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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는 낸시랭.
 인터뷰하는 낸시랭.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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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티스트 낸시랭. 말이 근사해 아티스트지 '장례식장에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무개념', '대놓고 명품을 밝히는 된장녀', '예술이랍시고 노출을 일삼고', '고양이 인형을 늘 어깨에 매고 다니는 4차원'으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현존하는 아티스트 중 가장 많은 '안티' 세력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예계와 미술계를 넘나드는 행보로 백남준의 대를 잇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행위 예술가로 불리기도 하는 그를 만나보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날은 뜻밖에도 대기업 직원들을 상대로 특강을 한 날이었다. 5월 27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 포스코ICT에서 낸시랭을 만났다.

- 강의할 때도 그 고양이를 어깨에 메고 했나?
"24시간 늘 나와 동행은 하지만 강의할 때는 강단에 잠시 놓고 한다. 옷에 고정돼 있는 게 아니어서 떨어지면 줍고 하느라 강의 흐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술 마실 때와 쇼핑할 때는 아예 차에 두고 내린다. 떨어뜨려도 얘는 울어댈 수 없으니 잃어버리기 십상에 너도나도 만져서 때가 타버리기 때문이다. 울 샴푸로 정성스레 손빨래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세탁기로 탈수를 하다 보면 털이 점점 줄어드니 어쩔 수 없다. 하하."

교수 되려고 줄 서는 것 싫어서 팝아트의 길로

- 대기업 강의는 어떤 주제로 하나?
"내가 쓴 책을 소재로 강의한다. 젊은 계층에겐 최근의 자서전 <난 실행할 거야>를 토대로 도전과 열정적인 삶에 대해, 부장, 임원급에게는 <아티스트 낸시랭의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로 미술 작품을 통한 예술감성을 얘기한다. 그리고 내 강의를 줄여서라도 질의응답 시간을 꼭 갖는다.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 되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질문한다고 손을 들면 일으켜 세워서 일일이 박수로 격려해주고 나서 질문을 받는다. 한국 사회에서 손들고 나선다는 자체가 꽤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강의한 회사 담당자가 말하길 이렇게 질문이 많이 나온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젊은 사원이나 나이든 임원이나 꼭 나오는 질문이 있다. '팝아티스트라는 건 뭐 하는 직업이냐?', '고양이는 왜 메고 다니냐?'고 묻는다."

대기업 사원들에게 열강하는 낸시랭.
 대기업 사원들에게 열강하는 낸시랭.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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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지만 나 역시도 준비했던 질문이었으니 한 번 더 부탁해도 되나?
"큰 맘먹고 고양이를 입양했다가 며칠 만에 편찮으신 어머님 때문에 포기해서 미안한 맘이
늘 있었는데, 일본에서 우연히 고양이 인형을 파는 숍을 발견하고 샀다. 인형이지만 페르시안, 샴 고양이 등 혈통이 좋은 고양이와 길고양이가 따로 있던데 측은한 맘이 들어 잡종 길고양이를 골랐다.

대중음악을 팝송이라 하듯이 팝아트는 'Popular Art' 즉, 대중적인 예술을 말한다. 팝아트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홍대 서양학과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우리나라 미술계가 워낙 보수적이거니와 교수가 되기 위해 조교를 하고 줄을 서고 하는 것이 싫었고, 그때의 미술계는 실험적인 시니컬한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뭔가 앞서나가는 분위기였다. 그냥 쉽게 말해,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하다 보니 팝아트 장르에 들어가게 된 거다."

- '정치 하고 싶다'고 한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성향은 진보인가 보수인가?
"정치인이 되어야겠다는 말은 한 적은 있다. 초중고생 5명 중 3명이 장차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라는 통계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나라도 정치를 해야 할 지경'이라고 했던 거다. 과학, 경제, 공공, 예술 등 사회 각 분야가 균형 있게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는 얘기다. 연예인을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니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압구정동에서 살았다고 보수, 사회적 통념을 깨는 작품을 한다고 해서 진보라고 단정할 이유도 없다.

분명한 건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거다. 내 분야인 예술에 대해서만 언급하자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미술관, 박물관 다녀와서 감상문 쓰라고 하는 걸로 예술 감성이 길러질 수 없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다녀야 한다.

한국 사회가 먹고살기 바빠서 그렇다고 하지만 선진국도 각박하긴 마찬가지다. 못사는 후진국에서도 예술 감성은 우리나라보다 높은 경우가 많다. 문제는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이다. 그게 곧 가치관이고 국민 수준이다."

강의 후 질문을 받을 땐 고양이가 어깨에 올라가 있다.
 강의 후 질문을 받을 땐 고양이가 어깨에 올라가 있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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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1%에게만 선택받기 바라는 게 순수미술인가?"

- 영국에서 '거지여왕 퍼포먼스'를 하면서 '낸시랭왕국'을 건설하려 한다며 땅을 좀 기부하라고 했다. 설명을 좀 해달라.
"여왕한테는 권위와 존엄이 있다면 거지에게는 자유와 그리움이 있다. 거지는 잃어버릴 게 없으니 용감하다. 아티스트는 거지랑 같다. 낸시랭왕국이라는 건 물리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내 작품세계를 의미한다.

계급도 착취도 없고 억압도 없는 국가. 국가가 개인을 조종하지 않고, 개인과 국가가 동등하고 동격인 국가. 또 개인이 작품이 되어 완성되고 전시되는 순간 업데이트가 끝나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면서 만들어지는 작품, 삶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개인이 곧 국가. 이것이 '거지여왕- U.K.프로젝트'의 메인 콘셉트이다."

- 아무리 작품이라고는 해도 대중 앞에 비키니만 입고 서는 건 좀 자극적이다. 왜 그런 노출로 작품을 구성하는지 설명을 좀 해달라.
"나는 콘셉트를 가지고 내 작품을 표현해 나가는데, 사람들은 내가 아티스트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 보다. 2004년 예술의전당 SFAF(서울파인아트페스티벌)에서 벌인 퍼포먼스가 좋은 예다.

'You Lost!'란 제목으로 변태 '바바리맨'이 여고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있다가 속에 입은 비키니를 드러낸다. 이후 온갖 미디어 패션, 미술 매거진과 신문매체로 된 포장을 찢어 날려버리면 거기엔 노래방 기계가 나타나고, 내가 <보랏빛향기> 노래를 신나게 열창하고 끝나는 퍼포먼스다. 

여자 관람객들은 박수치고 핸드폰, 디카로 사진을 찍어대며 신나게 웃고 깔깔거리는 반면 남자 관객들 반응은 달랐다. 핸드폰 받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남자들일수록 밤에 룸살롱 가서는 더 변태처럼 군다.

그런 욕망을 감추고 애써 고상한 척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야, 넌 졌어. 진 거야. 넌 나한테 넘어왔어. 하하.' 근엄하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들일수록 거짓이고 껍데기인 경우가 많다. 고상한 척, 많이 아는 척해도 속마음은, 본능은 다 똑같다.

순수미술을 팔아먹는다는 비난에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순수미술이야말로 더 순수하지 않다. 대한민국 상위 1%에게 평가받고 선택받기를 바라는 게 순수미술이라면 난 차라리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 싶다."

낸시랭의 거침없는 강의에 직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낸시랭의 거침없는 강의에 직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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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재단' 만들어 서울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 늘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인데, 슬럼프가 있었다면 언제였고 어떻게 극복했나?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선물로 받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다가 몰락해서도 피나는 노력으로 매년 개인 전시회를 해오고 있다. 하지만 무남독녀외동딸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의 삶을 살다가, 갑자기 가장의 입장에 서게 되어 예술에 대한 꿈과 현실적인 삶 사이에서 고뇌했다.

대학원 졸업 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는 무려 17년 동안 암 투병을 하시다가 2009년에 결국 천국에 가셨다. 졸지에 고아가 돼버렸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실패, 고통, 시련을 통해 더 큰 성공을 준비하고 꿈꾸게 된다. 실패하면 더 큰 좋은 걸 주시려나 보다 하고 감사하며 산다."

-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 꿈은 내가 하는 일 즉, 팝아트를 통해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와 명성을 얻어 낸시랭재단을 설립해서 서울을 런던이나 뉴욕처럼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드는 것이다. 낸시랭왕국의 건설을 지켜봐달라."

낸시랭 강의는 거침 없으면서도 논리적이었다.
 낸시랭 강의는 거침 없으면서도 논리적이었다.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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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비친 천박한 '4차원' 콘셉트가 그녀의 전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은 그녀의 자서전 <난 실행할 거야>를 통해서였다. 고 안재환씨의 장례식장에 개념 없는 옷을 입고 왔다고 비난을 받았던 날은, 서울시 홍보행사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 홍보 메인 컬러인 주황색의 긴팔 스웨터에 긴 흰바지 차림으로 들렀던 것이지 일부러 튀어 보이려고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본 낸시랭은 예상보다 더 차분했고 논리적이었지만 대단한 열정이 느껴졌다.

요즘 그녀는 미술계가 좋아하는 클래식한 기법의, 그러나 여전히 낸시랭다운 팝아트의 콘셉트와 철학을 담은 페인팅 13점을 그리고 있고, 팝아트와 대중음악의 콜라보레이션(협업) 작업에 도전해보고자 가수 이파니와 듀엣 앨범을 기획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들의 고민과 현주소에 관한 에세이식 소설이 곧 출판될 예정이라는 그녀의 실행력과 에너지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씩씩하고 당당한 면모만을 보였던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비칠 땐 영락없는 소녀였다. 그러면서도 카메라 앞에서의 포즈는, 고리타분한 인터뷰를 하느라 힘들었다는 말을 대신하듯 거침없고 대담했다.

'안티 종결자' 낸시랭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눈에 낯선 사람이라고, 게다가 내 패거리와 비슷하지 않다고 일단 돌팔매질을 하기보다는 다양함과 도전정신을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터뷰 마치고 기자와 포즈를 취한 낸시랭.
 인터뷰 마치고 기자와 포즈를 취한 낸시랭.
ⓒ 이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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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낸시랭, #팝아티스트, #이파니, #이충섭,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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