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들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20세기 끝자락부터 출판계에서는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고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군부독재정권 횡포와 민주화투쟁, 유월항쟁 등으로 사회가 몹시 시끄러웠던 지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시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시쳇말로 '시는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다.
지난해 종합베스트셀러만 보아도 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다. 지난해 종합베스트셀러 10위 안에는 모두 소설과 자기계발서가 차지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서점별 종합베스트셀러를 아무리 눈을 새롭게 씻고 살펴보아도 20위 안에 든 시집은 한 권도 없다. 그래도 시집은 자꾸만 쏟아져 나온다.
서점가를 찾으면 진열대에 놓인 시집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난 12월에서 올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글쓴이가 받은 시집만 해도 30여 권이 넘는다. 시인이 참 많은 나라, 출판계 오랜 허덕임에도 끄떡 않고 시집이 많이 나오는 나라, 그 나라는 참 좋은 세상으로 가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 아니겠는가.
책장에 쌓인 따끈따끈한 새 시집과 좀 지나 먼지를 살짝 뒤집어 쓴 시집 가운데 세 권을 골라 읽는다. 시인 이은봉이 펴낸 여덟 번째 시집 <첫눈 아침>과 시인 이규배가 14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 <아픈 곳마다 꽃이 피고>, '교육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라고 쐐기를 박는 시인 신호현이 펴낸 <선생님은 너희를 사랑한단다>가 그것들이다.
시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 쓰는 물음표 첫눈 아침, 바윗돌처럼 단단한 한기 품고시리게 얼어붙은 웅덩이 속 헤매고 있다아침 첫눈, 하얗게 번져오는 햇살 품고 막 눈 뜨는 시냇가 버들개지 위 떠돌고 있다너무 추워 큰 귀때기 쫑긋대는 산노루의 걸음으로첫눈 아침은 내일 아침에나 온다 -'첫눈 아침' 몇 토막
이은봉(58) 시인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 곳곳에서는 온통 물음표가 툭툭 튀어나와 아지랑이 춤을 한바탕 추다가 어느 순간 느낌표가 된다. 이 말은 곧 시인은 늘 물음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주무르는 사람이며, 그 시인이 쓴 시는 곧 느낌표가 되어 이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이은봉 시인이 펴낸 여덟 번째 시집 <첫눈 아침>(푸른 사상)은 물음표를 마음에 품은 시인이 우리네 삶과 자연이 애타게 부르는 말에 메아리로 부드럽게 답한다. 제4부에 실려 있는 '떠돌이의 밤' '아버지' '달빛들' '사금파리' '무궁화는 국화다' '항구의 사내' '쨔샤, 시라는 놈' '가시고기' '주둥이 꽉 다문 시' 등 72편이 그 시편들이다.
이은봉 시인은 이 시집 뒤에 실은 '시인의 시론-풍경과 존재의 변증법'에서 "시는 질문이 많은 사람의 산물"이라고 꼬집는다. 그는 "질문이 많은 사람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다. 시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의 산물"이라며 "호기심의 대상은 물론 시인 자신과 세상이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렇다. 시인이 바라보는 시는 "항상 피곤과 함께 온다 한 줌의 에너지마저 죄 소진된 시간에 온다 몽롱한 가슴 뚫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혼돈의 마음을 밟고 오는 쨔샤, 시라는 놈! 저도 많이 외로워 수시로 온몸 떨"(쨔샤, 시라는 놈)면서 이 세상 "온갖 고독"을, "비애를 거느리고" 시인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시는 그리하여 물음표 곳곳에 느낌표를 치렁치렁 건다.
시인 이은봉 새 시집 <첫눈 아침>은 머지않아 회갑을 앞둔 시인이 우리네 삶과 이 세상에 거는 물음표이자 우리네 삶과 이 세상이 시인 마음에 주렁주렁 매다는 물음표다. 시인은 마음 곳곳에 피데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이 수많은 물음표를 갈고 닦아 마침내 '참다운 삶'과 '참다운 세상'으로 가는 느낌표를 쓴다.
시인 이은봉(광주대 문창과 교수)은 1953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83년 <삶의 문학> 제5집에 평론을 발표했으며,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가 있다. 계간 <시와시> 주간. 한성기 문학상, 유심 작품상 받았다.
'날것' 그대로 14년 만에 문학동네로 나선 시 너는 무슨 의지로 거기 홀로이 죽어 있느냐?-'마당에서 날이 새도록 혼자 술을 마시다가 잔에 빠진 수컷 모기를 본 여름새벽' 모두
그대는 시보다 제목이 더 긴 시를 읽은 때가 있는가. 여기 14년 만에 '날것'그대로인 시를 세 번째 시집이란 가마니에 담아 문학동네로 나선 시인이 있다. 시인 이규배가 그다. 그를 오래 만난 시인들은 그가 쓴 시에 대해 두말 없이 "낭만으로 덧칠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라고 곱씹는다. 그가 쓰는 시는 액세서리를 달거나 화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 이규배가 펴낸 세 번째 시집 <아픈 곳마다 꽃이 피고>(동랑커뮤니케이션즈)는 아픈 곳마다 피가 나거나 피멍이 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나무를 위하여' '숟가락과 할머니' '별산정묘지음'(別山頂墓地吟) 연작 13편, '파꽃' '겨울, 목포에 갔다' 등 60편 곳곳에도 시퍼런 칼날처럼 우리들 삶이란 살점을 찌르고 베는 이 세상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이규배 시인은 이번 시집 '자서'에서 "빙벽(氷壁)은 / 죽음과 맞서고 있다 / 잔설(殘雪)이 눈을 뜬다 / 얼어가는 숲에게 / 월광(月光)이 속살거린다 / 눈을 떠다오 바람아"라고 곡을 한다. 그 곡소리는 이 세상과 삼라만상에게 내뱉는 속울음이자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이 세상살이에게 때리는 호된 방망이질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아프다. '울음 타는 강'(시인 박재삼 시 제목)이 출렁인다. 그는 텃밭에서 피어나는 파꽃에서도 "할머니 임종하는 숨 찬 / 소리"를 듣는다. "마지막 죽 몇 술 넘기고 / 어린 손자 등을 쓸며 / 눈곱을 적시던 할머니"를 떠올린다. "껍질만 남은 가슴 속 / 가릉... 가릉 숨차던 소리"(파꽃)가 가슴을 후벼 판다.
시인 이규배 새 시집 <아픈 곳마다 꽃이 피고>는 세월을 거슬러 오른 시인 삶이 고스란히 녹아내린다. 아프고 따뜻했던 어린 때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 학창시절 품었던 꿈과 믿음 등을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빗댄다. "껍질을 깨고 나와 / 행복이 / 날갯짓을 하는 시간이 올 것"(홀린 것처럼)처럼 그렇게.
시인 이규배는 1964년 전북 익산군 여산에서 태어나 1988년 시 동인지 <80년대> 2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창작과비평> <한길문학> <사상문예운동> 등에 시를 발표했다. 시집으로 <투명한 슬픔> <비가를 위하여>가 있다.
사랑 뿌린 텃밭에 더 큰 사랑 열린다아이들은 그대로가 금쪽 텃밭 인사를 심으면 열 배의 인사가 자라고 사랑을 심으면 백 배의 사랑이 열리는 노래의 씨 뿌리면 아름다운 성악가로 자라고 웃음을 던져 주면 웃음꾼 되어 찾아온다 -'아이들' 몇 토막
그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원시인'이라고 불리는 시인 신호현. 여기서 말하는 원시인은 진짜 '원시인'이기도 하고 '원래 시를 쓰는 시인', '고향'이란 뜻도 숨겨져 있다. 옛말에 "뿌린대로 거둔다"고 했듯이 시인 신호현은 스스로 가르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스스로 삶에게도 뿌린 그대로 거둔다는 '깊은 믿음'이란 씨앗을 뿌린다.
'아이들'이란 시도 마찬가지다. 그가 "인사를 심으면 / 열 배의 인사가 자라고 / 사랑을 심으면 백 배의 사랑이 열"린다는 시를 쓰는 것도 뿌린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시인 신호현이 펴낸 네 번째 시집 <선생님은 너희를 사랑한단다>(모아드림)를 펼치면 이 시집 텃밭 곳곳에 '학생 사랑'이 싹트고 있다. '수업을 들어가며' '사랑 편지' '묵비' '가지치기' '기억' 등 104편이 그것.
"아이들을 끊임없이 사랑할 것"이라는 신호현 시인. 그는 시인의 말에서 "아이들이 붙여준 원시인이라는 별명이 갈수록 정감이 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원시인은 뭘까. "오래전부터 시는 원시인의 고향"이며 "시로 서로의 만남을 기뻐하고 나누며 시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원시인'과 같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주는 법을 안다. 그는 "비록 땅은 척박하나 / 우린 작은 씨 뿌리고 / 비록 바다에 태풍 부나 / 우린 작은 그물"을 던진다. 왜? "목마름이 너희 거름되고 / 흔들림이 너희 생명 되어 / 밤새워 아무도 모르게 /큰 열매로 자라는 너희"(너희들만이 희망이다)이기 때문이다.
시인 신호현이 펴낸 새 시집 <선생님은 너희를 사랑한단다>는 스스로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바치는 지독한 사랑이다. 시인에게 시와 아이들은 같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더 큰 스승이다. 사랑주기를 아낄 수 없는 피붙이 같은 제자다. 시인이 시와 아이들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까닭도 서로 이 세상을 거칠게 할퀴는 바람막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 신호현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서울 배화여중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며 시를 쓰는 선생님이다. 시집으로 <너희가 머물다 떠난 곳에 남겨진 그리움> <지하철 연가> <아가야! 사랑해> 등이 있으며, 서울시 인정교과서 <독서와 논술> <중학 논술> 등을 펴냈다. '구룡문학상 대상' '강남문학상 대상'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