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가게 가면 수제화는 많이 팔던데, 정작 고치는 데는 없더라." 구두에 관심이 많던 이보라 기자는 최원석 기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아끼던 구두를 수선한 경험담이었다. 만들 수는 있지만 고치진 못 한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궁금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취재였지만, 그 이면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었다. 한 달여간의 공동취재 끝에 연속 기사로 내놓는다.... 기자말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고가철로 아래. 적갈색 건물 입구에서 시멘트 계단을 따라 두개 의 층을 오르자 철문이 나타났다. 손잡이를 밀었더니 묵직한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백 평쯤 되어 보이는 공간이 여러 개의 칸막이로 나뉘어 있었다. 각 자리의 세 개 면을 감싼 선반에는 작업 중인 구두들이 즐비했다. 그 아래에서 제화원들은 웅크린 채 작업을 하고 있었다.
"냄새 많이 나죠? 난 습관이 됐는지 냄새나는지도 잘 모르겠어. 남들은 (본드를) 사서도 마시는데, 뭐!"공장을 안내해 주던 제화원 정기만(47)씨가 익살스레 말을 건넸다. 가죽에서 나는 먼지와 온갖 화공 약품에 둘러싸인 제화원들을 보며 그 말에 웃을 기분은 나지 않았다. 5월은 여름용 샌들을 집중적으로 만드는 시기라 하루에 열 서너 시간을 일한다고 한다. 뿌연 창문들은 대부분 닫혀 있고, 변변한 환풍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안 나오게 찍어줘요." '찰칵' 하는 카메라 소리가 나자, 한 제화원이 고개를 살짝 들어 말했다. 그는 어른의 무릎 절반 높이 정도 되는 의자에 앉아 구두 바닥이 될 재료를 붙이는 중이었다. 접착제로 보이는 누런 용액에 연신 칫솔을 담갔다 꺼냈다.
"여기가 저부(아랫부분) 공정하는 곳이에요. 이 일 몇십 년 하다 보면 손에 굳은살은 기본이고 팔을 많이 써서 인대가 늘어나요. 담배도 많이 피우고 허리도 굽고…."
그는 완성된 가죽과 굽, 창 등을 취합해서 신발을 조립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공장 안에 10분 정도 있었을까. 슬슬 머리가 아프고 코가 간질간질했다. 알레르기가 있는 기자의 눈이 빨개지고 재채기가 나왔다. 잠시 공장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쐬고 돌아와야 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은 우리나라 구두제조업의 중심지다. 구두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재료가 성수동 내에 형성된 '제화의 거리'에서 거래된다. 이곳 사람들은 어림잡아 국내 구두 생산의 80%를 책임지고 있다고 말한다. 자체 브랜드를 갖고 백화점이나 아울렛 등에서 판매되는 중대형제화업체 제품뿐 아니라 시장, 상가, 대형할인매장 등에서 유통되는 일반제화업체의 중저가 구두도 여기서 만든다.
금강, 에스콰이어, 엘칸토 등 메이저 업체들은 인천, 성남 등에 자체 공장을 갖고 있지만 그와 별도로 성수동의 하청업체 10여 곳 이상과 각각 거래를 한다. 그런데 성수동 제화원들의 근로 환경과 처우는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작년까지 한 켤레 당 5500원을 받았어요. (성수기에) 하루 스무 켤레 만든다고 치면 11만 원 정도 되죠. 밥값 제외하면 시급이 만 원도 안 됩니다. 이 수준에서 멈춘 게 십 년 됐는데, 지난 10여 년간 백화점 구두 가격이 얼마나 올랐는지 생각해보세요. 올해 켤레 당 6500원으로 오르긴 했지만 마찬가지예요."
정씨의 이야기다. 25년 넘게 제화원으로 일했지만, 수입은 거의 그대로라고 한다. 구두업계는 한 켤레 당 일정 금액을 받는 '개수임금제'로 소득을 계산한다. 돈은 한꺼번에 받지만, 작업량은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월수입이 일정하지 않다. 성수기와 비수기를 평균 내면 월평균 수입은 150만 원 정도. 의료보험 등 4대 보험료를 내는 사람은 그나마도 줄어든다.
"종일 같은 자세로 열서너 시간씩 일해야 한다는 걸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수준이지요." 정씨는 해마다 구두 판매 가격은 올라도 그 이윤이 제화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높은 백화점 수수료를 꼽았다.
"입점한 제화업체들은 36~37%의 판매 수수료를 백화점에 지불합니다. 20만 원짜리 구두를 팔면 약 7만 2000~7만 4000원을 백화점이 가져가는 셈이에요."백화점에서 워낙 많은 수수료를 떼어 가고, 제화업체들도 자기 이윤을 챙기다 보니 실제 구두를 만드는 사람들 몫은 상대적으로 줄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산하 서울일반노동조합 제화지부 회원들은 지난 2009년 5월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백화점 수수료 인하운동'을 선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해 3월에는 제화지부 이름으로 롯데쇼핑과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에 '고통 분담 차원에서 수수료를 인하해 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백화점이 수수료를 3%만 낮춰도 6000원 정도의 이익을 근로자와 제조업체가 나눠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들 처우도 조금은 나아질 텐데 말이에요."근로자를 사업주로 둔갑시키는 '사업자등록증'
백화점 수수료 문제만큼 제화원들을 옥죄는 문제는 '사업자등록증'이다. 2000년대 들어 구두제조사 하청업체들은 제화원들에게 개인사업자등록증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제화원들이 개인사업자로 등록하면 그들을 고용하는 하청업체는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부대비용을 아낄 수 있다. 이렇게 인건비를 줄여 납품단가를 낮추면 하청 계약을 따내는 데 유리하다.
"그렇다고 하청업체가 큰 이익을 남기는 것도 아니에요. 원청과 계약을 맺으려고 영세 하청업체끼리 경쟁하면서 단가를 낮추게 되거든요."제화원 개개인이 사업자로 등록하면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잃게 된다. 실제 고용주인 하청업체가 4대 보험료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일하다 사고가 나도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없고, 사업주가 부도라도 내는 날엔 밀린 임금도 받기 어렵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닌 사업자 대 사업자 관계가 되므로 업주들은 언제든 '계약 해지'를 통해 제화원들을 해고할 수 있다.
"문제가 생겨 노동부에 가면 사업자등록증 냈으면서 왜 노동부 오냐고 말해요. 구두업계에서 왔다고 하면 그냥 돌아가라고 해요."장애 5급 판정, '노가다'도 적용받는 산재 못 받아
제화원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일하다 다쳤을 때다. 제화원 구도회(55)씨는 지난 2009년 9월 성수동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 장애5급 판정을 받았다. 공장을 옮겨 출근한 지 1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지나가던 동료가 구두를 가득 쌓아둔 선반을 건드렸고, 구씨는 선반에 깔렸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아직 공장 안이었어. 119도 안 불렀더라고. 부랴부랴 병원에 갔더니 바로 허리 수술을 해야 한대. 수술을 했지. 그런데도 장애인 판정을 받았어."그는 3, 4번 경추 손상을 입었다. 병원비가 300만 원 넘게 나왔다. 그를 다치게 한 동료와 구씨의 월급은 고스란히 병원비가 되었다. 사장이 100여만 원을 보탰다.
"업주가 산재보험을 안 들었어. 노동자가 다친 후에라도 가입해서 보험처리를 할 수 있거든. 그런데 사장이 가입을 안 하더라고.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왔는지… 하다못해 '노가다'도 산재가 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사고 이후 일을 해보려고 공장에 다시 취직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수시로 허리와 목이 아팠기 때문이다. 구씨는 몸을 더 추스른 후 일을 하려고 쉬고 있다. 지금은 부인이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다.
통계청의 전국사업체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제화업체 종사자 수는 1990년대 초반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1993년에 1965개에 달하던 제화업체 수는 2009년에 절반가량인 955개로 줄었으며, 같은 기간 종사자 수는 4만 8284명에서 약 5분의 1인 9587명으로 감소했다.
근로여건 개선할 생각 않고 취업자 내라는 정부
정부는 갈수록 제화 인력이 줄어드는 추세에 대응해 '제화아카데미'라는 무료 훈련기관을 설립하기도 했으나 4개월이라는 짧은 교육 기간, 제화업계의 열악한 처우 등으로 인해 젊은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화아카데미 강사 박규상(49)씨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적어도 4대 보험은 보장되어야 사람들이 취직할 텐데 노동환경 개선할 생각을 안 하고 무조건 취업자를 내라고 하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갈수록 나빠지는 근로 여건을 개선해 보려고 제화 노동자들이 뭉치기도 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지난 2000년 여러 백화점 브랜드들이 하청으로 일하는 제화원들에게 사업자등록증을 요구했을 때 '미소페'를 만드는 비경통상(제조업체)을 상대로 제화노조가 파업을 벌인 일이 있다. 노조는 일단 임금인상, 4대보험 보장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미소페는 그 후 본사공장을 없애버리고 전량 하청업체에 일을 주어 소용없게 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브랜드 '소다'를 상대로 한 노조 파업도 있었다. 하지만 소다 측이 30% 임금인상을 약속한 뒤 제화원들은 노조를 탈퇴했다.
"구두일 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권리를 찾아야 하는데, 일한 만큼 돈 받는 도급쟁이라 노조의 힘이 약해요."
제화강사 박씨의 말이다.
"앞으로 우리가 신는 신발 모두 중국에서 수입해올지 몰라요. 일하는 사람들 나이가 점점 많아지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다간 제화산업의 맥이 끊길 거예요."제화산업협회 사무국장 이용희씨는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 제화원의 맥이 곧 끊겨서 산업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이들은 사업자등록을 강요당하고 4대 보험에서 소외된 다수 제화원들이 실질적인 노동자 지위를 인정받고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또 과도한 백화점 수수료나 지나치게 낮은 하청 단가 등 대기업들의 횡포를 바로잡아 제화원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부에서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않아요. 노동부는 우리가 근로자도 아니고 사업자라고 볼 수도 없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편들기에는 기업들 눈치가 보이니까 그러는 거겠죠."산재를 당해도 노동부조차 도와주지 않고, 법원에 호소해도 형식적인 법적용으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이 사무국장은 "노동부가 제대로 된 실태조사를 하고 제화원들의 근로여건 개선을 도와주어야 최고의 손재주를 가진 우리 제화원들이 대기업의 횡포 속에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이 만든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 함께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