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금요일 중학교 일학년 아이가 학교에서 시낭송회를 한다고 하여 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영어를 담당하시는 메이휴(Mr. Mayhew) 선생님 교실은 시낭송회를 위해서 교실이 카페로 바뀌었습니다. 이 삼 주 전부터 아이들은 시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써야하며 좋은 시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선생님 설명도 듣고, 자료도 찾아보았습니다.
그 동안 배운 시 수업의 마지막 과정으로 부모님들을 모시고 부모님 앞에서 시를 낭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소개해준 시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를 한 편씩 골라서 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제목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시 낭송이 끝나고 학생들은 각자 자신이 만든 그림 시집을 가지고 와서 부모님들께 시 제목을 선택한 이유와 내용 등을 설명합니다.
시는 논리적이지도 않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만이 가진 고유한 표현과 수사법이 있습니다. 은유법이 그것입니다. 사람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사물과 인간을 둘러싼 모든 삼라만상이 사람처럼 살아있고 각각 영혼과 인격이 있습니다. 시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삼라만상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더불어 교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과정을 표현한 것이 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경제 원리에 빠져있고, 경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원리와 경쟁은 가장 중요한 삶의 수단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류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자연과 경쟁할 수도 없고, 자연을 경제 원리로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 사용하는 공기의 양을 재거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은 자연 재해 앞에 한없이 무기력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든다고 해도 몇 시간 살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의 목숨을 만들 수 있는 재주는 아직 없습니다.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의 값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호흡하고 같이 살아가는 시인의 삶이 아닌가 합니다. 자연이 늘 사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시 제목으로 변화되고 사람과 호흡을 나누면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자연과 사람이 같이 살아있게 됩니다. 시인은 자연물에 이름을 붙여주어 자연물이 살아나게 만듭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문학 작품으로 표현된 언어는 사물을 자연 속에 방치시키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집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존재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시를 배운 어린이들이 경쟁이나 경제뿐만이 아닌 또 다른 세계, 감성과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값진 정서와 감성의 가치를 인정했으면 합니다.
<참고문헌> - 김진국, 문학현상학의 이론과 실제, 도서출판 진명, 1979.
- 가나디안 아카데미,
http://www.canacad.ac.jp/page.cfm?sitechoice=0&p=1 덧붙이는 글 | 박현국 기자는 류코쿠(Ryukoku, 龍谷) 대학에서 주로 한국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