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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주말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오후 9시 방송)의 황금란(이유리 분)과 월화드라마 <미스 리플리>(오후 10시 방송)의 장미리(이다해 분)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매력적인, 설득력 있는, 공감 가는 악역이 될 수 있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있었다'는 과거형으로 말한 건, 아쉽게도 그녀들은 이제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설득력 없는, 공감가지 않는 악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금란과 미리는 모두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 도박에 미친 아버지(길용우 분)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어머니(고두심 분)는 순댓국밥을 팔고 고시식당을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고, 어려서부터 그런 어머니를 도와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했던 금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서점에 취직했다.

새 삶을 살아가기보다 정원을 끌어내리는 데 혈안이 된 금란

 정원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금란.
 정원에 대한 열등감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금란.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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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업무능력과는 무관하게 대졸자보다 월급도, 퇴직금도 적었던 금란은, 그나마 버는 돈도 도박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온전히 만져볼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도박 빚을 대신 갚으라며 독촉하는 사채업자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던 금란의 그 텅 빈 듯한 눈동자에서,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도,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엿볼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금란이 살 부비며 살아온 가족이 있는 신림동을 떠나 부자 친부모가 있는 평창동으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그녀를 욕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가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림동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금란이 얼마니 피폐한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란이 45만 원을 주고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다듬었을 때, 용돈 3000만 원이 통장에 들어온 걸 확인했을 때, 화려한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가난 때문에 자신을 차버린 옛 남자친구 앞에 도도하게 등장했을 때, 시청자들은 '된장녀' 운운하기보다는 묘한 대리만족을 느끼며 그녀를 응원했다. 적어도 그녀가 친부(장용 분)에게 출판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며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을 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후 금란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만 골라하며 시청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정원(김현주 분)의 수첩을 훔쳐 그녀의 아이디어를 베끼고, 정원이 맡았던 신간 수정필름을 고의적으로 훼손시켜 그녀를 궁지에 내몰았다.

끝내는 정원의 연인인 승준(김석훈 분)을 차지하기 위해 친부의 출판사 주식을 빼돌리는 짓까지 하고야 말았다. 더 나은 환경에서 새 삶을 시작한 금란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보다 정원을 끌어내리려고 안간 힘을 쓰는 사이, 그녀의 캐릭터는 평면적이고 전형적인 악녀로 전락했다.

그와는 반대로 조금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신림동으로 들어간 정원은 조금씩 그 집을 바꿔 놓는다. 도박중독자 친부에게서 도박을 떼어놓고, 시력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돕는가 하면, 매일 아침 마당에 종이박스를 넓게 펼쳐놓고 언니, 동생과 함께 요가를 하며 온 집안에 웃음꽃을 피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금란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패배감에 휩싸인다.

금란의 도를 더해가는 악행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반짝반짝 빛나는' 정원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장치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극 중반까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정원과 금란의 밸런스는 송두리째 무너졌고, 공감 가는 캐릭터를 보여줬던 금란은 매력 없는 악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드라마는 승준 모(김지영 분)의 악행을 동력 삼아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고 있다.

납득할 수 없는 미리의 거짓말에 시청자는 지친다

 거듭된 거짓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리.
 거듭된 거짓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리.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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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플리>의 미리는 헤쳐 온 풍파의 경지가 금란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진 않은 인물이다. 어머니에게 버림 받아 고아원에 들어가야 했고, 친구 대신 입양된 곳에서는 무능력한 양부 탓에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술집에서 청춘을 보낸 미리의 인생 전반부는 그야말로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수준이어서, 누구라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불과 몇 회 만에, 입사 면접장에서 자신을 성추행하려던 면접관을 향해 일갈하던 미리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미인계도 서슴지 않는 인물로 바뀌어 버렸고, 세차장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던 미리는 남자 하나 잘 만나 팔자 고치려는 '꽃뱀'이 되어 있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급작스러운 변화에 그녀를 응원하던 이들은 어느새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미리가 명훈(김승우 분)에게 동경대를 졸업했다고 최초의 거짓말을 하고 룸메이트 희주(강혜정 분)의 졸업증명서를 위조했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고졸 학력 때문에 취업에 번번이 실패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호텔에 취직한 이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대신 계속해서 거짓말을 반복하고 철저하게 명훈에 기대어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다.

호텔 홍보모델이 된 것은 모르는 척 명훈에게 넌지시 운을 띄우고, 그 일의 책임자인 유현(박유천 분)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명훈의 연줄과 희주로부터 훔쳐낸 그녀의 포트폴리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회장님이 드실 간장게장을 손으로 발라드린 것 외에, 그녀는 14회 동안 자신의 능력을 인상적으로 발휘하는 장면을 단 하나도 보여주지 못했다.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해도 그녀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그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도 조금도 가련하지 않다. 이제 시청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응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그것만이 궁금할 뿐이다. 장미리의 거짓말이 <미스 리플리>를 이끌어가는 유일한 동력임에도 드라마는 그녀의 거짓말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는 데 실패했다.

막바지에 다다른 <반짝반짝 빛나는>과 <미스 리플리>는 금란과 미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어떤 형태로든 구원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내밀어진 구원의 손길을 잡고 납득할 수 없는 행동으로 곤두박질 친 그녀들에게 또 한 번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진들, 시청자들은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잘 만들어지길 기대했던 두 드라마가 이렇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유리#이다해#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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