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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78) 시인. 그가 시집 두 권을 창비에서 펴냈다.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과 2008년 <허공> 뒤 3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고은(78) 시인. 그가 시집 두 권을 창비에서 펴냈다.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과 2008년 <허공> 뒤 3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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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목소리가 왔다

오다니
오다니
이 행성 밖의 다른 행성에서 그 목소리가 광년의 빛으로 왔다

심청으로 던져지고 싶었다 깊은 달밤의 인당수였다

- '국제전화' 모두

여든을 두 해 앞둔 원로시인 고은은 사랑을 어떻게 새길까.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고 있는 우리나라가 낳은 탁월한 시인 고은이 쓰는 '사랑의 시', 그 속내에는 어떤 '사랑의 꽃'이 피어나고 있을까. 그가 여기는 변방은 위로 솟구치는 세로일까, 아래로 처박히는 세로일까. 그가 머무는 변방이 가로라면 그 가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길 한복판에 있을까, 아니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는 길둑에 웅크리고 있을까.  

이 시대가 낳은 시성(詩聖)이라 불러도 아무도 안다리를 걸 수 없는 고은(78) 시인. 그가 시집 두 권을 창비에서 펴냈다.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과 2008년 <허공> 뒤 3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가 그것. 작품활동 53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앞세운 사랑시집 <상화 시편>이란 제목에 나오는 '상화'는 부인 '이상화'다.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은 시인이 1983년 결혼한 뒤 삶에 큰 그림자로 자리매김한 이상화에게 바치는 사랑시집이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고은 시인이 그동안 줄곧 품고 있었던 시세계를 그대로 이어 나아가는 시집이다. 고은 시인은 "두 시집을 유비(類比)할 수는 없다"며 "양손에 술잔을 들고 어느 것을 마실지 정하지 못하는 모양새"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는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에 대해 "내가 1980년대에 연시집을 냈다면 <접시꽃 당신>을 펴낸 도종환 시인 다음은 갔을 것"이라며 잔잔한 미소를 날린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에 대해서는 "시인으로서는 '내 변방…'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문학평론가 도정일 말처럼 변방은 우리의 고향이고 시대를 넘어선 곳에 있으며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고은 시인이 최초로 쓴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

고은 시인 최초로 펴낸 사랑시집 <상화시편>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은 시인이 1983년 결혼한 뒤 삶에 큰 그림자로 자리매김한 이상화에게 바치는 사랑시집이다
▲ 고은 시인 최초로 펴낸 사랑시집 <상화시편>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은 시인이 1983년 결혼한 뒤 삶에 큰 그림자로 자리매김한 이상화에게 바치는 사랑시집이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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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겨울
그녀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
기어코 1983년 결혼 이래
아내의 긴 편지와 좀 덜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
황홀경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나의 편지는 아내의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이상 참을 수 없이 나는 아내의 오른손이고 왼손이었습니다

- '아내의 편지' 몇 토막

고은 시인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꾸미고, 시인이 처음 펴낸 사랑시집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 이 시집에는 시인 부인 이상화 교수(64, 중앙대 영문과)가 쓴 시 '어느 별에서 왔을까'도 실려 있다.

시인은 이 그림과 부인 시에 대해 "가족 생일 때 시와 편지를 주고받는데 몇 해 전 아내의 생일 때 그린 그림이다. 형상화할 수 없는 꽃밭을 담았다"라며 "아내의 시가 '싸가지 없이' 나보다 더 낫길래 한 편 슬쩍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 시집에는 모두 118편이 사랑을 부드럽게 껴안고 있다. 서시, 아내의 잠, 무덤, 번개우레, 백지, 오동꽃 지는 날, 어떤 술주정, 신우염, 사랑, 편지, 떠도는 나라의 부부, 어느 선언, 고추잠자리 일기, 나는 아내가 되어간다, 성도착에 대하여, 칠장사에서, 가라사대,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래된 부끄러움, 나는 벌거숭이가 아니다, 아내의 편지, 그 집, 모국어로 살면서 등이 그 시편들.

고은 시인이 펴낸 이번 시집에는 사랑에 행복해하고 사랑에 애달파하고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한 남자', 시를 쓰는 한 남자, 그 깊은 속내가 솔직하게 우러난다. 시인이 살아온 삶에 그려지는 자잘한 결, 지구촌 눈길이 한꺼번에 쏠리는 시인이 되기까지 '사랑'이 얼마나 큰 몫을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고은 시인은 "80세 앞에서 사랑의 시를 쓰는 나를 이제까지의 누구도 예상해본 적이 없을 것"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와 살면서 일상의 사소한 티끌 같은 시간의 집적이 참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나이 차도 없고 성도 서로 모른다"라며 "다만 이 시집에는 다른 연인들을 위한 가능성도 스며들었기 때문에 우리 둘만의 사사로운 시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해가 진다
사랑해야겠다
해가 뜬다
사랑해야겠다 사랑해야겠다

너를 사랑해야겠다
세상의 낮과 밤 배고프며 너를 사랑해야겠다

- '서시' 모두

<상화 시편-행성의 사랑>은 팔순을 앞둔 고은 시인이 처음으로 아내에게 고백하는 참 사랑이자 이 땅 모든 부부들에게 보내는 큰 사랑이다. "아내의 둘레를 돌 때마다 / 나는 빛난다 / 아내의 둘레를 돌 때마다 / 나의 한쪽이 빛난다 // 아내의 빛으로 나의 다른 한쪽이 캄캄하다 / 나는 아내의 위성이다"(공전)처럼 아내는 곧 내 몸이자 내 바람이다.

장석남 시인은 이 시집 표4에 "고은 선생님! 까마득 진화에서 까마득 멸망까지가 사랑의 온몸이라네요. 그토록은 커야 안 슬퍼요. 너무 커 멸망까지가 다 품 안에 있습니다"라며 "영혼 술술 뿌려 절여놓은 사랑 그리고 그것들의 호흡. 때로는 너무 격해 건너뛰기도 하는 비문(碑文)의 아름다운 징검돌 사이, 나는 한 떼의 햇송사리떼입니다"라고 썼다.

이상한 꼬라지(?) 문명에 '시의 칼' 들이대는 <내 변방은 어디 갔나>

고은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고은 시인이 그동안 줄곧 품고 있었던 시세계를 그대로 이어 나아가는 시집이다
▲ 고은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고은 시인이 그동안 줄곧 품고 있었던 시세계를 그대로 이어 나아가는 시집이다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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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강은 강대로 죽어가고 산은 산대로 마구 죽어갑니다

돌아보소서
이 꼬라지
이 꼬라지가
할아버지 할머니 후손의 막된 나의 삶입니다

돌아다보지 마소서
더이상 나는 당신들의 무엇이 아닙니다
한갓 이 문명 떨거지 생핏줄 끊긴 불초막심의 삽날입니다

- '나의 삶―네 강을 걱정하며' 몇 토막

고은 시인은 새 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이상한 꼬라지(?)를 한 채 '빨리 빨리' 앞으로만 달려가는 문명(중심)에 '시의 칼'을 일직선으로 들이댄다. "저 1970년대 10년의 날들 /그 싸움 기슭 / 내 맹목의 살점들 지글지글 타던 / 모두의 숨찬 넋들로 새로이 와야 한다"(태백으로 간다)라며, 문명을 버리고 스스로 '변방'이 된다.

4행의 노래, 다시 은유로, 영 안 잊히는 마르꼬, 백지, 어청도에서, 강화에서, 서해 낙조, 날아가는 법, 나의 소원, 경부고속도로 하행, 김성동, 시에게, 모기에게, 담양에서, 대설주의보, 평창에서, 저 그리움 좀 봐, 바람이 불면, 늦은 깨달음, 내 변방은 어디 갔나, 안침술집을 떠나며, 잠꼬대, 구름 해설, 화개(花開) 등 114편이 그 시편들.

고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모두가 중심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그릇된 욕망을 비웃으며 시는 이 시대 변방이라 쐐기를 박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변방은 "곧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곳, 우리가 오래전에 떠나온 곳"이다. 그곳은 곧 우리가 두고 온 고향이며, 그곳을 지나야만 올바른 꼭지점을 찍어 '꼬라지' 비뚤어진 이 시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시인 목소리가 더 쩌렁쩌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은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필리핀의 한 산중부족은 글자를 아래에서 위로 써올라간다. 그네들이 제대로 쓰는 바가 다른 곳에서는 거꾸로 쓰는 바로 되고 만다"고 되짚는다. 그는 "내 어린 날의 글쓰기는 세로쓰기였다. 위에서 아래로 써내려왔다"라며 "그러므로 필리핀의 부족이 보았더라면 어찌 글을 거꾸로 쓰는가 하고 갸웃했을 것"이라고 허를 찔렀다. 중심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삼천리강산이 모조리 서울이 되어간다
오, 휘황한 이벤트의 나라
너도나도
모조리 모조리
뉴욕이 되어간다
그놈의 허브 내지 허브 짝퉁이 되어간다

말하겠다
가장 흉측망측하고 뻔뻔한 중심이라는 것 그것이 되어 간다

- '내 변방은 어디 갔나' 몇 토막

<내 변방은 어디 갔나>는 이 땅 모든 곳이 '그 잘난' 중심, 꼬라지 이상한 물질문명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기만 하면 중심이 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매서운 회초리다. 변방이 없이 어찌 중심이 있겠는가. 컴퍼스로 원을 그려보라. 원이 없이 어찌 꼭짓점이 있겠는가. 시인이 시가 변방이라 말하는 것도 제대로 된 중심, 삼라만상이 더불어 살아가는 그 제대로 된 중심을 찾기 위함 아니겠는가.     

안도현 시인은 고은 시인에 대해 "스무살 무렵, 나는 고은 시집을 공부 삼아 읽다가 그만 뿅 가버렸다. '사치(奢侈)'를 가로지르는 한 구절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때문이었다"라고 쓴다. 그는 "시의 귀신이 나를 물고 가는 것 같았다"라며 "이 세상에는 세월이 가도 늙지 않는, 여전히 청춘으로 사는 귀신이 있는 모양"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시인 고은은 1933년 4월 10일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58년 <현대시>에 시 '폐결핵'을 추천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그는 군산중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한국전쟁을 맞아 어쩔 수 없이 휴학했으며, 1952년 입산해 효봉선사 상좌가 되어 10여 년 동안 수도를 하다가 1962년 환속했다.

시집으로 <피안감성> <해변의 운문집> <신 언어의 마을> <문의마을에 가서> <입산> <새벽길> 장시집 <백두산> 연작시 <만인보>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등을 두루 맡았다.


상화 시편 - 행성의 사랑

고은 지음, 창비(2011)


내 변방은 어디 갔나

고은 지음, 창비(2011)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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