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기업(Social Enterprise)에 대한 관심과 열풍이 뜨겁다. 보도에 따르면, 금년 2월 새로 설립된 사회적기업 진흥원은 올 한해 총 112억 원을 투자하여 320개의 청년 사회적기업 팀(Team), 1600명의 사회적기업가들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했고, 서울시는 전년도(309개 지정)에 이어 300여 개의 서울형 사회적기업을 신규 육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경기도를 포함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추진 중인 계획까지 합할 경우, 올 해만 줄잡아 1000개가 넘는 (예비) 사회적기업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고용노동부로부터 인증서를 교부 받은 사회적기업은 500여 개 남짓. 아직 인증 절차를 밟지 않은 예비 기업까지 합한다면 현재 전국적으로 약 1500개가 넘는 사회적기업이 존재하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면서 이윤을 창출하며, 창출된 이윤을 다시 사회로 환원한다는 좋은 취지와 목적으로 추진 중인 정부 및 지자체의 사회적기업 육성 정책은 지금 열심히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중이다.
양이 최선입니까?사회적기업들이 늘어나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좋은 일이다. 청년 실업률이 하늘을 찌르고 있고 공공서비스 관련 예산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좋은 사회적기업들이 많이 만들어져 일자리가 늘어나고, 다양한 사회서비스가 제공되어 구멍이 숭숭 뚫린 사회안전망을 일정 부분 메울 수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유감스럽게도 이 그림은 사회적기업이 지속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만 유의미할 뿐이다.
사회적기업은 '가치와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영리기업에 비해 임신기간이 길고, 부화율이 낮으며, 지속성을 담보하기 힘든 속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비영리형은 말할 것도 없고, 주식회사형 사회적기업이라 하더라도 단기 속성재배를 통해 양적 확대를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이른바 '제 3섹터'라 불리는 사회적기업 영역은 양(量)을 늘린다고 생태계가 발달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현재 정부와 일부 자치단체들은 '단기 속도전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회적기업을 만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아직 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어린 묘목들에게 화학비료와 성장촉진제를 과도하게 뿌려대고 있다. 나무가 잘 성장하려면 먼저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는 법. 아무리 많은 나무를 심는다 해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땅이 죽어버리면 지금 몇 개의 묘목을 심었는가는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기업 육성 정책은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게임이 아니라 일정한 규모 안에서 개별 사회적기업의 경쟁력과 질(質)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증제'의 틀 안에서 숫자 경쟁이 벌어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 말할 나위도 없이 유사(類似) 사회적기업들이 늘어나게 되어있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라는 말처럼, 사회적기업의 외피를 갖고 있으나 진정성이 결여된 기업, 단체들이 정부 지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기업 관련 제도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 현재 제도권 안에 있는(정부 및 지자체의 인증을 받은) 사회적기업들 중에 이런 단체가 상당수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어떻게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 사회적기업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기업의 초기 설립과정에서 외부의 재정적, 물적 지원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만들어내기에는 개별 사회적기업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태부족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지원 그 자체가 아니라 '지원 체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지금 이 지원시스템 이 곳 저 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법 제정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적기업 육성법은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기관들에게만 인증을 한정함으로써, 비영리형 사회적기업을 원천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영업적 수익 여부를 인증의 기준으로 삼는 정부의 획일적 정책과 법적 강제성이 사회적기업 생태계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해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증이 곧 지원'인 현실에서 본래의 착한 목적은 사라지고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억지로 인증조건을 맞추는 왜곡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사회적기업들이 정부에 대한 의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사회적기업가의 요체라 할 수 있는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훼손되기 쉽다. 창의와 혁신을 통해 자립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생존을 위해'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려는 쪽으로 생각이 경도되기 마련이다. 잘못 설계된 제도와 도덕적 해이가 상호 작용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목적(사회적 가치 실현)과 수단(조직의 유지)이 뒤바뀌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좀 더 멀리 뛰기위한 숨 고르기 사회적기업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차이도 매우 크다. 복지 축소를 걱정하는 이는 정부가 사회적기업을 빌미로 공공 부문이 책임져야 할 사회서비스 영역을 시장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말하고, 영리기업의 잣대로 사회적기업을 진단하는 이들은 지금 정부가 추진 중인 사회적기업 육성정책은 '미래의 한계기업을 대량 생산하는 컨베이어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힐난한다. 한편, 사회적기업이야말로 정부도 시장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서비스와 복지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완충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사회적기업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를 함께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실험이며 도전이다. 공공성과 수익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가치를 화학적으로 용해시키는 일이 어떻게 간단하겠는가? 다수가 동의하는 일정한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제3섹터를 일구어내는 과정은 짧은 시간의 집중력으로 승부를 가르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긴 호흡으로 달려가는 장거리 마라톤이 될 것이다.
이제 2007년 사회적기업 육성법 발효 후 현재까지 이룩한 결과를 토대로, 그간의 공·과(功過)를 따지고 설계도를 재검토할 때가 된 것 같다. 근본적으로는 인증제도의 타당성 검토로부터 중앙 및 지방정부의 역할 분담, 지원 시스템의 세부 각론에 이르기까지 정부, 지자체, 기업, 시민사회 영역의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사회적기업 거버넌스(governance)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튼실한 토양 가꾸기가 먼저
무엇보다 혁신기업가들을 키우고 육성하는 일이 긴요하다. 제대로 된 육성기관 및 학교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른바 '사회적기업가 아카데미'를 열고 있는 기관들을 들여다보면, 대다수가 단순 학습이나 강의, 현장 실습 정도의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긴 안목을 가지고 발굴(sourcing), 육성(incubation), 사업화(launching) 등 각 성장 단계에 조응하여 예비 혁신기업가들을 올바로 키워낼 수 있는 '한국형 사회적기업가 아카데미'가 필요하다.
미국의 대표적 사회적기업가 육성기관인 아쇼카(Ashoka) 재단은 사회적기업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찾아내지만 가르치진 않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사회적기업가들을 지원하고 있고, 영국의 사회적기업 양성기관인 SSE(School for Social Entrepreneurs)는 사회적기업가에게 맞춤형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프랜차이징 방식으로 자신들이 개발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전국에 복제, 전파하고 있다. 국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르듯, 우리 현실에 맞는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사회적기업가(entrepreneur)가 아니라 사회적기업가가 머무는 곳이 사회적기업이라는 말이 있다. 공공(1섹터)도 시장(2섹터)도 아닌 제3의 지형에서 공공의 요소(가치)와 시장의 법칙(수익)를 효과적으로 융합하려면, 창의적인 마인드와 뛰어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지닌 혁신기업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사회적기업은 企業(company)이 아닌 起業(enterprise)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