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달이나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자. 굳이 인간이 지구를 떠나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 가서 살 필요가 있을까.
지구의 환경이 극단적으로 나빠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핵전쟁 비슷한게 터지거나 자원이 고갈되는 경우, 또는 환경오염이 너무 심해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경우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다른 행성을 개발해서 사람이 살기 적합한 곳으로 바꿔두어야 한다. 중력이나 자전주기, 공전주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이질감은 개개인이 적응할 문제라고 치더라도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람이 살기에 충분한 물과 산소가 공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들을 전부 해결해서 한 행성을 거주공간으로 바꾸려면 엄청난 기술과 자본이 동원되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가까운 미래에도 힘들 것이다.
인간의 거주공간으로 변한 화성미국의 SF 작가 필립 K. 딕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해소해버렸다. 화성에는 원래 물과 산소가 있었다고 가정해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서 원주민 그러니까 외계생명체도 화성에서 살고 있다. 직립보행을 하며 인간과 대화도 할 수 있는 지적생명체도 있는데 인간은 이들을 가리켜서 '블리크맨'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냥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가서 뚝딱거리며 집을 짓고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화성의 타임슬립>의 시간적배경은 1994년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것이 1965년이니까 작가는 그로부터 30년 후에 인간이 화성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작품 속에서 인간은 화성에 도시같은 공간을 만들어서 살아간다. 슈퍼마켓과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다.
모양은 사마귀를 닮았고 덩치가 당나귀만한 화성곤충을 애완동물 삼아서 키우는 사람도 있다. 식량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지만 원래 세상은 원칙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구에서 갖가지 음식을 수입해온다. 훈제 개구리다리 통조림, 바다거북 수프 통조림, 캥거루꼬리 수프 통조림 등이 그런 음식들이다.
인간이 화성에서 살게 된 이유는, 지구에 인구가 너무 많아진데다가 수소폭탄 실험 등으로 환경이 아주 나빠졌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도 화성으로의 이주를 적극 권장한다. 지구에서는 학위를 가지고 있어도 취직하기가 힘들지만 화성에서는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공기가 좋아서 건강도 챙길 수 있다.
주인공인 잭 불렌도 이런 이점 때문에 10여 년 전에 화성으로 이주했다. 결혼해서 부인과 아들이 있는 잭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기계수리 기사로 근무한다. 단조롭던 그의 생활은 두 가지 일로 인해서 조금씩 변한다. 지구에 있는 아버지가 화성에 있는 산맥 일부를 구입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한다는 것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땅을 왜 사려는 것인지 잭으로서는 이해가 안된다.
또 한 가지는 근무 중에 우연히 화성의 수자원노동조합장인 어니 코트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화성에도 권력을 탐내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어니 코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화성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으로 경찰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어니 코트는 무슨 이유인지 잭에게 정신장애아동들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라고 부탁한다. 이때부터 잭의 균형감각과 정신세계가 조금씩 무너져가기 시작한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등장인물들작가인 필립 K. 딕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의 원작자로도 유명하다. 이 두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자신의 기억과 정체성을 놓고 혼란스러워 한다. 이런 점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임슬립'이란 일종의 시간여행을 의미한다. 등장인물은 자기가 있는 곳이 현실세계가 아니라 정신분열증 환자의 환상 속이라고 생각한다.
SF지만 변화된 미래나 과학기술보다도 인간의 정체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이런 작풍(作風)은 작가의 이력과 연관있을 것이다. 작가도 살면서 다양한 우울증과 망상증에 시달렸으며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정신분열증과 자폐증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무대는 화성이지만 그런 일들이 현실의 지구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SF에서도 역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과 정신세계다. 필립 K. 딕은 진작에 그것을 간파했던 건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지음 /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