는 차를 끌고 댁으로 가셨다.

아빠가 오시면 우리 식구는 저녁을 먹고 그 많은 종류의 화장품을 일일이 다 꺼내서 재고조사를 하였다. 아빠는 눈이 침침하면서도 눈에 침을 발라가며 깨알 같은 글씨로 재고조사를 하셨다. 그리고는 판 물건이랑 또 재고 수량을 맞추고 내일 창고에서 꺼낼 물건 품목도 정리했다. 참 지겨웠다. 항상 오전 0시가 다 되어야 재고조사가 끝났다.

때마침 아빠 사무실에 경리 일을 해 주던 분이 일을 그만 두었다. 집에서 노는 내가 나가서 일을 하게 됐다. 사무실에서 본 아빠는 내가 집에서 보았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처음으로 아빠의 애환을 보았다.

내가 사무실에 나간 지 몇 달 뒤, 아빠는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앓아 누우셨다. 체격 좋은 아빠는 살이 빠지고 흰수염이 까칠한 얼굴을 덮었다. 환갑을 넘긴 아빠는 한 달을 그렇게 누워 계셨다.

나는 아빠를 대신해서 봉고차를 타고 기사 아저씨와 물건을 팔러 돌아다녔다. 겨울 어느 날, 아저씨와 나는 김포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씩 오던 눈이 갑자기 많아졌다. 어느 부대 앞을 통과하는데 군인들이 나와서 눈을 쓸었다. 김포로 들어가는 차들, 나오는 차들 모두 눈 때문에 속도가 점점 늦어졌다. 기사 아저씨와 나는 불안해졌다. 지금 겨우 김포에 들어간다 쳐도 나올 것이 걱정이 되었다. 기사 아저씨와 나는 김포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 나오기로 결정했다.

서울로 돌아오려면 유턴을 해야 하는데, 꼬리에 꼬리를 문 차들 때문에 유턴도 하지 못하고 계속 김포로 들어 가고 있었다. 겨우 기회가 생겨서 유턴을 하려는데 도중에 차가 눈에 미끄러져서 길 아래로 차가 밀렸다. 아저씨가 겨우 브레이크를 잡아 밀리던 차가 간신히 멈췄다. 아찔했다. 정말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겨우 겨우 차를 길 위에 올렸다. 차가 정상적으로 서울을 향해 달리니 지옥을 빠져 나온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런데 반대편 차로에 김포로 들어가는 수많은 트럭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차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 분들은 위험한데 김포로 왜 들어가지? 무엇이 저분들의 발길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날 난 그분들의 생활의 무게를 느꼈다.

아빠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아빠와 같이 사무실을 쓰고 있는 업체에 다니는 내 또래의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그곳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었다. 사귀는 남자친구 이야기 헤어진 애인 이야기 재수 없는 상사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살았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또 흥미로웠다.

하루는 한 친구 생일이라 신림동으로 술을 먹으러 갔다. 주점에서 친구들의 이러 저러한 가정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날 집에 돌아오는데 등록금만 간신히 내 주시고 용돈을 잘 안 주셔서 내 불만의 대상이었던 아빠가 많이 고마웠다.

평탄한 삶을 살게 해 준 아빠가 너무 고마워서 술 취한 나는 주무시려고 누워있는 아빠 손을 잡고 "아빠, 고마워요. 사랑해요" 말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내 눈물의 의미를 알았을까? 아무 말도 묻지도 않고 내 손을 가만히 잡아 주셨다. 일년 동안 휴학하고 가출하고 집에 돌아와 아빠 일을 도우면서 난 많은 것을 느꼈다.

미안해 엄마, 별처럼 많은 상처들 줘서 

2009년에 나는 노조 활동으로 구속된 후배 면회를 갔다. 집에서 한 시간 걸려 구치소에 도착해 또 한 시간을 기다려 면회를 했다. 그런데 그 면회시간이 달랑 10분이었다. 10분 면회를 마치고 허탈하게 면회실을 나오는데, 대기실에 있는 70대 한 어머니를 보았다. 굽은 허리로 자식을 만나러 오신 어머님의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1987년,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엄마도 저렇게 대기실에 앉아 자식을 기다린 적이 있다. 엄마는 오빠를 만나러 구치소로 면회를 다니셨다. 이렇게 겨우 10분을 면회 하려고 엄마는 영치금과 속옷을 준비해 버스를 타고 또 걸어서 구치소에 갔을 것이다. 몇 시간을 들어서 간신히 10분 아들 얼굴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엄마는 아마 눈물 훔쳤을 것이다.

엄마는 10분이라도 면회를 허락한 이 사회에 감사했을까? 서러움을 안겨준 자식을 원망했을까? 엄마는 그 마음을 아빠에게도 자식에게도 내보이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이 감추고 살아왔을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상처투성이 엄마에게 대학 들어 간 난 또 무슨 짓을 한 건가?

후배 면회를 다녀 온 다음 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구치소에 면회 갔다 온 이야기를 하며 오빠 면회 다니며 엄마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제 팔순이 된 엄마는 아기처럼 울며 누구에게도 내보이지도 못했던 또 잊을 수도 없었던 별처럼 많은 상처들을 쏟아냈다. 22년도 지난 이야기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엄마, 미안해. 상처투성이 엄마에게 내가 또 상처를 줘서.'


#엄마#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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