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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쓴 <운명>
 문재인이 쓴 <운명>
ⓒ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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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창중이란 사람을 잘 모른다. 오늘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참여정부시절 노 대통령 주위에서 요직을 맡아 보좌했던 문재인이 자서전을 썼다. <운명>이 그것이다. 문재인이 노무현을 만나 고락을 함께 한 것을 그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이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유서에 남긴 말 중에 모든 것이 '운명이다'라고 한 말도 자서전 제목과 쉽게 연결된다.

나는 문재인의 그 책을 사서 읽어 보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참여정부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의 성장 과정이 그의 의식 형성에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또 그 의식을 현실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노무현 문재인 두 사람을 통해서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앞의 대통령들과는 달리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평범한 대통령, 평범한 비서실장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이 책을 통해서 읽을 수 있었다.

노무현은 문재인이 있어서 행복했고, 문재인은 노무현으로 인해 행복했던 관계, 나는 그런 관계면 성공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대선 운동을 할 때,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문재인을 대중 앞에 소개하면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으로 표현한 것만 봐도 두 사람의 끈끈한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재인은 지금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맡아 그 '운명'과도 같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자서전이라는 것이 대개 아전인수(我田引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자랑 내지 자기가 속한 집단을 과장 보고하는 형식을 띠기 쉽다. 그래서 자서전은 예부터 역사적 가치를 따질 때 한 수 접고 읽고 판단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정치인들의 자서전은 더 그렇다. 이것은 정치적 입지 확보용으로 출판해서 배포함으로 자신의 위상을 높여 보려는 몸짓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선거에 당선되고 보자는 홍보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문재인의 <운명>을 펼쳐든 사람은 이 책에 실망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비교적 솔직하게 문재인 자신의 인생 역정을 기술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그 와중에 공부를 해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부담감, 어떡하든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보고자 하는 욕망, 대학 진학해서 흑암의 세상에 공부만 할 수 없었던 양심, 데모를 주도하며 학교를 제적당한 문재인이 사시에 운 좋게 붙어 법관을 원했으나 데모 이력으로 인해 좌절해야 했던 현실. 그리고 변호사로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은 문재인에게 노무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합동 변호사 사무실을 공동 운영하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변론에 열정을 불태운다.

문재인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하면서 늘 생각했던 것은 아웃사이더로서의 자기 입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자서전에서 6.10항쟁의 중심축이 서울이 아닌 부산임을 극구 주장하고 있는 데서도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운동에 직접 참여했거나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6.10 항쟁이 서울을 비롯한 경인 지방의 민주화세력이 중심임은 쉽게 알 수 있는 지식이다. 물론 부산 등 지방에서 함께 해 주었기 때문에 6.29선언이라는 결과물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은 천상 부산 촌놈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나는 문재인의 <운명>을 읽고 오래 피치자의 입장에 있다가 통치 영역으로 옮겨갔을 때의 어려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현대사는 굴곡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에서부터 타의에 의한 해방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친일배 재 등용, 4.19혁명에 뒤이은 5.16군사 쿠데타, 그리고 30년에 가까운 군사 독재 정권의 철권통치… . 노무현과 문재인은 이런 큰 흐름의 반대편에 늘 있었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으로 그들은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할 국민의 제일 공복이 되었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차하면 보수진영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까지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 하는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가 될 때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 FTA 협상과 이라크 파병을 들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참여 정부 5년 동안 노무현의 생각과 문재인의 뜻이 거의 일치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무조건 충성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 받은 삶에서 형성된 가치관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노무현 문재인을 운명으로 하나 되게 만든 동력이기도 했다.

문재인의 자서전 <운명>은 자서전의 격식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내용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점에서 예전에 나왔던 '청와대 비화' 류의 선정적 정치 이야기와는 분명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화일보 논실실장으로 되어 있는 윤창중이란 이가 문재인의 이 책을 마음대로 칼질해 놓고 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신문에 며칠 전(6월 20일) 시론의 형식을 빈 글인 것 같은데, 왜 굳이 문재인의 <운명>을 매개로 글을 썼는지 모르겠다. 그가 467쪽에 이르는 책을 정독하고 글을 썼는지도 의문이다.

그의 글은 서평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물평도 아니다. 아무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이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을 교묘하게 연결시켜 악담을 퍼부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문화일보라는 신문을 생각할 때면 고 정주영 회장이 총수로 있던 현대그룹에서 창간해서 재계와 보수 계층을 대변해온 신문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보수를 표방하고 신문을 발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신문의 논설실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보수층이 환영할 글을 쓰는 것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단지 보수 논객도 최소한의 예의와 품위를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치 보수논객 1세대를 자처하는 조갑제나 김동길 등의 글 재탕을 읽는 듯해 불쾌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윤창중의 나이가 인생을 비아냥댈 정도는 아니었다. 몰라서 비아냥댈 어린 나이도 아니고, 사고력과 판단력이 현저히 떨어질 만큼 쇠한 나이도 아니었다. 오십 중반의 나이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글을 최대한 절제하며 다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글을 쓸 황금기이다. 그런 사람이 논리도 없고 정서도 없는 글을 자기 신문에 끼적인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신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안 된다.

그가 쓴 글에 '문재인의 배신감에 분노했다'고 했는데 고작 그 근거라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짧게 발표할 때는 절제된 언어였는데, 자서전엔 그게 아니어서 경악했다는 식이다. 그는 많은 국민이 친근하게 느끼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을 범죄자로 단정해 놓고 그를 대변한 문재인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잘못 생각한 '선입견을 죄악!'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으며, 문재인을 가면을 쓴 인간으로 칼질하고 있다.

윤창중의 칼질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주식 시장의 삼류 정보로나 가치가 있을 얘기들을 동원해서 노무현과 문재인을 토막 내기에 바쁘다. 노무현이 검은 돈에 손을 댔다며 그것을 은폐하기 자살을 택했고 촛불을 들게 했으며, 퇴임 후 생활비 확보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국 간 아들 딸들 아파트 사 주려고 박연차로부터 돈을 받았다며 마치 사실을 폭로라도 하는 듯이 신나한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스스로 유죄를 인정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윤창중은 그에게나 합당할 말인 '곡학아세'(曲學阿世)까지 동원하며 노무현 문재인을 비난하고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도 그런 이에게 가까운 사자성어일 성 싶다. 그는 문재인의 <운명>을 뻔뻔한 '노비어천가'라고 단정 짓고 있다. 그리고 문재인이 자서전을 쓴 것은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의식해서 한 의도적인 작업으로 몰아 부치고 있다. 윤창중은 그러면서 그것을 사악한 음모라며 교활하다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정말 치졸하다. 이런 사이비 논객의 글을 보고 환호할 사람들이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극우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이런 감정적인 글은 외면할 것 같다.

언어 조합, 언어유희에도 능한 면모를 보여준다. '노비어천가'(盧飛御天歌), '추노세력'(追盧勢力), '황위병'(黃衛兵) 등은 고소를 금치 못할 단어 ‧ 어절들이다. '노비어천가'는 조선 초 세종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흉내 낸 것이고. '추노세력'은 노무현을 추종하는 세력 그리고 '황위병'은 노무현이 대선 출마 당시 상징색이 노란색이었고 그의 죽음 뒤 추모 집회 때 노란색 일색이었던 데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중국 문화혁명 때의 '홍위병'에서 따온 것이다. 외눈박이의 정신적 장애인이 언론에 몸담고 있을 때, 그것은 무서운 사회 병인(病因)으로 작용한다. 학계에 몸담고 있는 외눈박이만큼 위험하다.

그는 이 나라가 영원히 미국에 의존하며 북한을 범죄자 집단으로 보는 극우 세력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마치 진리이자 절대 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정권을 친북 좌파 반미세력에 넘겨주어서는 안 될 대원칙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아마 그가 거론한 친북 좌파 반미세력은 학술 용어로 진보진영을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건강한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며 상호 보완하는 사회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눈박이 윤창중은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21세기에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 못된다. 허튼 소리해도 별 탈 없는 17세기에 봉건왕정 때나 살기에 적당한 사람이다. 그가 문재인의 자서전 <운명>을 들먹이며 글을 썼다는 자체에 피가 역류함은 나도 그와 비슷한 소인배여서 그런가?


태그:#문재인, #운명, #노무현, #윤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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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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