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돌아간 내 두번의 가출중학교 1학년 때 첫 가출을 했다. 부모님이 3살 터울인 오빠와 나를 비교한다는 이유였다. 오빠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그런 사소한 이유와 용돈이 적다는 이유로 친구와 가출을 했다. 목적지는 수원이었다.
돈을 벌려고 주유소에 취직했는데 소장이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했다. 난 가출소녀가 아니라고 했다. 소장은 돈 갖고 도망갈까봐 쓰는 거니깐 쓰라고 했다. 다음날 부모님들이 우릴 찾으러 왔다. 소장님은 "너희는 아직 공부 할 때야, 돈은 나중에 벌 수 있어, 부모님 말씀 잘 듣거라"하며 우릴 보내줬다. 부모님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고개숙여 몇 번이나 했다. 엄만 나에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해 주셨다.
두 번째 가출은 자퇴를 한 고 2때였다. 아빠의 술주정과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엄마는 외가로 피신을 가 있는 상태였다. 집안 환경을 핑계 삼아 비뚤게 지냈던 난 같은 반이었던 친구와 부산으로 가출했다. 부산에 살던 친구네 집에서 자게 됐는데 다음날 눈을 떠 보니 엄마가 있었다. 두 번의 가출이었지만 엄만 나에게 되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19살 때 안산에서 일을 하던 오빠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사는 평생 다리 불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부모님은 돈이 없어서 이리저리 구걸하러 다녔다. 그러기를 20일 정도가 지났다. 심한 당뇨와 심장병으로 아빠가 돌아가셨다. 빈털터리로 떠난 아빠를 엄만 많이 원망했다. 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내심 다짐했다.
오빠의 사고, 아빠의 죽음...이어지는 불행들오랫동안 엄마와 떨어져 산 탓에 한 칸짜리 방에서 세 명이 살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난 돈만 갖다 드리고 일하던 가게에서 숙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염려하던 일이 터졌다. 18살 때 만든 신용카드의 빚을 갚지 못한 걸 엄마한테 들키게 됐다. 그때부터 엄만 하루하루 술을 드시며 우셨다.
비록 오빠가 사고가 나서 잘 못 걷지만, 아빠가 남겨 놓은 거 없이 떠났지만 남은 세 식구 열심히 살아보려 이제 시작했는데 500만 원이란 빚이 생겨 버린 거다. 엄만 큰 충격을 받았다.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며 죽고 싶다고 했다. 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들만 생기냐며 매일 우셨다.
그럴수록 난 더 열심히 일했다. 서서히 카드 값을 거의 다 갚았을 때였다. 일을 하고 있는데 차분하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덩치 큰 형사들이 봉고차 타고 나를 잡으러 왔다고 했다.
"너 일하는 곳 알려주긴 했는데 또 무슨 일이야! 누구한테 통장 만들어 줬다며?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겨!" 순간 일 년 전 일이 생각났다. 호프집 알바 할 때 자주 오던 노가다 소장(자칭)이 있었는데 인부들 돈을 오늘 줘야 하는데 통장을 지방에 있는 집에 놔두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난 내 명의로 된 빈 통장을 빌려줬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사기꾼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난 서울에 있는 경찰서에 가서 다섯 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죄라곤 통장을 빌려준 것 뿐이었으니 조사만 받고 조용히 끝났다.
이젠 빚도 다 청산했다. 오빠도 불구가 될 거라는 의사에 말과는 달리 절룩거리지만 걸을 수 있게 됐다. 오빤 걸을 수 있다는 기쁨에 가끔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근데 그런 외출이 많아질수록 술을 먹고 오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경찰차에 실려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문이 열린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도둑으로 오해를 받고 경찰서까지 가기도 했다. 잠시 잠잠했던 엄마의 눈물과 술이 또 터지고 말았다. 창피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던 엄마는 그저 술로만 마음을 풀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엄마의 눈물은 점점 사라졌다. 오빠와 난 지난 날들을 후회하며 더더욱 노력했다. 오빠는 장애6급 판정을 받았지만 사고 전 갖고 있던 기술로 취직을 했고 여자친구도 생겼다. 난 피자집을 다니며 꿋꿋이 자리를 잡았다.
세월은 흘러 빚도 갚고, 두칸짜리 전세방으로 옮겼는데드디어 한 칸짜리 월세 방에서 두 칸짜리 전세집으로 평수를 늘리게 됐다. 그런데 이사하기 하루 전날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빠 여자친구가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또다시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엄만 덤덤하게 받아 들이셨다. 지금까지의 사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은 일이라며 생명을 죽일 순 없다고 하셨다.
두 사람은 곧 결혼을 했다. 맞벌이를 하는 오빠 내외를 대신해 엄마는 조카를 돌보셨다. 마치 손녀 때문에 사시는 분처럼 즐겁게 지내셨다. 물론 그 누구도 엄마를 더 이상 속상하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 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던 나였다. 그런데 적지 않은 나이 26살 때 또 한 번 엄마의 마음을 찢어 놨다. 난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다며 남자친구가 있는 전라도로 가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 엄만 말렸고 나와 말도 안 섞었다. 3일이 지나고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허락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충분히 놀 나이에 놀지도 못하고 죽어라 돈만 벌었으니 하고 싶은 거 하며 지내보라고 하셨다. 그길로 짐을 싸서 전라도로 향하는 내내 죄송한 마음에 울기만 했다.
전라도에 도착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하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이젠 인천에 올 때까지 전화하지 말라고 하셨다. 진심이 아닌 줄 아는데 "네"라고 대답해 버렸다. 며칠 후 올케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아가씨. 어머니 매일 술 드시고, 우시고, 잠자리에 드실 때 계속 아가씨 이부자리 펴놓고 주무세요." 너무너무 죄송했고 엄마가 보고 싶어 많이 울었다. 예전에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였는데 지금 하는 내 행동이 너무 싫었다. 내 빈 자리를 채워주려 오빠랑 올케언니가 힘쓰는 게 느껴져서 너무 미안했다.
평생 엄마랑 살려고 했지만어느덧 계획했던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엄마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피자집으로 돌아가 엄마만 생각하며 일을 했다. 이제 정말 더 이상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평생 처녀로 살 수는 없는 노릇. 28살에 결혼을 했다.
엄마는 더 즐기다 결혼할 것을 원하셨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인 나였다. 결혼 후 엄마와 단 둘이 술 한 잔 할 때면 가끔 말씀하신다. "더 놀다 결혼하지, 돈만 벌다가 결혼해서 또 돈 벌고, 해보고 싶은 거 좀 하고 결혼하지"라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리고는 "오빠랑 네가 벌어오는 돈 엄마가 관리하면서 용돈도 적게 주고 사고 싶은 것도 잘 못 사게 해서 많이 서운했지?"라며 우신다.
나는 웃으며 이야기 한다.
"대신 엄마 덕분에 우리가 헤픈 사람 안 됐고 빚지지 않고 결혼했잖아요. 엄마가 없었으면 우린 아직 아무것도 못했어요!" 그럼 엄만 눈물과 함께 웃음을 지으신다. 그러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엄마 마음 알아줘서 고마워"라고 하신다.
엄마! 너무나도 소중한 내 엄마! 힘들 때 굳이 한 자 한 자 말하지 않아도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 우리 엄마! 건강하게 오래만 살아주세요!! 오래오래 행복한 웃음 드릴게요.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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