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의 슬픔피임법이 발달치 않았던 시절에 예사 부부들은 어쩔 수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있을 때까지 두었다. 그래서 여성인 경우는 폐경 직전인 쉰 살에 이르기까지, 남성인 경우는 일흔에 이르기까지 자녀를 낳았다. 내가 아는 한 할머니는 평생에 열다섯의 자녀를 뒀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늦게 낳은 자식은 '막내' '막둥이', 또는 '늦둥이'라 하여, 늙은 부모들은 애면글면 늦둥이에게 젖을 서당(학교)에 다닐 때까지, 젖무덤이 바짝 잦아질 때까지 먹이면서 눈물 속에 길렀다.
막둥이에 대한 애정이 다른 여느 자식보다 더 한 것은 당신들이 다 기르지 못하고 세상을 뜰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37, 8세로 환갑(61세)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막둥이는 곧 천덕꾸러기로 자라기 십상이었다.
실제 나의 어머니가 막둥이였는데 다행히 외할아버지 내외가 그 무렵에는 드물게 오래도록 사셨다. 하지만 이미 재산권을 아들에게 다 물려준 뒤라 못 살게 된 막내딸이 친정을 찾아오면 돈 한 움큼 듬뿍 주지 못해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을 본 게 눈에 선하다.
고교 친구가 남긴 선물나는 지난 6월 20일, 늦둥이를 탄생시켰다. 나의 은사였던 조지훈 선생은 48세에 돌아가셨는데도 주옥 같은 시와 숱한 저서, 그리고 학술저서를 남기셨다. 그런데 나는 둔재로 그 나이에 문단에 등단조차 못하고 주변인으로 어슬렁거리다가 쉰이 된 때에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라는 장편소설로 겨우 문단 말석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소설은 쓰지 못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현직 고교교사로 장편소설을 쓸 만큼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틈틈이 항일 유적지를 다니면서 답사기와 사는 이야기를 써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답사기나 산문집, 그리고 사진집을 책으로 펴내며 지냈다. 소설가가 소설을 못 쓰고 있는 걸 안타깝게 여긴 아내가 먼저 용단을 내렸다. 2004년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는 낯설고 산수도 선 강원 산골로 내려왔다.
외로운 산골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느 날 고교시절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준 친구가 그리워 2005년 1월 31일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그 기사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뉴욕에까지 파문을 일으켜(미주 뉴욕 한국일보에 전재) 마침내 친구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10여 년 전에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비보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망연자실하다가 뒤늦게나마 그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뉴욕 허드슨 강 언덕에 찾아가 조문하는 게 살아있는 친구의 도리일 것 같아 그해 연말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온라인으로 알게 된 제주 백조일손 후손 이도영씨의 길 안내와 뉴욕에 있는 친구들의 인도로 허드슨 강변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이 모두를 비디오로 찍듯이 원고지에 담아 장편소설 <제비꽃>에 담았지만, 나의 필력 부족으로 세상구경을 못하다가 지난 4월 광주 무등산 생오지 마을에서 태어난 뒤 처음 만난 한 출판인의 호의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첫 소설집 이후 17년 만에 탄생시킨 늦둥이다.
이 소설에는 나와 친구, 그리고 이도영씨의 가슴 아픈 가족사와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한 친구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펼쳐지고 있다. 강원산골 외딴 아래채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썼다.
이 작품 <제비꽃>이 이제 세상에 나온 지 겨우 열흘이지만, 이즈음은 중견출판사도 퍽퍽 힘없이 도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 전통의 원주 시내 한복판 서점(동아서관)마저 매장으로 쓰던 1, 2, 3층을 모두 병원과 이동통신대리점에게 내어 주고, 정작 서점은 지하로 옮겨가는 세태이기에 나는 마치 옛날 노부부가 늘그막에 주책없이 늦둥이를 본 심정이다.
불황이라 해도 다른 산업은 그런대로 해마다 조금씩 성장했지만 오직 출판계만이 몇 년째 뒷걸음질이다. 그러다 보니 나라에 인문이 죽어가고 있다. 인문이 죽은 세상은 '마사지 걸'을 지껄이는 부류의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마침내는 폭력과 독재가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세상이 올 것이다.
참고로 <제비꽃> 책머리 말을 덧붙이면서 한 주책없는 늙은 아비의 하소연을 줄인다.
그의 빚을 갚는 헌사"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해 아우성이에요. 이제 그만 후배를 위해 퇴직하세요."어느 날 저녁 아내가 불쑥 한마디 뱉고는 이튿날 강원도로 훌쩍 떠났다. 그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몸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훈장이라기보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나 챙기는 샐러리맨이었다. 보충수업비, 야간자율학습지도비, 어쩌다 학부모가 떨어트린 촌지, 그런 가욋돈을 지갑 속에 꼬불치고는 동료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나누거나 고스톱을 즐겼던 땟국에 찌든 교사였다.언제부터 아내는 그런 남편을 마냥 바라보고 살기에 진력이 났나 보다. 아내는 강원도 산골 외딴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폐가 직전의 집을 거저 얻고는 둥지를 틀었다. 그래도 나는 정년퇴직을 해야 한다고, 한 학기를 더 버티다가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는 앞으로 글이나 써야겠다며 아내가 마련한 둥지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글이 동네강아지 이름으로 그리 쉽게 쓰이겠는가.두어 해 동안 반거들충이 시골 농사꾼으로 지냈다. 산골 하루 일과 가운데 아침저녁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군불을 때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마른 장작들이 '딱 딱'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어느 겨울날 장작 불꽃더미 속에서 불쑥 장지수가 나타났다. 나는 불타고 있는 장작들을 방고래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는 아래채 내 글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그의 영혼이 나를 일깨웠다.
1961년 봄, 나는 고등학교 신입생으로 입학금을 내지 못해 등교치 못하다가 개학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입학수속을 마쳤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쓴 담임선생님을 뒤따라 교실로 갔다."옆자리가 빈 학생, 손들어 봐!""선생님, 여기예요."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바로 그가 장지수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때 그는 가난한 시골뜨기를 감싸줬는데, 늘그막에는 추억의 친구로, 무능한 늦깎이작가의 글감을 만들어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는 나에게 목숨이 아깝지 않는 문경지우(刎頸之友)다. 하지만 나는 이승에서 그에게 빚만 잔뜩 졌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그의 빚을 갚는 헌사이다.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독자는 저자가 피와 눈물로써 쓴 글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나는 작품을 쓰는 동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숱한 눈물을 쏟았다. 이 작품은 나의 첫 작품집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이후 17년 만에 펴내는 장편소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취재하고 집필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지수 그 친구를 30년 만에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잠도 자면서 실컷 수다도 떨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탈고한 뒤 이 머리글을 쓰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으로,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에…. 2011년 여름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글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