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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종로에는 화교 거리가 있다. 이곳은 화교 소학교, 화교 협회가 있는 중국인 거리다. 또한 화교 음식점들이 오랜 세월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제법 맛있다고 알려진 화교 음식점들은 낡고 허름하지만 그 나름의 노하우로 대구지역 맛집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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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 음식점의 우동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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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 음식점의 우동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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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만두로 유명한 화교 음식점에 들른 할머니들은 고기가 두툼하게 씹히는 만두를 베어물며 화교 주인과 옛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돌아나설 때도 못내 아쉬운 듯 공갈빵을 몇 꾸러미씩 사가지고 나간다. 설탕이 덜 녹아서 덩이째 버석버석 씹히지만, 음식이란 맛으로만 먹는 게 아니라 그 시절 추억도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기에 그들은 일요일이면 손주들 손을 잡고 대구 종로 화교 거리를 오간다.

대구에 화교가 처음 정착한 것은 1905년 부터다. 근대에 들어서 대구읍성이 무너지자 성밖과 성안의 경계가 사라졌고, 이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서 화교들의 성장에도 한몫을 하게 된 것이다.

읍성 북쪽의 북성로에는 일본 상권이 형성됐고, 종을 치던 누각이 있던 종로 쪽에는 중국 상인들이 터를 잡았다. 주로 중국 음식점을 경영하던 그들은 배화(排華)사건, 중일전쟁 등 정치적 사건의 여파로 잠시 쇠퇴하기도 했지만 1960년대까지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대구 종로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 시기 화교들이 대구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는 건축 기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계산성당, 성모당, 대구 화교협회 등의 종교 건축물을 주로 지었던 중국인들은 벽돌과 석공 기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성실함까지 인정받았다.

해방 이후에 그들의 경제력은 더욱 급속도로 확장된다. 미 군정의 우대를 받아 키운 경제력의 토대 위에 한국전쟁 때 서울과 인천의 화교들이 대거 대구로 내려온 데 따라 그들의 입지도 더불어서 넓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1970년대를 지나면서 화교 자본에 대한 국내 규제가 심해지면서 대다수 화교들이 대만, 미국, 호주 등지로 대거 이주했다. 화교들이 운영하던 양조장과 주물공장 등도 이와 더불어서 자취를 감췄고, 중국식당도 거의 사라졌다. 현재 대구 종로에는 3곳의 화교 음식점만 영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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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화교소학교의 장제스 동상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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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구에 남아있는 화교들은 자녀 교육에 성심을 다하고 지역에 봉사하고 있다. 화교 소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이 학교 4학년 여학생은 낯선 사람에게도 깍듯이 인사하며 학교 안내를 해준다. '중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잊지 말라'는 글이 새겨진 장개석 동상에는 학생들의 마음을 담은 꽃이 항상 놓여 있다.


태그:#대구 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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