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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듯 흩날리던 벚꽃의 화려한 추락이 서서히 잦아든다. 좀 더 오래 분홍의 꽃길을 걷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무를 올려다본 순간, 당당한 '연두'의 이파리들이 기습처럼 꽂혔다. 팝콘 터지듯 느닷없이 만개하여 나무를 온통 뒤덮던 벚꽃들이 지고 나자 비로소 잊고 있던 연두 잎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한때의 화사함으로 시선을 붙잡는 '꽃'의 강렬함에 매혹되어 더 오랜 세월 나무와 동거하는 '잎'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니!

'나'는 '엄마'이기 이전과 '엄마'가 된 이후로도 늘 '나'라는 한 사람으로 존재해왔음을 나무를 보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꽃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자식'이라는 향기에 취해 내가 한그루의 온전한 나무, 즉 '사람'이었음을 잊고 지낸 세월. 그것은 아름답고, 슬프고, 아프기도 한 꿈같은, 형벌 같은 세월이었다.

지난 29일 동북여성민우회에서 주최한 2011 민우여성학교 기획 강좌 "페미니스트에게 육아를 묻다"는 오랜 세월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 짓눌려왔던 나에게 자발적으로 숨쉬기를 가능하게 한 심폐소생술과 같았다. 인류의 역사는 '구조(세계)'에 대한 '개인(나)'의 끊임없는 반응(reaction)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정희진(여성학자)박사의 명쾌한 해석이 페미니스트, 엄마, 여성으로 호칭되는 이들의 모호한 분노와 불안, 억울함을 일순간 해소시켜 주었다.

특별히 '엄마'라는 가혹한 굴레를 쓰고 인내와 희생, 헌신의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엄마'의 완벽한 정체성을 향해 맹렬히 달려온 이들에게 폭풍같은 해방감을 준 시간이었다.

'폭력'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기' 또는 '관계를 제도화하기'로 정의할 수 있다는 말에 가슴속의 묵직한 돌덩이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죄책감과 회한도 몰려 왔다.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권리 행사가 내 아이들에게 숱한 '폭력'의 흔적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나와 같은 엄마일수록 딸에게 가하는 여러 형태의 폭력들을 대부분 인지하지 못한다. 부모, 자식이라는 사적인 관계에서 도출되는 문제의 경우 대부분 '나'의 문제에서 그 원인이 드러난다.

부모, 자식, 남편을 원인으로 삼아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는 과정 속에는 깊은 불안과 외로움에 수도 없이 난도질당한 진짜 '나'의 은폐가 있다. 친밀하므로, 경계가 불분명하므로 더 깊은 상처를 주고 받는 가족의 잔혹한 구조가 '나'를 소외시키고, 역할로서 대신 자리를 지키게 하는 것. 그 끝없는 도피로부터 이제는 그만 돌아오고 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비겁을 떨쳐내고 용감해지기, 진심으로 사과하고, 나의 약점과 무지를 드러내 냉정한 평가를 받아내기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그 대상이 완벽해 보이는 엄마이거나, 철없어 보이는 자식이거나, 배려가 부족한 남편일지라도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슬라보예 지젝, 난장이)에서 저자는 '폭력'을 '주관적 폭력' '객관적 폭력' '구조적 폭력'으로 나누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 폭력'은 이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에 내재한 폭력을 뜻한다. '구조적 폭력'은 정치, 경제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파국적인 형태로써 그것이 눈앞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상적이고 일상적이며 평온한'이라는 전제가 붙음으로써 폭력이 교묘하게 가시화된다는 말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좋은 엄마, 훌륭한 교육, 화목한 가정, 모성, 애국심, 자선 등은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일반화할 수 없고, 확실하지 않은 것을 어떤 의도나 장치에 의해 공론화하고, 주류담론으로 확산시킬 때 수많은 다양한 개인들은 억압과 지배를 경험하게 된다.

모성이 본능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여성을 옥죄었던 것처럼 가장이라는 절대적 이미지로 가부장제 사회를 존속시키는 동력에 내몰린 남성도 모두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당한 피해자인 것이다.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 대다수가 '교육'의 억압과 중노동에 시달리며 상위 성적 0.1%의 들러리로, 때론 괴물로 양산되는 현실은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암담하게 한다.

[나? 대안학교 졸업생이야](김한성 외 14인, 글담출판사)의 공저자인 박민희씨는 28일 열린 민우여성학교 좌담회 "육아에서 길을 잃다"에 패널로 참석하여 지난했던 성장기의 경험담을 자녀 입장에서 풀어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개성과 창의성 때문에 획일화된 시스템에 적응할 수 없어 방황하다, 대안학교(세인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자기 안에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믿어준 스승의 한 마디로 인해 삶의 주인으로 거듭난 케이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머니의 방임형 교육관으로 힘든 사춘기를 보냈다고 회고한 것에 반해 함께 자리한 누나는 방임형 교육 덕분에 명문대까지 무난히 졸업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장사를 하느라 힘들었던 어머니가 사교육 없이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찾게 해주어서 적당한 방임이 오히려 좋았다고 사춘기를 회고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육과 육아는 일반화된 틀로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 아이들 제각각의 개성과 환경에 의해 천차만별의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날 정 박사는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특히 한국인들이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9세기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직도 학원까지 따뜻한 도시락을 챙겨 가고, 아이의 시험 기간에 온 식구의 TV시청이 금지당하고, 빈틈없이 자투리 시간을 챙기느라 연예인 매니저 버금가는 기동력을 발휘하는 슈퍼맘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 그곳에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학부모 대열에 새롭게 진입하는 새내기 엄마들의 현재와 미래가 겹쳐져 안타깝다.

'불행한 미래에 대한 확신' 때문에 결혼을 코앞에 둔 호주의 유명한 여성 앵커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결혼, 출산, 명퇴, 육아, 권태기, 이혼 등의 수순으로 이어질 뻔한 미래의 불행을 예견하며 벼랑위에 올랐을 똑똑했지만 무지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페미니스트의 생존전략을 다시 짜본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 견고하고 권위적인 사회 구조와 맞서 오늘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은 뻔뻔하게 이기적이고 행복한 삶을 꿈꿀 자유와, 다양성을 자산으로 탄탄하게 어깨를 두른 평등의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는 전략. 실체도 없는 '행복'과 '모성'을 쫓는 삶이 아니라 '나' 때문에 사는 삶을 꿈꾸며, 미로를 더듬는 우리들 각자의 손에 황금 실타래를 한 꾸러미씩 쥐어주고 싶다.


#모성#엄마#나#페미니스트#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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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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