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듯 옛 건물이 많은 대구 '진골목'. 그 초입에 작은 일본 분식점이 하나 있다. 1953년 시아버지가 일본에서 연 가게의 이념을 이어받아 그 며느리가 몇 년 전에 장사를 시작한 곳이다. 간판에는 분식점이라 돼 있는데 웬 노인 손님들이 이렇게 많을까 싶다. 이곳은 여고 앞 분식점 같은 곳이 아니다. 아는 사람만 찾아드는 이 가게는 전통 일본식이라기엔 다소 가볍고, 완전 분식이라기엔 조금 묵직한 음식이 나온다.
주력 메뉴는 간장으로 맛을 낸 시나면, 된장으로 맛을 낸 미소면, 여름날의 메밀소바, 손으로 직접 두드린 옛날식 돈까스 등이다. 그중 가장 특이하고 요즘 계절에도 잘 맞는 메뉴로는 '스모노'라는 것이 있다.
'초무침'이란 뜻의 일본 여름 음식인데, 돼지고개 냉채, 얇게 썬 오이와 양파를 겨자에다 섞어 버무려낸 것이다. 톡 쏘는 화한 느낌은 홍어회에 비할 만하고 입에서 부드럽게 감기는 고기 장육은 촉촉함을 잃지 않는다. 첫 맛은 달큼하다가 차츰 코로 치고올라오는 겨자의 알싸한 향에 코가 뻥 뚫린다. 술안주로 좋아서 주당들이 많이 찾는 메뉴기도 하다.
사실 이곳의 오밀조밀한 현대식 스모노는 최근에 좀더 알려진 것이고, 몇 년 전만 해도 그 일인자가 따로 있었다. 향촌동 목로주점 '할매집'이 바로 그곳이었다. 소머릿고기를 넣어서 진득하고 터프한 비쥬얼을 자랑하는 할매 스모노는 늙고 귀멀어서 손님의 주문도 제대로 받을 수 없던 이월분 할머니의 인생이 어우러진 음식이었다(현재는 폐업을 해서 그 강렬한 비주얼을 사진으로 남길 수 없음이 아쉬울 뿐).
식민지 시절, 할머니는 권씨 성을 가진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태평양전쟁 때 남편이 일본으로 건너갈 때 할머니도 따라가서, 그곳 식당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스모노를 배워왔다.
향촌동에 있던 전국 최초의 음악감상실 '녹향' 아랫층에 터를 잡은 할머니는 예술가들과 울고 웃으며 한 시절을 보냈다 한다. 가게는 피난 온 예술가들이 술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시국을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소였다. 외상 술을 주고 받지 못한 돈도 부지기수였지만 그 또한 사람 사는 정이 아닐런가 하면서 말이다.
2년 전까지 이월분 할머니는 막걸리 한 주전자와 스모노, 각종 해물과 고기 양배추 말이와 오뎅이 들어간 오뎅탕을 술꾼들에게 차려주며 향촌동의 한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 술 더 좀!" 하고 불러도 노년으로 귀가 조금 멀어 있던 할머니는 그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묵묵히 주방일을 하면 손님들이 셀프로 가져와야 했다고.
할머니의 가게는 이제 없다. 삶은 소머릿고기의 근육과 살코기가 적당히 어우러지게 동강동강 썰어서 미역, 양파와 함께 겨자 소스를 듬뿍 섞어 무쳐내는 할머니표 스모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할머니가 떠나간 빈 골목을 오늘도 헤맨다.
그 맛을 못 잊어 진골목 인근에서 비슷한 메뉴를 내놓는 집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백고동, 삶은 문어, 오징어, 조갯살 등으로 해물 스모노를 만드는 집도 있지만, 할매집의 꼬들한 소머릿고기와 미역이 줄줄 딸려 올라오는 스모노에는 비길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대다수의 이야기. 그건 음식 속에 배어 있는 '이야기'라는 또 하나의 조미료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