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5월 5일 아침입니다. 애들이 누구에게 들었는지 어린이날이라 자신들을 위해 엄마, 아빠가 재밌게 놀아줘야 한답니다. 그래서 한 마디 했습니다. "오늘은 너희를 위해 재밌게 놀아주겠다. 그리고 어버이날엔 아빠, 엄마를 위해 너희가 재밌게 놀아줘야 한다"고.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과 싫지 않은 다툼을 벌인 후 서둘러 아침을 먹었습니다. 제37회 보성 다향제와 녹차대축제를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식사시간을 느긋하게 갖고 밥을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날은 조급증이 납니다.

 

조금 일찍 행사장을 향하면 길 막힘도 덜하고 찾아온 손님들 틈에 이리저리 치이는 일도 없으리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이들 식사가 늦습니다. 아이들에게 빨리 먹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소리 들은 두 녀석은 아빠 소리가 낯선지 눈이 동그래집니다.


작은 소동을 뒤로하고 전남 보성으로 향했습니다. 시골길을 열심히 달리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이 보입니다. 파란 하늘과 살랑대는 초록 보리밭이 상큼한 오월임을 느끼게 합니다.


1시간 반 남짓 걸려 보성 행사장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있더군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일찍 출발한 사람들이겠지요. 주차장에서 행사장까지 거리가 꽤 됩니다. 한참을 걷는데도 두 녀석은 불평이 없습니다. 이젠 아이들도 걷는데 익숙합니다.

 

얼떨결에 넘어온 차 덖는 일

 

'차' 축제답게 행사장 입구부터 시음 할 수 있는 곳이 많은데 종류가 다양해서 더욱 좋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날이라 아이들을 위한 체험공간도 한두 곳이 아닙니다. 두 녀석은 떡메 쳐서 만들어진 인절미를 손수 잘라보기도 하고 고사리 손으로 새끼 꼬기도 하며 즐거워합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축제를 즐기고 있는데 차를 직접 만드는 곳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내와 저는 동시에 그곳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차 만드는 곳으로 잰 걸음을 놓았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걷긴 하는데 아내와 제가 앞장서서 걷습니다.


아이들은 새끼 꼬기 놀이가 아쉬운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느라 엄마, 아빠의 억센 손길에 질질 끌려옵니다. 제다 체험비용은 단돈 만원입니다. 신난 아내는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며 팔을 걷어붙입니다.


차 만드는 일이 신기한지 아이들도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점 지겨워합니다. 차 덖는 무쇠 그릇도 위험한데 뜨거운 불 기운이 더 괴롭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가자며 졸라댑니다. 아내도 난감한지 채근하는 아이들을 달래기 바쁩니다.

 

결국, 아내는 세 아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저 혼자 남았습니다. 옆에 있던 행사 도우미는 차 덖는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한다며 저를 끌어당깁니다. 얼떨결에 차 덖는 일이 제 손에 넘어왔습니다.

 

뜨거움 참으며 달인처럼 차를 덖는 모습 시연


엉거주춤 앉은 자세로 뜨거운 무쇠 그릇 속 찻잎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도우미가 옆에서 거들며 한 마디 합니다.

 

"차 만드는 일은 정성이 90%입니다. 나머지는 느긋한 마음과 적당한 불 조절이 중요합니다."

 

무슨 선문답 같긴 한데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이나 차 덖는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자세가 불량해서인지 허리는 아파오고 무쇠 그릇에서 올라오는 불길에 몸은 더워집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어디로 간 걸까요? 차 덖는 일이 처음이라 다음은 무엇을 해야할지 도우미 눈치만 살핍니다.

 

시간은 점점 흘러 12시를 향해 달려갑니다. 두 시간째 허리 통증에 시달리며 차를 덖고 있는데 제다의 달인쯤으로 보이는 점잖은 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장갑 벗고 맨손으로 차를 느껴보랍니다. 무쇠 그릇이 뜨거워 손이 데일 수 있다고 말했더니 엄살 피우지 말라는 듯 손바닥으로 찻잎을 감싸 훑어 올리면 손 데일일 없다며 걱정 말랍니다.

 

초보자의 서툰 솜씨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분은 야속한 말 한마디 던지고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앗, 뜨거워"를 연발하며 차를 덖고 있는데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듭니다. 잘 덖어진 차(?)를 바라보며 부모들은 함께 온 아이들에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입니다.

 

순간 저는 뜨거움을 참으며 달인처럼 차를 덖는 모습을 시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참고 있는데 멀리서 아이들과 아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요. 다가온 아내는 잘 덖어진(?) 차를 보며 마무리 작업에 들어갑니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봉지에 차를 고이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제가 직접 만든 수제차를 맛보았습니다. 투명한 찻잔에 담긴 차를 마셨습니다. 색과 향과 그리고 맛의 오묘한 조화가 입 안 가득 들어옵니다. 아이들도 아빠가 직접 만든 차를 마시고 고개를 끄덕여줍니다. 정말 그 맛을 아는 걸까요?

 

"애들은 놀이공원이나 자전거 타는 걸 더 좋아해"

 

그날 저는 차를 처음 덖어 봤고 직접 제 손으로 만든 차를 마셔보는 일도 처음이었습니다. 정말 맛있고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번 체험을 통해 뜨거운 교훈을 얻었습니다. 평소 내가 즐겨 마시는 차가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내 입과 손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나의 정성과 땀이 배이지 않고는 그 참맛을 알 길이 없음도 깨달았습니다. 그 교훈을 되새기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꾸 손가락을 코 끝에 대봅니다. 이상하게도 손끝에서 사과향이 납니다.


기분 좋은 향에 취해 뒷자리 두 녀석에게 오늘 어린이날인데 재밌게 놀았는지 물었더니 둘째가 던진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납니다.

 

"어린이날 인데 아빠, 엄마만 신났고 우리는 재미없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며칠 전 모임에서 어린이날 계획을 듣고 던진 친구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애들은 차 마시는 것보다 놀이공원이나 자전거 타는 걸 더 좋아해."

 

그동안 아이들을 너무 몰랐던 걸까요? 이젠 아이들과 상의해서 놀이계획을 세워야겠습니다.


태그:#녹차대축제, #다향제, #보성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