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한낮의 더위는 이미 여름의 한복판에 있는 듯합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밖에서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지금 이 느낌 자체도 사치가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럽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며칠 전, 오랫만에 사촌형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모 아들로 어릴 적에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연락이 뜸해져 궁금하던 차에 전화가 와 매우 반갑게 인사를 나눈후 "어쩐 일이세요?"라고 물으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숙 사진 이메일로 보낼테니 잘 받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사진인데 뜬금없이 사진은 무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알았어요"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메일을 열어보니 그속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사진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이젠 머릿속에서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마음속에만 남으려 하는, 이 세상에 나란 존재가 있게 해 주신 분들의 모습을 정말 오랫만에 처음보는 사진으로 접한 순간의 묘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그만큼의 추억을 남겨주고 가신, 그래서 더욱 슬픈 아버지의 젊었을 적 사진을 보는 순간 뭐가 한방 맞은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었습니다.
여태껏 아버지와 내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런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누나들로부터 하는 행동이나 체형이 닮았다는 소리를 가끔 들은 적은 있지만 얼굴모습까지 닮았다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요.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가자 마자 아내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아내 역시 깜짝 놀라더군요. 피는 못속인다더니 똑같다고 그러더군요.
솔직히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2학년때, 할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때 돌아가셨으니 웬만한 기억들은 안고 있어야 하는데......
굳이 이유를 들자면 2남 4녀중 넷째로 위로는 형이 있어 장남도 아니고 밑으론 여동생 둘이 있어 막내도 아니어서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별 관심을 받지 못했고 두분의 사랑은 당연히 장남인 형과 막내 여동생에게 집중되었으니까요, 저 역시 그걸 당연히 받아들이고 놀기에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던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 기억속에 뚜렸히 남아있는 좋은 기억은 할아버지의 유별난 며느리 사랑입니다. 못난 자식(아버지)에게 시집 와 고생만 하는 며느리가 안스러워 항상 며느리 편이 되어 주었고 5일장날이 되면 어김없이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당신깨서 손수 다녀오셨습니다. 십리길이 넘는 길을 걸어 다녀와야 하는 길에 며느리를 보내기는 싫었던 것입니다. 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허리춤에서 몰래 사탕을 꺼내어 며느리 손에 쥐어 주셨던 정말 따뜻하고 부지런한 분이셨습니다. 물론 그 사탕은 어머니 손을 거쳐 자식들 입으로 들어갔지만, 지금도 어머니께서 할아버지 말씀을 하실때면 먼저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며느리 사랑이 대단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우리 6남매가 모이면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 니들이 지금 이 정도라도 사는 건 다 할아버지가 돌봐서라고.....
할머니는 부잣집에서 공주처럼 지내다 시집을 와서인지 바깥일을 하시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로 방안에 늘 같은 모습으로 앉아계시면서 뭔가 못마땅하신지 며느리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독히도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시집오기전처럼 여전히 공주였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학교에서 수업중에 소식을 듣고 교실을 나와 운동장을 달려가던 중 같은 반 여자친구가 "니네 할머니 죽었대" 하는 소리를 듣고 왜 버릇없이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고 죽었다고 하냐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씩씩거리며 돌아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슨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버지란 존재는 대부분 희생으로 대변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그늘에 가려 아픔이 먼저 떠오릅니다. 아버진, 집안은 거의 돌보지 않고 늘 밖으로만 떠돌았고 거의 매일을 술에 취해 있었으며 주사가 심해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면 도저히 창피해서 밖을 나갈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형들에겐 놀림감의 대상이 되고 가장 싫은 일은 술에 취한 아버지를 모셔오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가끔 어머니께서 동네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자식들 생각해서 정신좀 차리라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이라도 할라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지혜로운, 사랑과 존경의 대상인 어머니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다는 절망감은 너무도 큰 상처였고 아픔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이 하나둘씩 성장해서 도시로 떠나고 두분만이 남고서야, 아버진 달라졌습니다. 나이가 들었으니 그럴만한 기력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전에는 어머니께서 자식들 때문에 참을 수 있었으나 그럴 이유가 없어 완전 역전된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부터 가정의 주도권은 자연스레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진 그때부터 모든것을 놓아버린 듯 오히려 편안해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네 어머니보단 먼저 죽어야 해"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당신의 소원처럼 10년전 일흔 셋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이지만 "이 좋은 세상에 죽긴 왜 일찍 죽어"라고 말씀하시면서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도저히 이해 할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언제간부터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고 이해하려드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고는 합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정말 무능한 가장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너무 힘들게 한 분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아프고 외롭고 힘든 사람은 오히려 아버지였을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겁니다.
어머니께서 지금도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그래도 니네 아버지 같은 사람없다. 술만 안드시면 얼마나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머리도 좋고 할때는 일도 그렇게 잘하고"
어머니에게 아버진 이제 원망이 대상이 아니고 그리움의 대상이 된것입니다. 평생을 살을 맛대고 살아오신 분이니 어머니만큼 아버지를 잘 아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전, 전 주말을 맞아 고향을 찾았습니다. 간암으로 투병중이신 아버지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연락을 받고...
이미 말기로 병원마저 포기한 상황에서 집 안방에 꿈쩍도 안고 누워있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눈물만 흐를 뿐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진 제 모습을 보자 무척 평온해졌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단 한번도 아프단 말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이승에서의 삶, 더 이상은 자신의 아내인 어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는 지독한 배려였습니다.
형은 다녀갔으니 누나와 여동생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연락을 해서 다음 날 누나와 여동생이 내려오니 얼굴을 보고 나서야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마도 못본 자식들이 보고싶어 마지막 의지를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얼핏, 슬픈 가족사처럼 보이지만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지독히도 가난한 시골의 전형적인 한 가정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먹고 사는 것 자체도 버거웠던 그때, 부대끼며 살았던 그 삶속에서도 끝내 놓지 않았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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