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추진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강정마을엔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다양한 이들이 함께 폭염의 여름을 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서울에서 왔고, 어떤 이는 프랑스에서 왔고, 또 어떤 이는 날 때부터 강정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평화를 지키겠다며 스스로 강정마을 찾은 이들을 '자발적 평화유배자'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강정마을로 자발적 평화유배를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
바람조차 뜨거운 7월의 제주도 강정마을 중덕해안. '길 위의 신부'로 알려진 문정현 신부가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스쿠터는 강우일 천주교 제주교구 주교가 선물했다. '길 위의 신부'가 강정마을 주민으로 새 삶을 시작한 것과 사제 서품 이후 처음으로 주소지까지 옮겨서 '민간인 마을'에 거처를 마련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그는 "축하 선물이 아니라 코가 걸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사제 서품을 받은 지 45년 만에 처음으로 주교님에게 받은 선물"이라며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은 "주민들도 신부님을 강정마을 주민으로 묶어두려고 여러 가지 코를 걸었다"고 거들었다. 동네에서 가장 쓸 만한 빈 집을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다. 문정현 신부는 그렇게 2011년 7월 자로 강정마을 주민이 돼가고 있다.
앞서 얘기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길 위의 신부'라고 부른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던 매향리,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 그는, 길 위에 있었다. 단군 이래 최대 매립사업이라던 새만금 방조제 사업으로 삶터를 잃은 계화도 주민들과 함께 그는, 길 위에 있었다.
'평화바람'이라는 유랑단을 이끌고 전국 60여 개 도시의 길 위에, 그는 서 있었다. 용산참사 피눈물 채 마르지 않은 슬픈 거리에, 그는 서 있었다. 85호 크레인에서 수개월째 '정리해고 무효'를 외치고 있는 '김진숙을 무사히 내려오게 해달라'는 190여 대의 희망버스와 함께 그는 부산 영도 아스팔트에, 서 있었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강정마을에 정착하다길이 자꾸만 그를 부르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스스로 길이 되고 있는 것인가.
"평택 대추리 싸움을 할 때였어. 'MBC 스페셜' 팀이 나를 주인공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며 한 달을 따라다니는 거라. 국방부, 미8군 앞 오만천지 차 몰고 돌아다녔는데 계속 따라다녀. 그러더니 어떤 날 전화가 왔어, 프로그램 제목을 정했다고. 그게 <길 위의 신부>야. 듣는 순간 딱 이거다 싶은 거야. 뭐랄까, 나의 좌우명이 생기는 것 같았어. 예수님은 '길 위의 사람'이거든. 발 닿는 대로 숙식을 하며 사람들과 함께 하셨지. 예수님에 비하면 난 풍요롭게 사는 것이지. 오토바이도 생기고, 살 집도 생기고…."길이 좌우명이 된 것은 근래지만 그가 길에 나선 것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에 대해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불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고 말았다.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바로 그날이다.
그날 '젊은 신부, 문정현'은 "초라하고 처절하게 노여워하는 유가족들의 눈빛"을 보았다. 이제는 고인이 돼버린 김수환 추기경·윤보선 전 대통령·함석헌 선생·윤형중 신부 등의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올렸다. 무자비한 사법 살인의 책임을 묻는 성명이었다. 그렇게 그는 길에 서기 시작했다.
어떤 길이든 처음에 나서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어느 구비에 이르면 그 많던 이들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터벅터벅 홀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길의 고독이다. 하물며 부당하게 집행되는 공권력과 맞서 싸우며 걷는 길이다. 숱한 고빗길이 파도처럼 몰려왔을 테고,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치 떨리는 밤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공권력과 부딪친다는 것은 탄탄한 벽 앞에 서있는 것과 같아. 힘으로 말하면 저것들에게 한방에 없어질 내가 어찌 됐든 무너트려보겠다고 벽 앞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여기 강정에서도 해군과 삼성과 대림이라는 벽 앞에 힘없는 주민들과 내가 서있어. 이런 경우를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들 하지.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바위도 달걀로 수없이 치니까 넘어지더라. 박정희 쓰러지고, 군사독재 무너지는 것 봐. 그러니까 처절하게 저항해야해. 예수님은 지극히 현실적이셨지만 한없이 낙천적이셨거든."달걀에게 '낙관'이 없었다면 바위에 제 몸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날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낙관은 그 자체로 희망이 되기도 하고, 연대의 밑거름이 된다. 지금도 도처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이겨보지 못했다"는 '길 위의 신부'를 애타게 기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 근거가 없더라도 '낙관'을 이야기하며 함께 벽 앞에 서줄 벗이 그립기 때문은 아닐까.
그는 대추리 행정 대집행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경찰 2만 명은 시커먼 제복을 입고 까마귀떼처럼 달려들고, 용역들은 하얀 헬멧을 쓰고 몰려오고, 하늘엔 헬리콥터가 사납게 날아다니고, 개천 너머에선 중장비들이 집어삼킬 듯 부웅 부웅 굉음을 내고….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몰라"하며 내뱉는 짧은 한숨 사이, 늙은 신부의 두 눈에 쓴 눈물이 잠시 스쳤다.
"강정의 평화는 살던 대로 사는 것"눈물, 측은지심이 없는 분노는 허망하다. 벗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이 가난한 연대는 삭막하다. 함께 울 줄 모르는 사랑은 걍팍하다. 함께 무너트려야 할 벽이 도처에 많은데, 그의 눈물로 위로받고자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길 위의 신부'는 왜 강정마을에 머물기로 한 것일까.
"강정마을은 대추리와 하나도 틀리지 않아. 아픈 곳이니까 온 거야. 몸이라도 함께 있어야지. 그게 우리의 신분이야. 가난하고 고통 받고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 이게 성직자의 본분이야. 하늘이 주신 신분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어? 성직자는, 사제는 항시 자유로워야해. 가난하고 고통 받고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주저 없이 다가설 수 있게. 묶여 있으면 못가잖아. 언제든지 길에 나설 수 있게 자유로워야해. 그래서 우리 종교에선 독신을 요구하는 거고. 유혹도 없는 건 아니지만 잘라내야지. 그래야 이렇게 올 수 있지." 그는 어느 강론에서 "오 주여, 당신 안에 쉬기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투스의 기도를 인용하며 "많은 이들이 가기 싫어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곳, 그런 자리들이야말로 교회가 있을 곳"이라고 역설한 적 있다.
열정의 궁극까지 자신을 온전히 밀어 올리며 쉼 없이 길에 나서는 그를 두고 어떤 이들은 '빨갱이 신부' 혹은 '폭력 사제'라고 한다. '길 위의 신부'와 '빨갱이 신부'라는 간극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치하지 않는 호칭처럼 서로 그리는 평화조차 다르다면 대체 평화란 무엇일까.
"해고 노동자들에게 평화는 자기가 열심히 일하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 장애인들은 불편하지만 우리가 가고 싶은 곳에 맘껏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 장애인에게 이동권이 보장되면 그것이 평화야. 대추리에서 평화는 올해도 내년에도 내가 농사짓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었어. 강정의 평화는 무엇일까? 살던 대로 사는 것이지. 날마다 보던 범섬 그대로 보고, 매일같이 놀던 구럼비에서 그대로 놀고. 그런데 그것을 콘크리트로 막아서 해군기지를 만든다고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저항을 하는 거야.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아. 빼앗길 때 빼앗길망정 온 몸과 온 마음을 다부려서 지켜야지. 난 그냥 거기 작대기 하나처럼 끼여 있는 거고.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그 많은 자동차들도 조그맣고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잖아. 사람들이 그렇게 함께 모여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모이면 큰 힘이 되는 것이거든." 길 위의 신부가 '강정상단 대행수' 자처하고 나선 까닭
'작대기 하나처럼 끼여' 지낸다는 그는 요즘 무척 바쁘다. 강정마을 주민이 되기로 작정하고 나서 벌인 '사업' 때문이다. 주민들이 잡은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주민들이 만든 전복젓과 소라젓, 참조기 등을 판매하는 것이 '주력사업'이다. 벌써 1500군데에 배송을 마친 상태다.
수익금은 강정마을에 기부할 예정이다. 그는 2007년에도 주민들이 잡은 갈치 등을 판매해 1300만 원을 강정마을에 기부했었다. 한 청년이 사업수완이 뭐냐고 물었다.
"그동안 자주 못 와서 미안하니까 막 호소하는 것이지, '강정' '강정' 외치면서. 이제부턴 여기 살아야 하니까 주민으로서 역할도 해야 하고. 호소문 쓰고, 전단이라도 만들어서 나눠주려면 돈이 필요하잖아. 절박하니까 하는 것이지." 청년은 "이제 '길 위의 신부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강정상단 대행수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거기, 그렇게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이. 강정에서 '길 위의 신부'는 그런 존재다. 사람들은 수시로 그를 찾아와 일을 부탁한다든가 상담을 한다.
오후엔 다큐멘터리 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감독들에게 쓰디 쓴 당부를 했다. 나중에 그럴싸한 작품 만들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강정 소식을 전해달라고. 매향리에, 대추리에 수천대의 카메라가 있었지만 그때그때 소식을 전한 카메라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졌다면 대추리가 그렇게 허망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처절한 절규가 너희들 작품 대상이냐?"길은 늘 사람들 앞에 놓여 있지만 누구나 길을 떠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홀연히 길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살 수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 없이 길 떠난 이는 만인의 벗이 되고자 자처한 이다. 마치 예수가 그러했듯이.
다행스럽게도 젊은 감독들은 '길 위의 신부'가 주는 쓴 조언을 '벗의 충고'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언제나 함께 머무는 벗처럼 사제들이 먼저 벗이 되는 삶, 종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길 위의 신부, 문정현'. 그가 다음엔 어느 길, 어느 고빗길에서 가난하고 아픈 벗들과 조우할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그가 어떤 소금으로 세상을 남을지 가늠할 뿐. '가난하고 고통 받고 빼앗기고 있는 이들'의 벗이 되어주고 있는 그에게도 참된 벗이 필요치 않을까.
"기를 쓰고 살지만 도무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살다 보면 그런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빼앗는 사람이고, 누가 빼앗기는 사람인지한눈에 보입니다.같이 울 수밖에 없습니다. 같이 탄식합니다.그들 곁에 머물며 해결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정현 신부 '2011년 사순절기 강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