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구를 위한 민주주인가?'며칠 전 강남구의회 구의원들과 함께 강남구청에서 무상급식 주민투표 서명용지 확인을 하며 몇 번이나 머리에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강남구에서는 유권자 50만 명 중 5만 명이 서명을 했다고 합니다. 야당들과 시민단체들은 지난주 내내 주민투표서명자의 진위를 가려내기 위해 청원용지와 씨름했습니다. 시의회를 마무리한 주말, 나 역시 강남구청 현관에서 10명이 모여 서명용지 500장 한묶음씩 확인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서체가 단지 7~8가지밖에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일필체가 많았습니다. 대략 7~8개 필체가 돌아가면서 5~6장씩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소를 적당히 서체와 섞어놓아 동일한 것을 발견하려면 한 권 묶음인 500장을 흩뜨려놓고 찾아야 할 것 같더군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인도 동일한 것이 워낙 많았습니다. 서명을 할 때 성명 중 한 자를 한문으로 쓰고 나머지는 한글로 쓰는 한국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동일인이 한듯 한데 심증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서울시는 이들을 어떻게 가려냈는지 궁금하군요.
불법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하철 역내는 투표독려활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서명용지에 여러 명이 싸인을 하게 하고는 나중에 옮겨 적는 행위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 서명을 위조나 마찬가지니 모두 불법인 셈입니다.
형식적으로는 한 장에 여러 명을 연명하고는 나중이 1인 1장씩 옮겨 적으며 서명을 위조한 점, 내용적으로는 무상급식주민투표청원용지에 단계별 점진급식이냐 아닌가를 묻고 서명하게 한 점 등 상식적으로는 중대한 하자인데요. 아무래도 오세훈 시장은 민주주의와 다수결의를 혼동했나봅니다. 그리고 그가 힘의 발휘한다는 다수결의마저 문제가 많으니, 본인이 민주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마저 먼 과거인가 봅니다.
결국 무상급식주민투표를 위한 서명에 대한 서울시의 검증결과 81만 건 중 26만 건이 무효 혹은 불법으로 밝혀졌습니다. 시민단체와 정당에 무효라고 이의 신청을 낸 수가 총 13만 여 건인데, 서울시가 확인한 양은 두 배가 넘는군요. 우리 일을 대신해준 서울시가 고맙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지난번 서울시교육청에 학생인권조례 청원을 낼 때 역시 8만 명이 서명을 했고 그중 1만 건이 무효였습니다. 비율로 따지면 이번 주민투표 서명 80만 건 중 10만 건 정도가 무효라면 모를까 4분의 1인 26만 건 무효라면 심하게 많은 것입니다. 무효표 대박, 이에 서명과정에 불법과 편법이 자행되었으리라 짐작하는 게 어렵지 않네요. 이런 상황을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야하는지 서울시의원으로서 참 답답함을 느낍니다.
어쨌든 유효한 서명 41만 8000명이 넘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민투표를 할 수 있는 조건은 되는 셈입니다. 다음 달인 8월 2일경으로 주민투표일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투표에 드는 돈은 182억 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갑니다. 투표에 무상급식을 찬성하든 안 하든 유권자의 1/3이 되지 않으면 개봉도 하지 않고 쓰레기장에 쳐박히는데 그런 일을 굳이 해야 합니까?
그리고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따라서 서울은 한 번 더 요동칠 것입니다. 그러면 서울 시장선거를 다시 한 번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용은 150억 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면 300억 원이 넘는 돈을 그렇게 써도 좋은지에 대해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일관성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왜냐구요? 우리 주머니에서 나온, 사실 우리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예산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산을 잘 운용해 급식이 어떻게 잘 자리 잡아 구제역으로 고물가를 극복하는지와 아이들이 건강하고 영양가 있는 밥을 먹으며 농민들과 함께 공존할 것인지를 고민할 시기에 아직도 무상급식 할래말래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번 사례를 보면서 민주주의가 투표로 완성이 되는 게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듭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투표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투표 과정과 결과까지 감시할 수 있는 민주시민의식으로 완성되는 겁니다. 학교에서는 이루어지는 민주시민교육은 우리가 불합리한 일을 국가로부터 겪을 때 항의할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대필도 정도껏이라야 넘어가 다음 절차를 생각해 볼 수 있지 명백하게 위법성이 드러난 주민투표 서명부를 근거로 주민투표 발의를 강행하려는 것은 과거 정치역사에 있었던 부정투표 행위만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우습게 보는 겁니다. 불법, 위법적인 주민등록 도용 및 대필은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세훈 시장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서 투표를 하고 싶은지도 궁금해집니다. 주민투표 실패를 하더라도 개인 비용도 아니고, 다음 대선이 아닌 다다음 대선을 위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일까? 어차피 실패는 잊혀지고 이름만 남는 게 정치판이라서?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다음 달의 주민투표도 불필요하지만 모든 결정은 주민투표를 접하는 서울시민에게 달렸습니다. 오 시장이 득의만만하게 주민투표용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하던 기자회견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주민투표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밥이 걸린 일이였고, 무상급식 반대투표에 이렇게 많은 의혹이 가는 표가 나왔는데 서울 시장은 이를 강행하려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혹시 이 사건이 잊혀지고, 또한 그 이름만 인지도로 남는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시민교육은 보편복지 논쟁보다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명신 기자는 서울시의회 의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