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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14일) 오전에 '청산리 대첩 기념비'와 '대종교 3대 종사 묘역',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를 방문하고 점심을 먹은 뒤 일송정에 올랐다가 내려와 윤동주 시인 생가가 있는 명동촌(明東村)을 찾았다.

 

버스 안에서도 안개에 둘러싸인 세전벌과 꽁꽁 얼어붙은 해란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빙판길을 미끄러지듯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털털거렸다. 그래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말안장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선구자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버스는 고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 장재마을(장재촌)을 지나 오후 3시10분쯤 명동촌에 도착했다. 용정(龍井)이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라면 '동쪽(조선)을 밝힌다.'는 뜻의 명동촌은 항일역사가 숨 쉬는 마을이라 한다. 을사늑약(1905년) 이후 독립운동의 요람이었기 때문.

 

 

차에서 내리니 차가운 바람과 '윤동주 생가'가 음각된 돌비석이 우리를 반겼다. 작년 여름(8월)에는 숲처럼 우거졌던 옥수수밭이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아내와 기념촬영 했던 장소에서 포즈를 잡아보기도 했다. 

 

명동촌은 윤동주 시인 외삼촌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1899년 황무지를 사들여 개척한 항일기지였다. 규암의 뒤를 이은 사람은 '신민회'의 교육 구국운동에 참여했던 정재면(1882~1962). 그는 1909년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웠다. 명동학교는 만주에 흩어져 있던 민족학교 가운데서도 최고 명문이었다고.

 

 

만주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규암 선생 기념비와 십자가가 달린 명동교회 건물이 무척 외롭고 쓸쓸하게 보였다. 항일운동과 명동촌 관련 자료를 전시해놓았던 전시실(예배당)도 텅 비어 있었다. 상냥한 북한 말씨의 여성 해설사가 보이지 않아 더욱 썰렁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고 날이 추워 모두 철수한 모양이었다.

 

 

명동교회와 이웃하고 있는 윤동주 생가는 전형적인 팔작지붕에 내부도 안방과 부엌이 이어진 북방식 구조였다. 그러나 썰렁하기는 교회 건물이나 마찬가지. 귓불을 시리게 하는 찬바람이 윙윙 불어대니까 더욱 허전했다.

 

여름에는 오래된 기와에서만 자란다는 와송(瓦松)도 보이고, 마당에 서면 풀 냄새가 진동했으며 매미들의 합창도 요란했는데 적막이 감돌았다. 돌덩이처럼 얼어붙은 마당의 소똥들과 윤동주 생가터임을 알리는 돌비석이 장승처럼 서서 반길 뿐이었다. 어려서 흔하게 봤던 소똥이 반갑게 여겨지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생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재잘거렸다. 한 학생이 금주에 할일과 청소당번 문익환, 지각생 윤동주, 떠드는 학생 송몽규···. 등이 적힌 칠판을 발견하고 "우와 재밌다!"라고 외치자 우르르 몰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문득 윤동주 시인과 함께 일본 오사카 감옥에 갇혔다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송몽규, 통일 운동가 문익환, 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초상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이야 이 세상에 없지만, 어려서는 함께 꿈을 키웠던 단짝들 아니었던가. 그중 송몽규는 윤동주와 고종사촌으로 알려진다.

 

28세의 짧은 생을 비극으로 마감한 항일시인 윤동주(1917년 12월~1945년 2월). 그의 부끄럼 없는 삶과 그가 남겨놓은 아름다운 작품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한국인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를 잊지 못할 것이다. 

 

조선족자치주 첫 주장(州長) 주덕해의 안타까운 죽음

 

윤동주 생가에서 조선족자치주 첫 주장(州長)을 지낸 주덕해(1911~1972)가 소년 시절에 살았다는 '승지촌'으로 이동했다. 시계는 오후 3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만주의 하늘은 벌써 노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덕해의 옛 집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니 순하고 착하게 생긴 암소 한 마리가 길을 안내했다. 사람이었다면 고맙다고 인사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주덕해가 살았던 옛 집터에 도착하자 박영희 시인이 앞으로 나와 설명을 시작했다.

 

"조선족을 얘기하면서 주덕해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이자 초대 주장을 지냈거든요. 그는 조선족이 중국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니 중국은 조선족을 위해 구역자치를 시행함은 물론 중국 공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가 1949년 3월이었는데 당시엔 빛을 발하지 못하지요." 

 

"다음 해(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면서 다시 화두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1952년 9월 3일 중국 정부는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인은 오늘부터 중국 공민이 된다. 또한,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조선(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조선족'이라 부른다'라고 공포합니다. 연변 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5년 4월 자치구가 자치주로 격하됩니다···."

 

박 시인은 '자치구'(하나의 省을 의미함)와 '자치주'의 차이점, 조선족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던 주덕해가 중국 정부로부터 버림받아 유배를 당하고, 주은래의 도움으로 두 차례 죽을 위기를 면했던 일. 그러나 결국 200만 조선족 대표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내용 등을 덧붙였다.

 

작년 여름에도 주덕해 옛 집터를 방문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원이라는 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 역시 반공세대여서 공산당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이 박혀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설명에 귀를 세웠고, 내부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주덕해의 본명은 오기섭, 당시 그의 죄목은 미국 스파이, 중국 공산당원이면서 조선족만 생각한다는 것 등이었단다. 발길을 돌리면서도 중국정부가 늦게나마 주덕해의 혁명 활동과 항일투쟁 공을 인정하고 기념비를 세워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만 원 탈취사건'을 '군자금 마련 사건'으로 바꿨으면

 

 

시간에 쫓기는 우리는 건너편 산비탈에 세워진 '15만 원 탈취사건' 기념비로 이동했다. 박 시인은 세상 어디에도 거금을 탈취한 사건을 기념하는 비는 이곳밖에 없을 거라며 허허 웃었다. 함께 따라 웃으면서도 '군자금 마련 사건'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5만 원 탈취사건'은 1920년 1월 4일 항일무장단체 '대한국민회의' 산하 '철혈광복단' 성원 최봉설이 한상호, 최이붕, 윤준희, 임국정 등과 함께 명동촌과 용정 중간 지역(지금의 기념탑 부근) 숲 속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의 철도 부설자금 15만 원을 탈취한 의거였다.

 

거액의 군자금을 마련한 대원들은 그해 1월 10일 무기구입을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으나 애석하게도 그곳에서 꿈을 접어야 했다. 밀정 엄인섭의 고발로 최봉설을 제외한 모두가 일본군에게 체포당했기 때문.

 

체포된 대원들이 이듬해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5만 원 도난사건'이란 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대목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도 한때 극장가를 달군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일명 '놈,놈,놈')의 모티브가 되었다니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버스를 타려고 산비탈을 내려오는데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들녘에 방목해 놓은 소를 데리러 나온 농부 모습이었다. 서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만주의 겨울 해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일찍 기울었다. 다음 코스는 용정 역인데, 짧은 해가 밉기만 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 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주덕해#윤동주생가#15만원탈취사건#명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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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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