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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돌 속의 머슴부처 하나 장승처럼 서서
바람으로 눈이 덮인 산길을 쓸고 있다
전생에 무슨 업보로 염병할 천연두라도 앓았던 것일까
왕 곰보의 보기 흉하게 얽은 얼굴에는
눈물이 살을 파고들어 진 고름이 질질 흘러내린다
열반에 드는 일도 저와 같은 고역일 것인데
이중 삼중 고행을 하고 있는 머슴 부처,
사람의 손때 묻은 가사자락에
몹쓸 담뱃불에 덴 흔적이 흉터처럼 남아 있다
부처들도 일하는 부처,
노는 부처, 공부하는 부처
따로 따로 어울리는지
외따로이 떨어진 외로운 산비탈에서 서서
눈길만 쓸고 있는 머슴 부처,
팔이 달아난 줄도 모르고
싹싹 빗질하는 아릿한 소리
눈이 덮인 산길 어느새
피가 배여 나와 황톳물이 질척거린다
<운주사 머슴부처>-'송유미'

운주사 머슴부처
 운주사 머슴부처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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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지형은 떠가는 배((行舟)와 같으니 태백산, 금강산은 그 뱃머리이고, 월출산과 영주사(한라산)은 그 배꼬리이다. 부안의 변산은 그 키이며 영남의 지리산은 그 삿대이고, 능주의 운주(雲柱)는 뱃구레(선복(船腹)이다. 배가 물 위에 뜨려면 물건으로 그 뱃구레를 눌러주고 앞 뒤에 키와 삿대가 있어 그 가는 것을 어거해야 그런 연후에 솟구쳐 엎어지는 것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다.

이에 사탑(寺塔)과 불상을 건립하여 그것을 진압하게 되었다. 특히 운주사 아래로 서리서리 구부러져 내려와 솟구친 곳에 따로 천불 천탑을 설치해 놓은 것은 그것으로 뱃구레를 채우려는 것이고, 금강산과 월출산에 더욱 정성들여 절을 지은 것도 그것으로써 머리와 고리를 무겁게 하려는 것이었다."-<조선사찰자료>에서

그 때만 해도 운주사 가려면 대중교통이 쉽지 않았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낡은 승용차는 그만 이유도 없이 썩은 호박처럼 퍼져버렸던 것이다. 요즘처럼 핸드폰도 없었고 삐삐도 흔치 않았던 그때 그 시절,시골길이라 공중 전화기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

때마침 눈까지 펑펑 쏟아지는데 겨울바람은 장난이 아니게 손과 발을 꽁꽁 얼게 만들었다. 같이 온 일행들은 어찌할 바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지나가는 차량도 보이지 않고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일행들의 얼굴은 겁을 먹은 빛이 역력했다.

때마침 별빛처럼 반가운 불빛 하나 보였다. 그 불빛을 따라 모두들 뛰었다. 그 불빛의 임자는 요즘에는 잘 볼 수 없는 '구멍가게'였다. 일행들은 마치 '백척간두 진일보'와 같은 처지에서 정말 구세주를 만난 것이었다. 그 일이 약 30년전 일이 된다.

화순 운주사
 화순 운주사
ⓒ 화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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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가 오늘날처럼 널리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황석영 소설 <장길산;1974∼1984년에 걸쳐 한국 일보 연재>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70년대 군사 독재 권력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억압을 받았던 시대와 역사적 배경이 비슷한 18세기 숙종 왕조 때의 의적 '장길산'의 생애를 다룬 소설.

황석영 작가는 이 소설에서 천년사찰 운주사의 '천불천탑'에 깃든 설화를 차용하여 당시 민중들의 강한 생명에의 의지를 중첩시켜 형상화한다. 운주사의 설화 내용들은 변혁적 이미지가 강하고, 이 설화가 은유하는 메시지는 당시 우리의 민중 변혁을 꿈꾸는 생명력을 환기시켜 많은 독자로부터 인기를 얻게 된다.

물론 소설 <장길산>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이고 운주사의 창건 연대와는 그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나, 이 소설로 운주사는 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그리고 <장길산>의 작품의 뿌리, 운주사의 설화는 우리의 문화 유산 운주사 천불천탑을 감상하는 상상력의 폭을 확대시키는데 도움이 되겠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풍경 달다>-정호승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존재한다. 남북으로 터진 골짜기 안에 천불 천탑이 산재한다. 운주사는 도곡으로 내려가다 ( 대략 20쯤 달리다보면) 도암면 원천사 거리에서 강리 '중장터'에서 5리쯤 달리다 보면 천불천탑의 운주사가 나온다.

'중장터'란 지명은 중들이 장을 보았던 터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화순군의 운주사 주변에는 쌍봉사를 비롯하여, 나주의 불회사, 운흥사 등 광주의 증심사, 원효사, 영암의 도갑사, 강진의 무위사 등 많은 사찰이 있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으로 운주사는 과거 전라도의 땅의 불교문화의 요충지였음을 많은 역사가들이 추측하고 있다.

운주사(雲住寺; 구름이 머무는 곳). 운주사는 그 이름만으로 충분히 시적이라 하겠다. 운주사는 운주사(雲舟寺)로도 칭해진다. 고달픈 민중들의 염원과 기원이 배어 있는 천불천탑과 와불(臥佛)이 있어서  이곳에 오면 그 누구라도 피가 뜨거워지는 그런 간절한 소망의 터라고 하겠다. 

필자가 쓴 시, <운주사 머슴부처>는 2003년인가 <현대시문학>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후 <시향>이란 잡지에 좋은시로 뽑힌 적도 있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노래한 시인들은 너무 많다. 얼른 기억에서 떠오르는 작품은 고은 시인의 <운주사>,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 <후회>와 황지우 시인의 <구름 바다 위 운주사>,<산경을 덮으면서> 등이다.

그대와 운주사에 갔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워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후회>-'정호승'

운주사 와불님
 운주사 와불님
ⓒ 화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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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이다. "천불산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 석탑이 각각 일천씩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이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성종 12년(1481)에 찬진되고 중종 15년(1530)에 증보된 지리서를 이른다.   

운주사는 특이한 가람 구조를 가진 곳이다. 대웅전과 요사채를 겸한 집 한 채와 다른 건물 한 채로 되어 있다. 산문과 위엄의 사천왕의 신상(神相)도 없고, 천탑과 천불(石佛)들은 마치 오손도손 살아가는 마을 사람의 표정처럼 정겹다.

운주사가 있는 산 이름은 영귀산(靈龜山). 한문의 뜻 그대로 풀이하면 영험한 거북이 사는 산이 된다. 주위의 산들도 50m 이내이다. 운주사 정문 앞에서 50m 떨어진 밭 가운데 있는 연화탑(蓮花塔) 은 도지정 문화재 4호다. 4각 석실에 모신 미륵불이 도지정 문화재 9호이다. 석탑(石塔) 3개중 9층석탑이 제8호 도지정문화재이다.

'머슴 부처(미륵)'이 있는 곳은 산의 오른편 중턱이다. 유명한 와불은 바로 '머슴 부처'가 위치한 곳에서 한 10m쯤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이 와불은 부부불(夫婦佛) 로써 남편이 12m 이고 부인은 9m 가량이다.

비구름 끼인 날
운주사(雲舟寺), 한 채 돛배가
뿌연 연초록 화순(和順)으로 들어오네
가랑이를 쩌억 벌리고 있는 포구(浦口)
천불천탑이 천만 개의 돌등(燈)을 들고 나와 맞는다
해도, 그게 다 마음덩어리 아니겠어?
마음은 돌 속에다가도 정(情)을 들게 하듯이
구름돛 활짝 펴고 온 우주를 다 돌아다녀도
정들 곳 다만 사람 마음이어서
닻이 내려오는 이 진창
비구름 잔뜩 끼인 날
산들은 아주 먼 섬들이었네
<구름 바다 위 운주사>-황지우

운주사 천불
 운주사 천불
ⓒ 화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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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 대한 역사는 정확한 기록은 없고, 신라 52대 효공왕 때 영암구림(靈岩鳩林) 출신인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절이라고 전해 온다. 도선국사는 높은 도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대선사인데, 당(唐) 나라에 가서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처음으로 신라에 전파한 스님이며 후세의 한국 풍수지리설에 큰 영향을 준 인물. 운주사의 설화는 대부분이 이 도선국사와 연관되고, 전남 화순군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설화를 간결하게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의 산세(山勢) 를 관찰한 도선국사가, 높은 탑을 많이 세워 돛대를 삼고 짐(불상)을 많이 실어 놓으면 배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천불은 사공이 되어, 바다(고해)  향해 항해하면 풍파가 없으리라고 여긴다.

이렇게 도선국사는 동자승 하나를 데리고 와서 운주사의 절터를 다듬어 놓고,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 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즉각 천상으로 돌아가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혹시나 시간이 모잘라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절의 서편에 있는 일괘봉(日掛峯) 에다 해를 잡아 매놓는다. 이때 석공들이 열심히 탑과 부처를 만드는 곳으로 심부름을 하던 동자승이 지겨운 일에 짜증이 나서 그만 아무도 몰래 해를 풀어 주고 만다."

결말이 조금 다른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도선국사가 동자승을 데리고 와서 절터를 닦고 도력으로 부른 석공들의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가는데(어서 날이 새기 전에 와불의 마지막 손질을 위해서 바삐 일한다.) 그만 동자승이 닭 우는 소리를 '꼬끼오' 하고 지르고 만다.

그리하여 닭소리에 놀라 석공들이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그렇게 석공들이 천상으로 올라가버린 뒤에 살펴보니 탑과 부처가 각각 천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한다. 그 모자라는 부처가 '와불'이라고도 전한다.

화순 운주사 천불 천탑
 화순 운주사 천불 천탑
ⓒ 화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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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설 20cm,가 덮은 운주사(雲舟寺),
뱃머리 하늘로 돌려놓고 얼어붙은 목선(木船)한 척
내, 오늘 너를 깨부수러
오 함마 쇠뭉치 들고 왔다
해제, 해제다
이제 그만 약속을 풀자
내, 정(情)이 많아 세상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세상이 이 지경이니
봄이 이 썩은 배를
하늘로 다시 예인해가기 전
내가 지은, 그렇지만 작용하는 허구를
작파하여야겄다

2
가슴을 치면
하늘의 운판(雲板)이 박자를 맞추는
그대 슬픔이 그리 큰가
적설 20cm,
얼음 이불 되어
와불 부부의 더 추운 동침을 덮어놓았네
쇼크로 까무라친 듯
15도 경사로 누워 있는 부처님들
석안(石眼)에 괸, 한 됫박 녹은 눈물을
사람 손으로 쓸어내었네

3
운주사 다녀오는 저녁
사람 발자국이 녹여놓은, 질척거리는
대인동 사창가로 간다
흔적을 지우려는 발이
더 큰 흔적을 남겨놓을지라도
오늘밤 진흙 이불을 덮고
진흙덩이와 자고 싶다

넌 어디서 왔냐?
-<산경을 덮으면서>-'황지우'

운주사의 돌불상은 미륵불(미래불)이다. 56억 7천만 년 후에 이 세상에 당도한다는 미륵불이 도처에 서 있는 운주사. 그리고 무거운 지구를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은 식물인간처럼 일어서지 못하는 와불님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이고 합장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이 운주사의 와불님이 일어서는 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극락정토와 같이 가난한 민중들이 아무런 근심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시인들은 운주사의 천탑천불을 시의 소재로 많이 선택하는지 모르겠다.

운주사에 오면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자신 모르게 차가웠던 피가 불을 지피는 듯 뜨거워진다. 마음이 울적할 때나 괴로울 때 찾아오게 되는 전라도 화순땅의 운주사. 그 운주사는 우리 민중의 꿈과 희망이 기다리고 있는 땅이 아닐 수 없다.

천탑천불이 있는 운주사는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여느 절과 달리 외갓집 나들이처럼 찾게 되는 편안한 절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넉넉해져서 돌아오는 절이기도 하다.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서.'말이다.

운주사
 운주사
ⓒ 화순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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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도 못나
말 한마디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벗들이여 우리 새로 벗이 되자
우리가 밟은 땅 위에서
푸른 하늘이 되자
구름장 걷고
화순 땅
운주사 마른 풀밭 위에서
<운주사>-고은


태그:#운주사, #천탑천불, #장길산, #머슴부처,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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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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