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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파' 방정환.
 '소파' 방정환.
어릴 때, 전봉준이 누군지는 몰라도 방정환은 알았다. 게다가 충무공 이순신처럼 그의 이름도 '소파(小波)' 방정환으로 불려야지 '완전한' 이름이란 것도 알았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긴(?) 이름으로 각인되는 위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만큼 방정환은 특별했다. 나라를 구한 이순신급이라는 거다.

이유야 뭐 당연한 거. 그가 어린이날을 만든 장본인이니까. 물론, 이날이 제정된 배경에는 색동회라는 조직이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어린이로부터' 끄집어내고자 했다는 숭고한 뜻이 있다. 물론 전혀 몰랐다.

그래서 '작은 물결'이라는 뜻의 '소파'인데, 나는 그저 거실에 있는 그 소파와 왜 같은 명칭을 사용했을까 정도의 의심만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를 1년에 한 번, 공식적으로 구해주었다는 사실.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이날(children's Day)은 많은 나라에서도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일본 역시 우리와 같은 5월 5일이고, 북한은 6월 1일이다. 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이슬람력으로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다.

1925년, 제네바에서 열렸던 '아동 복지를 위한 세계회의'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날이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나름 정통성이 있는 날이라는 것. 1954년부터 유네스코는 11월 20일을 세계 어린이날(Universal Children Day)로 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5월 5일이 공식적으로 공포된 것은 1961년.

그러나 세계 곳곳의 '어린이 날'이 우리나라의 '그날'과 같을 리가 있겠는가. 그 나라들에서도 우리처럼 '자기들의' 방정환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나라의 어린이날은 '원래' 소중한 이들이 '여전히' 소중하다는 것을 각인하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린이에게 대해주는 '원래의 좋은 습관'을 이날 한번 '더' 다짐하는 셈이다. 당연히, 어린이들은 '매일'이 어린이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데, '어린이날'이라고 호들갑을 떨 이유가 전혀 없다.

 어린이집 앞에 걸린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알림글.
 어린이집 앞에 걸린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알림글.
ⓒ 엄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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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나라는 차원이 다르다. 어렸을 때 내가 다른 위인은 몰라도 소파 방정환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그는 '오직 이 하루'만이라도 우리에게 자유를 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에서의 어린이날은 '이날 하루만이라도' 아이들 기준에 맞추어주라는 날이다. 이날'도' 기억해 주자는 타국의 그것과 포인트가 완전히 다르다. 다른 말로 평소에는 어린이를 족쳐도(?) 된다는 것.

그러니 '너무나' 이날이 고마운 것은 당연. 그래서 이날을 만들어주신 '분'을 궁금해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의 도리였다. 도대체, 한국사회에서 "어린이답게!"라는 것은 왜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힘든 것 투성이여만 하는 것일까? 단지 어린이기에, 말 잘 듣고 시키는 것만 해야 하는 그런 사회. 인생 자체가 고달픈 대한민국의 어린이들.

하지만 5월 5일은 유일하게 '어린이다운' 투정이 24시간 동안 허락된 날이다. 이날 너무 오버하면, 3일 후 다가올 '어버이날'에 고스란히 그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머리가 좀 굵어지면 알겠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나이라면, 이날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 되는 그런 날이다. 20년 징역형을 사는 죄수가 하루 특별휴가를 떠났다고 하자. 얼마나 '모든 것'이 간절하겠는가.

아이들은 평소 눈여겨보았던 모든 것을 목숨 걸고 조른다. 포기하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들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이날은 사회적 여론도 불리하다. 그것은 "어찌, 어린이날조차!"라는 압력. 여기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세 돌도 되지 않은 딸이 어린이날을 각인하는 과정

 레고 블록.
 레고 블록.
ⓒ le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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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마트를 갔다. 조카의 지난 생일 때 레고를 선물했는데, 그때 어린이날에 새로운 시리즈를 선물해 주기로 덜컥(?)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린이날이라는 것은 최소한 초등학교는 들어가서 '집단여론' 속에서 각인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립 서비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몇 번씩 이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면서 '어린이날 = 레고 받는 날'이라는 공식을 '체화'시켜 놓았단다. 그 집념의 '강도'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엄청날 것이 뻔하다.

다른 약속은 어겨도 어린이날에 해 주기로 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은 당연지사. "삼촌은 사악한 거짓말쟁이!"라고 인증받기 전에 이런 일은 잘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구입했다.

그런데 이 레고를 세 돌도 안 지난 내 딸 해서가 자꾸만 자기 것인 줄 안다. 왜 집까지 와서도 안 뜯어보느냐는 거다. 지금까지 마트에서 구입한 '자기를 위하는 듯한' 물건은 반드시 집에 오면 개봉을 했으니 의아해 할 만하다. 그래서 말했다.

"이건 오빠 어린이날 선물이야!"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가 어린이날을 알겠어?" 그러나 며칠 후, 해서 왈, "해서는 엄마랑 아빠랑 붕차(자동차) 타고 마트에 가고 싶다. 어린이날에. 뽀로로 살래"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이 문장을 풀이하면 "어린이날이니까 너희들은 나를 위해서 선물을 사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평소 "사고 싶어요!"라는 간절함도 사라졌다. "사라!"는 협박만이 있다.

친구인 아동학 박사가 이 상황을 보충 설명해준다. 해서는 레고와 함께 어린이날을 처음 들을 때, 누군가가 무엇을 받는 날 정도로만 이해했을 거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어린이에 '자신'이 포함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란다.

그런데 어린이집 '안'의 집단문화가 그날 선물을 받는 대상에 '당연히'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학습시켜 주었을 거란다.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규정은 간결. "너 그날 뭐 사달라고 할거야?"가 알파와 오메가란다. '원하지 않는 자'가 바보가 된다는 약간의 그러나 강력한 설명이 첨가될 뿐.

그래서 '그날'은 유일하게 부모와의 관계에서 '갑'의 위치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세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도 알 수 있단다. 어린이가 주인이 세상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최소한 '그날'은 주인 행세할 수 있다는 것을. 한마디로 대박인 날이다. 

이러한 절박함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린이들 사이에 '뽀통령'으로 통하는 뽀롱뽀롱 뽀로로와 친구들(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어린이들 사이에 '뽀통령'으로 통하는 뽀롱뽀롱 뽀로로와 친구들(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 poror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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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민해야 될 지점은 이렇게 강력하게 각인된 어린이날의 갑을 관계를 어떻게 깨트릴 수 있느냐는 것. 왜 깨트리려고 하냐고 묻지 마라. 돈 없고 피곤하니까. 그러나 나는 뛰어보았자 벼룩이다.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이 사회는 어린이들의 불같은 '전투심'을 자극시킬 변수를 아주 정성스레 곳곳에 배치해 놓으니까.

지하철 안에서도 "오늘은 어린이날을 앞두고 부모 노릇 잘할 상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법의 팽이입니다!"라면서 물품구매의 정당화에 '도덕성'을 첨부시킨다. 해서는 팽이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다. 마치 "들었지? 부모 노릇 잘하라고!"라면서 속삭이는 것 같다.

우연히 찾아간 마트는 입구에서부터 어린이날 선물 '대' 전시가 한창이다. 평소에는 절묘한 동선 관리를 통해 딸의 접근 자체를 차단했지만, 어린이날 2주 전부터는 매장 입구에서부터 거대한 전시가 펼쳐진다. 마치 "이날만큼은 목숨 걸고 원하는 것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처럼.

 코코몽.
 코코몽.
ⓒ cocom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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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레고 앞은 무사통과. 레고공장이 망해서 더 이상 AS(?)가 불가능하다는 놀랄만한 거짓말을 했다. 역시 사람은 상상력을 키우고 살아야 한다. 유사한 다른 아류작들에게는 '독극물'이 함유되었다고 했다.

아뿔싸. 다음은 뽀로로다. 뽀로로 인형은 바보처럼 생겼다고 했다. 뽀로로 자동차는 면허증이 없으면 구입 못한다는 법이 10초 전에 국회를 통과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뽀로로가 붙은 완구가 너무 많다. 그래서 말했다. "뽀로로는 식인펭귄이었다!"고. 하지만 다음은 '그만큼' 코코몽이 대기 중이다. 여기서는 "원숭이는 인류의 적이었다!"고 강연이라도 해야 되나?

매장의 '반'도 아직 지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는 '어쨌든 하나라도 건질 기세'로 매장 곳곳을 기웃거린다. 오직 '이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은 날이니 이 정도에 굴복할 자신이 아니라는 당당한 기세로.

절박하지 않은 어린이들을 기대하며 

아동학 교수가 그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저 절박함은 상상을 초월해진다고. 그만큼 '이날'의 자유가 더 소중하게 느껴질 상황 속에 속박당하게 된다는 거다.

당연히 아이들은 노련해져, 상상을 초월하는 물건을 원하고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부모를 압박할 담론까지 알고 있단다. 게다가 이는 99가지의 전술로 진행된다고. 그러나 보통은 이 전술이 통한단다. 물론 이는 담보가 되어 다시 365일을 지옥처럼 보내는 동기가 된다.

어린이날. 참으로 한국적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이 소파 방정환을 알지 못하는 그런 날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어린이날#소파 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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