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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을 흔드는 옷가게. 스톤타운에 자리 잡은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 옷가게 여심을 흔드는 옷가게. 스톤타운에 자리 잡은 이 곳도 예외는 아니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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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스톤타운은 노예무역이 흥했던 역사와 시간의 면면한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그만큼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와 볼거리가 많아 쇼핑의 손길을 기다리는 물풀들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그 중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자들의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옷가게!

스톤타운에서 눙귀 비치로 떠나기 전부터, 골목골목을 누비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힐끗거리며 치마가 걸치고 싶던 나였다. 허름한 카고바지와 새로울 것 없는 티셔츠에 물리기도 했을 뿐더러 비치웨어의 편리성과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갖춘 것이 바로 롱 드레스였기 때문이다.

잔지바르를 떠나던 날, 배 시간은 밤 11시 정도였으므로 스톤타운에 도착한 낮부터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가게 앞을 지나던 중, 밖에서만 보던 그 옷가게로 들어갔다. 쓸데없는 쇼핑을 하지 않기로 한 긴축재정 상태였기 때문에, 얼마냐고 물었던 내 질문에 돌아온 30달러라는 가격은 꽤 비싸게 느껴졌다. 

"이거 입어봐도 되나요?"
"아, 그럼요. 저쪽에서 입으세요."

독특한 탄자니아의 느낌 그대로를 살린 옷들을 진열해놓은 옷가게
▲ 옷가게 독특한 탄자니아의 느낌 그대로를 살린 옷들을 진열해놓은 옷가게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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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에 있던 사람은 말쑥하게 빼 입은 젊은 남자였다. '살까말까, 내가 미쳤지 지금 무슨 옷을 사겠다고 30달러씩이나. 아니야 이거 하나 사면 기분전환은 최고일 텐데… ' 등등의 혼잣말을 뇌까리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예뻤다. 노란색의 롱 드레스는 한국에서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내 가방에 넣었겠지만, 난 여행자였고 30달러면 길 위의 나에겐 꽤나 큰 지출이어서 단념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 대륙 위에서부터 내려오며 걸리는 기간이 점점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른스러운 처신이 필요했다.

야외 갤러리겸 그림을 파는 상점.눙귀비치.
▲ 그림 사세요. 야외 갤러리겸 그림을 파는 상점.눙귀비치.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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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그 남자는 아까부터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때요? 옷은 예쁜데 제 스타일은 아니네요."

분위기가 머쓱해서 한마디 던지자 남자는 천천히 운을 뗐다.

"지금... 제 마음속에 어떤 일이 생겼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일몰을 보기 위해 적당한 포인트로 유명한 까페는 늘 오후시간이 붐빈다.
▲ 일몰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일몰을 보기 위해 적당한 포인트로 유명한 까페는 늘 오후시간이 붐빈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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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습게도 남자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사랑, 참 편리하게도 오는군요. 그런 말 여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좀 더 시간을 갖은 다음에 얘기해야 먹힐 거예요."

웃으며 그에게 건넨 농담 겸 충고는 전달이 된 듯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우습게 들릴거라는 걸 나도 알아요. 그런데 나에게 일어났어요. 이미. 그걸 어떻게 제가 이해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잔지바르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문화처럼 인종도 여느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이다.
▲ 스톤타운에서 만난 아기. 잔지바르에 남아있는 이슬람의 문화처럼 인종도 여느 아프리카와는 다른 느낌이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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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라는 말을 지금껏 들은 것보다, 최근 몇 개월간의 여정 동안 들은 횟수가 더 많은 것 같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표현 차이일 수도, 그냥 쿡 한번 찔러보는 것일 수도 있을 그 여러 번의 사랑들은 내가 조절하기에 그리 어려운 것들은 아니었다. 적당한 호의까지만 허용하고 선을 긋는 것은 서른이 훌쩍 넘은 내 나이에선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눈에 진심을 담고 있어서 인상적인 이 남자.

그 날 밤 배로 떠난다는 나의 말에 더 있다 가면 안되냐 한다. 안 된다는 내 대답에 그럼 나의 다음 행선지인 잠비아로 같이 여행하면 안 되겠냐는 부담스러운 제의를 했다. 결국 다르에살렘까지만 데려다 주겠다는 (밤에 승선하면 다르에살렘에는 새벽에 도착한다.) 제의까지 내가 모두 거절하고야 남자는 깨달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배 타는 곳으로 배웅 나오는 일뿐임을.

저렴한 가격의 Flying horse페리가 다르에살렘행 가격을 공시해놓고 있다.
▲ 잔지바르를 잇는 페리들 저렴한 가격의 Flying horse페리가 다르에살렘행 가격을 공시해놓고 있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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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사를 하고 배에 타던 내가 마지막으로 뒤돌아섰을 때 본 것은 놀랍게도 그 남자의 눈에서 나오고 있는 눈물이었다. 도저히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지만, 타인의 일로 흥미롭게 받아들였던 그 남자의 경험.

그 남자의 경험이 나에겐 선율의 스타카토 같은 생기로 다가온다.

'아, 카고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로도 아직 난 죽지 않았구나...' 정도의 생기.

동아프리카 철로의 허브 타자라 기차역.
▲ 타자라(TAZARA) 기차역 동아프리카 철로의 허브 타자라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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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2월 11일. 이른 오전의 다르에살렘에 도착하면서 배 안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혼자서 조용히 마음속으로 했던 기도였다.

'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좀 보내주시면 안될까요? 잠비아로 가기 위한 타자라(tazara)기차표 예매를 못했는데 지금 바로 가서 꼭 한 자리만 살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것이 저에겐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겁니다.'

당일 구매는 어렵다고 알고 있었고 잔지바르로 들어가기 전 예매를 해놓고 싶었으나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그냥 나와 버린 나였다.

이방인에게 기꺼이 권하는 잔지바르의 열대과일.
▲ 열대과일 이방인에게 기꺼이 권하는 잔지바르의 열대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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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못가면, 힘든 여정이라 익히 들어온 버스를 타거나 혹은 굳이 기차를 타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어떤 이유보다도 아프리카 대륙에서의 기차 종단은 꼭 해보고 싶었으므로 표에 대한 나의 마음은 꽤나 간절했다.

일찌감치 도착한 나보다 더 일찍 나와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 그 줄 중에 물어물어 나도 줄을 섰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창구의 문이 드디어 열린다. 드디어 내 차례. 깐깐하게 생긴 오피스 레이디가 안경 너머로 힐끗 보며 아침인사를 한다.

"아,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제가 혼자인데요. 혹시 잠비아 가는 티켓 살 수 있을까요?"(최대한 반갑게 웃으며. 웃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가는데요? 오늘이라구요? 당일은 어려운데... 흠... 잠깐 있어봐요."

탄자니아 전통 복식인 캉가와 키탱게(보자기에 프린트 된 문양에 따라 캉가와 키탱게로 나눈다)를 파는 곳.
▲ 옷감 팔아요 탄자니아 전통 복식인 캉가와 키탱게(보자기에 프린트 된 문양에 따라 캉가와 키탱게로 나눈다)를 파는 곳.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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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타고 싶다는 대답을 기대하지 못한 듯한 그녀의 대답에 ' 역시나 안 되는 것인가 ' 하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기다려 보라고 한 것이 어딘가. 잠시 장부를 휙휙 넘기던 그녀는 안경 너머로 날 보며 묻는다.

"몇 명이죠?"
"저 혼자예요!"

혼자가 좋을 때는 이런 때! 혼자이므로 이미 세 명이 들어찬 4칸짜리 일등석의 칸에 내 짐을 놓을 수 있게 되었고, 기꺼이 그 해의 이른 크리스마스 선물을 난 받은 셈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2009년 8월부터 2010년 1월까지의 총 6개월의 여정을 바탕으로 기고합니다. 외래어의 경우, 소리나는 대로 발음 표기하였습니다.



태그:#아프리카의 옷가게, #스톤타운의 드레스, #탄자니아에서 만난 사람, #아프리카 종단 여행, #아프리카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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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담은 사진에세이 [same same but Different]의 저자 박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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