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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윈 그린(Olwyn Green)은 1923년 호주에서 태어났다. 1943년 1월 그녀는 찰리 그린(Charlie Green: 1919-1950)과 결혼했다. 1947년 둘 사이에 딸, 안띠아가 태어난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남편 찰리는 1950년 11월 1일 한국전쟁 중 전사한다. 당시 찰리 나이는 30세, 올윈은 26세. 그 후 올윈은 철모르는 3살 된 딸과 함께, 미처 슬픔의 눈물도 닦지 못한 채, '생존전쟁'에 뛰어든다. 그리고 올윈은 비극을 딛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짓는다.

올윈은 찰리를 17살 때 아빠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만났다. 올윈은 14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아빠 가게 일을 돕고 있었던 중이었다. 1939년, 키가 훤칠한 21살의 젊은 군인이 이 가게로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이 두 젊은 남녀는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찰리는 만년필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어 온 것이다.

그 둘은 표현하지 않은 '연정'을 가슴에 품고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2년 후인 1941년 어느 날, 올윈은 편지 한통을 받는다. 2년 전 만년필을 사가던 그 젊은 군인(그의 이름은 찰리)가 보낸 것이다. 당시 그리스에서 전투 중 찰리는 갑자기 만년필을 보자 그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찰리는 올윈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43년 둘은 마침내 결혼한다.

2차대전 중 찰리는 중동지역에 배치되어 그리스 등 남부 유럽전선에서, 호주군 최연소 보병대대장으로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전쟁영웅으로 귀환한다. 2차대전 후, 찰리는 또 다시 콜롬보와 뉴기이니아 내전에 참전한다. 그래서 올윈과 결혼생활 중 실제 같이 있었던 순간은 상당히 짧았다.

올윈과 찰리 그린의 결혼식
▲ 결혼 올윈과 찰리 그린의 결혼식
ⓒ 올윈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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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찰리는 6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다. 그러나 당시 제대한 군인이 갈 만한 좋은 직장은 별로 없었다. 그는 농부가 되고 싶었지만 올윈은 반대한다. 여러 재미없는 직업을 전전하던 찰리는 1949년 1월, 전쟁 후 처음 생긴 호주정규군에 장교로 입대한다. "찰리가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농부 아니면 군인뿐"이었다. 그리고 1950년 9월 27일 호주군 중령 대대장으로 찰리는 한국에 파병된다.

올윈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61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한다.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는 올윈이 한국전쟁 중 전사한 남편을 잊지 않기 위해 쓴 한 호주군인에 대한 기록으로 호주전쟁문학의 뛰어난 성과로 꼽힌다.

울윈의 생애는 지난 1997년 KBS 일요스페셜에 방송된 바도 있다. 한국을 5번 방문한 바 있는 올윈은 찰리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군대와 전쟁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지냈다. 책을 쓰면서 찰리가 전사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후 찰리 중령은 미국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추서 받았다. 올윈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로부터 친필서명의 위로서신을 받았다. 26세에 전쟁과부가 된 올윈은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남편이 전사하고 나서 더 이상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이곳 그래프톤(Grafton)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그를 잊고 싶었기 때문에 그래프톤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후, 올윈은 대학에 입학하고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1979년까지 20여 년간 영어교사를 했다. 1993년, 올윈은 찰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자신의 책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의 에필로그를 이렇게 적었다.

"보고 싶은 찰리.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지 오랜 세월이 흘렀군요. 당신이 전사한 지 어느덧 40년이 넘었군요. 그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답니다. 우리 사이에 시간은 의미가 없지요. 우리가 서로 같이 있었던 시간을 몇 분 또는 몇 년으로 계산하는 것은 참 부질없는 일이지요. 내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우리 결혼생활은 평생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랍니다. 내가 항상 당신을 사랑 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당신을 사랑하는 올윈"

나는 지난 한 달간 올윈과 수십 편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처음엔 그녀가 누군지 잘 몰랐다. 그녀와 메일을 교환하면서 나는 그녀의 삶의 여정을 차츰 알아갔다. 그녀는 마침내 내게 그녀가 쓴 책 <그대 이름은 아직도 찰리>를 소포로 호주에서 보내주었다. 이 책은 지금 내 방 책장 위 가장 소중한 곳에 보관되어있다. 다음은 그녀와 지난 한 달간 나눈 내용을 정리 한 것이다.

"남편이 참전한 2차대전과 한국전쟁이 궁금했다"  

찰스와 올윈,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 당신은 30 청년 나는 90 할머니인데 어쩌지요?"
▲ 찰스와 올윈 찰스와 올윈,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 당신은 30 청년 나는 90 할머니인데 어쩌지요?"
ⓒ 올윈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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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중 군인으로서 남편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남편 찰리는 중령으로 호주보병 대대장이었다. 남편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에 도착하여 영연방군으로 속해서 영국군 준장의 지휘를 받았다. 1950년 11월 1일 남편은 북한 정주에서 전투 중 받은 부상으로 전사했다. 이 날은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전 한 날이다. 사망하기 전 한국에서 남편은 내게 짧은 편지를 몇 편 보냈다. 남편이 한국에 9월 28일 도착하고 11월 1일 북한 정주에서 전사한 것이다. 남편대대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도 자주 선두로 진군해야 했다. 그래서 긴 편지를 자주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편지 내용에 군대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개인적인 이야기만 썼다. 우리가 만난 후 (7년 동안) 그는 내게 200통 이상 편지를 썼다. 대부분은 2차대전 중 내게 보냈고 한국에서는 6통만 보냈다."

- 한국에서 보낸 편지내용은 주로 무엇인가?
"지금 어디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략했다. 서신검열 때문이었다. 그는 나와 우리 어린 딸의 안부만 궁금해 했다. 한국은 아주 춥다고 했고 나와 어린 딸이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 남편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동기가 있었나?
"남편 사후 30년 후에 그에 대한 전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1981년부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연구를 많이 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쓰기 시작한 때부터 12년이나 걸려서 1993년에야 집필을 마치고 발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2차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했다. 1980년 나는 교사직에서 은퇴했다. 호주 뉴 사우스 웨일스 정부는 1979년과 80년 남편 찰리를 기리는 기념물을 설립했다. 나는 당시 "왜 그이가 사후 30년이 된 뒤에 정부로부터 기념되어야 할 인물로 선정된 걸까?"하고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찰리와 7년간 결혼생활을 했지만 그가 2차대전과 한국전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거의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난 그이의 군대생활에 대해 공부 해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나. 나는 짧은 7년의 결혼생활과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때문에 그의 사후 30년이 되도록 슬픔과 죄의식 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부에 집중함으로써 그 슬픔을 극복하고 싶었다."

- 책의 주요내용을 소개 해 달라. 그리고 이 책을 쓴 목적이 무언가?
"내 책의 1차 목적은 찰리의 개인적인 면에 대해 더욱 많이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은 후 내가 갖고 있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키고자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썼다고 할까. 한국전쟁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싶어서 썼다.

또 다른 목적은 남편찰리뿐 아니라 군인찰리를 알고 싶어서 썼다. 또 그가 전사한 이유와
당시 상황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찰리가 왜 한국전쟁에 갈 수 밖에 없었을까? 왜 그가 죽은 후 30년이 되도록 호주시민들은 그를 명예롭게 여길까? 왜 그가 2차대전 후 전선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그를 좀 더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건 정말 궁금한 것인데 왜 2차대전 후 찰리는 다시 군대에 들어갔고 왜 1,000명의 군인 중에 왜 그날 한국에서 그만이 죽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을 찾아가는 여행은 정말 내겐 너무나 고통스런 여정이었다. 

우리의 본격적 연애관계는 찰리가 해외 군복무를 마치고 호주로 돌아올 때 인 1942년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1941년부터 편지를 주고받았다. 2차대전 중 찰리는 북아프리카. 그리스, 시리아, 시에라리온에서 근무했다. 1945년 그는 호주에서 가장 젊은 대대장이 되었고 훈장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도 전사하기 열흘 전 인 1950년 10월 21일, 그는 용주전투에서 공을 세운 덕으로 미국실버스타 훈장을 받았다. 어쩌면 찰리에 대한 책을 씀으로써 내 아픈 상처가 치료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책의초판이 1993년 발간되고 나서 나는 한국전쟁에 대해 더 연구하여 알리는 것이 내 임무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2010년 개정판을 낸 것이다."

-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책을 쓰면서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은 무엇이었나?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것은 찰리가 2차대전이 끝나고 호주로 돌아 왔을 때 내가 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찰리는 농부가 되고 싶어 했는데 나는 반대했다. 그리고 나중에 결국 그는 군인으로서 한국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 후 나는 말 못함 죄책감으로 60년을 살았다. 그러나 내가 2010년에 내 책의 개정판을 냈을 때 나는 찰리가 정말 놀라운 리더십이 있는 군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찰리가 농부의 꿈을 접고 다시 군대로 복귀 한 것도 그에게 그렇게 나쁜 선택이 아니 엇겠거니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간 나의 반대로 농부가 될 수 없었던 찰리는 1949년 금방 막 생긴 호주정규군대에 장교로 입대했다. 나는 우리가족이 이제 서로 떠나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슬프고 어두웠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농부 아니면 군인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농부생활을 반대 했으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군인의 길 뿐이었다.

1945년 찰리가 제대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22살에 불과했다. 1950년 그가 전사했을 때 나는 27살로 여전히 젊은 여성이었지만 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다. 내가 14세에 학교를 중퇴했으니 말이다. 그와 사별 후 마음의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서 난 딸을 키우고, 일하는 한편, 뒤늦게 학교로 돌아갔다. 그래서 결국 학사학위를 따고 대학원도 다녔다. 그런데 몇 년간 무리한 생활 탓인지 심한 병이 났고 그 결과 대학원을 중퇴했다. 그 대신 나는 호주전쟁박물관을 위해 구술사를 수집하고 연구하기로 했다. 지혜를 위해선 교육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은 인생의 가치관을 세우는데 도움이 된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은 지적능력과 실험정신에 대한 훈련을 받을 수 있다."

- 호주정부로부터 2006년 훈장을 받으셨는데 어떤 이유로 훈장을 받았나?
"이 훈장은 한국전쟁의 역사를 일반에게 알린 공헌을 인정받아서 정부가 내게 수여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찰리에 관한 이 책을 쓰고 나서 훈장을 받은 것이다. 호주전쟁기념관은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수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http://www.awm.gov.au/findingaids/private/green.xml 나는 또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호주 군인들의 명부를 누비이불에 새기는 프로젝트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모든 호주군인들의 이름을 나와 다른 호주 여성들이 직접 손으로 꿰매서 누비이불에 새겨 넣었다. http://www.kmike.com/oz/quilt.htm 그러한 나의 노력에 대한 감사로 호주정부가 내게 훈장을 수여 한 것이다."

- 1950년 11월 1일 남편, 찰리 중령이 북한 정주에서 전투 후 잠시 쉬고 있는 도중에 북한군이 쏜 포탄 파편에 맞아 전사했는데, 당시 상황을 좀 말해 달라?
"찰리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날 1,000명의 호주군인들이 찰리와 같은 곳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포탄파편이 찰리의 복부를 관통하고 그만 사망했다. 찰리 전우들의 증언처럼, 그렇게 포탄을 맞고 또 사망하기도 정말 어려울 것이다. 마치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찰리의 그런 뜻하지 않은 죽음 후에 나는 나머지여생을 살면서 항상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전사하기 전 찰리는 북한 정주에서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전투 중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다. 그 전투에서 찰리도 여러 번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전투는 무사히 끝났다. 1950년 10월 29일 밤, 찰리는 자기 텐트로 갔다. 그는 48시간 동안 한 잠도 못자서 아주 피곤했다. 찰리는 부하에게 왜 자기 텐트가 이곳에 설치 되어있느냐고 물었다. 부하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찰리는 텐트 안 야전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그때 부근 언덕위에서 북한군의 포탄이 갑자기 날아왔다. 그 포탄이 나무를 맞히고 한 포탄파편이 텐트를 뚫고 찰리의 복부를 관통했다. 찰리의 대대원들과 다른 많은 군인들이 찰리 주변에 운집해 있었지만 찰리만 그 파편을 맞았고 치명상을 입었다. 부하들이 그를 지프차에 태워 즉시 근처 야전병원으로 데려 갔을 때 그는 이미 생존가능성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나에게 작별인사 한마디 못하고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다." 

- 남편이 한국전쟁 중 한국피난민들을 만난 적이 있었나?
"1950년 9월 28일, 찰리가 한 한국소녀로부터 꽃을 받는 사진이 있다. 당시 찰리는 부산부두에 일본에서 배를 타고 막 도착했다. 부산으로부터 찰리부대는 3.8선을 향해 빠르게 북진했고, 미8군도 함께 북진하면서 북한군과 도중에 3번의 전투가 있었다. 찰리 부대는 북진 중 북한 민간인들을 보았는데 피난은 하지 않았다. 당시 최정길이라는 한 16세의 북한소년이 북한에 가족들을 남겨두고 홀로 월남하고 있었다. 이 소년은 전투중인 호주군대와 만났다. 이 소년은 거의 기아상태에 가까웠다. 즉시 호주군은 이 소년을 군의관에게 데려가서 음식을 먹이고 돌봐주었다.

최정길은 호주의료팀과 가평전투가 끝날 때 까지 함께 있었다. 전투지역에서 최정길 소년의 안전을 염려한 호주장교는 그를 후방 호주군 보급부대로 보냈고 거기서 그 소년을 돌봐주도록 조치했다. 최정길 소년은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호주군 보급부대에서 일했다. 호주전쟁기념관에는 내가 최종길 소년에 대해 수집한 기록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호주군과 일하면서 최종길 소년은 영어를 빨리 배웠고 내 남편 찰리가 전사하던 그 밤의 광경을 영어기록으로 남겼다."

"몇 십년 동안 매일 거의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찰리 그린과 딸 안띠아의 즐거운 한때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직전 딸과의 마지막 만남
▲ 찰리그린 찰리 그린과 딸 안띠아의 즐거운 한때 1950년 한국전쟁 참전 직전 딸과의 마지막 만남
ⓒ 올윈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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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가 전사 후 또 한국전쟁 후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이었나? 그 후유증이 심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찰리의 뜻하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전사소식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충격을 남겼다. 그 후 나는 몇 십 년 동안 거의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다 나는 내 세계가 파괴되어 버린 것 같은 극도의 절망감을 느꼈다. 나는 찰리 사후 몇 십년간 찰리에 죽음에 대해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지금도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지난 61년간 하루 한순간도 찰리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찰리가 죽은 후 한 아이의 엄마인 나는 전혀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13세에 학교를 중퇴했다. 그 말은 내가 교육도 부족했고 경험이나 기술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더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 해 봐도 내가 당시 어디서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얻었는지 스스로 의아해 할 때가 있다.

아빠 없는 어린 딸을 갖고 있는 나였지만 나는 뒤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입시험도 준비했다. 그리고 대학에 합격했고 열심히 다니며 어린 딸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직장도 다녔다. 정말 열심히 산 것 같다. 수입은 부족했지만 남편의 연금이 좀 있었고 나중에는 딸과 단 둘이 살기보다는 과부가 된 내 엄마와 남동생과 이렇게 넷이 함께 살았다. 어떤 때는 할머니와 살기도 하면서 뒤 늦게 대학을 무사히 졸업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엄마가 나를 정말 많이 도와주시고 지원해 주신 것 같다. 젊은 전쟁과부가 된 내가 너무 안쓰러우셨나 보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잘 견디었다. 내 남동생은 찰리가 전사했을 때 16세 소년에 불과했는데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중에 대학교수까지 했다. 남동생과 나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 우리 고향인 뉴 사우스 웨일스주를 떠나 시드니로 이사 갔다." 

- 남편이 전사한 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나? 그때 기분이 어땠나?        
"난 한국을 5번 방문했다. 첫 방문은 한국방문 프로그램 회원자격으로 갔다. 다른 방문은 호주한국재단, 호주참전군인회, 한국재향군인회가 주선해 주었다. 방문 때 마다 한국정부가 내 여행경비 일부를 지원해 주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호주참전용사들도 초대해준 한국재향군인회에 감사드린다. 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호주참전용사들은 한국의 발전된 상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방문 프로그램은 특이했다. 한국정부의 우리들에 대한 대우는 아주 극진했다.   한국전쟁 당시, 비록 참전한 호주군대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1951년 4월 15일 가평전투에서 호주군의 역할에 대해 한국정부 인사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나는 한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내 남편 찰리의 유해는 지금 한국 부산의 유엔군묘지에 묻혀있다. 나는 한국의 절, 박물관, 국립묘지, 전시관, 고궁, 공연관람 등 많은 곳을 방문 할 기회를 가졌다. 내 딸도 한 번 나를 따라 한국에 왔는데 한국의 경치가 조각품 같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아름다운 청자나 도자기 등 기념품도 많이 사왔고 지금 내 방과 응접실은 내 남편이 묻혀있는 나라인 한국에서 가져온 여러 기념품으로 장식되어있다.

물론 나는 한국에 갈 때 마다 부산유엔군묘지에 누워있는 찰리를 방문한다. 그 묘지는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져있다. 찰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돌보아 주시는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 그 곳을 방문할 때 한국 어린이들이 묘지 앞에 기도하고 경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감동스러웠다. 한국인들은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정말 우리 호주군인들의 한국전쟁 중의 희생에 진정으로 고마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양국 간의 친선관계를 증진시키는 주요단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인 전역자분들도 호주에 많이 살고 계신다. 앞서 이야기 한,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월남한 16세 소년이었던 최정길님도 지금 호주에 살고 있다. 그는 한국과 호주 양국의 관계를 증신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남편이 전사할 당시의 상황을 영어로 기록 해 둔 최정길님의 지금 영어실력은 유창하고 그는 한국과 호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위해 큰 공헌을 하셨다.

최근 시드니에 한국문화관이 개관했고 이 문화관은 양국 간의 관계 증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문화관의 다양한 전시를 통해 나와 호주인 들은 한국문화의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올해는 특히 "한호 우정의 해" 이다. 그래서 다음 달인 7월 2l일 한국문화원에서는 한국전쟁 중 생명을 잃은 호주참전용사를 기리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한다."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책표지
 <아직도 그대 이름은 찰리> 책표지
ⓒ 올윈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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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국민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한국인들은 언제나 우리 호주인 들의 한국전쟁 중 희생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한국을 5번 방문하고 또 호주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서 나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역사, 문화, 우정을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고 느꼈다.  정말 역사는 인간에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역사에는 교훈, 신비, 영감(inspiration)이 있고 인간정신의 하이라이트가 있다. 음악가나 예술가가 주는 영감을 우리는 역사와 기록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전쟁의 교훈은 무엇이라고 보나?
"인류는, 한국전쟁을 포함, 모든 전쟁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고된 시험을 겪는다. 한국전쟁은 유엔이 앞장선 세계 16개국이 힘을 합쳐 한나라를 지킨 예가 될 것이다. 지금은 세계평화를 지키기 위한 국가 간 동맹관계가 한국전쟁 당시 보다 약한 것 같다. 힘들더라도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큰 어려움도 극복 할 수 있다는 것이 한국전쟁이 준 교훈이라 생각한다."

<그대 이름은 지금도 찰리> 중에서 올윈이 쓴 글을 인용하면서 이글을 마친다.

찰리, 내 사랑!
아침이 그토록 눈부셨던 그 날!
달콤한 작별키스 아직도 남아있는데
곧 돌아온다던 그 손 놓지 말 것을


지구 동쪽 끝 미지의 나라
달빛 곱던 강물이 선홍색 핏빛 되고
내 소중한 당신 잠들던 날


늦가을 붉은 사과 시리도록 아름다웠지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도
아직도 사랑하는 그대


나 이 세상 떠나는 날
한줌재로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찰리, 내 사랑




태그:#올윈 그린, #찰리 그린, #한국전쟁, #호주, #김성수, #평화통일,진실위,반민특위,평화재향군인회,표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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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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