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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남한 건너편은 북한땅을 연상하게 하는 임진강이 황해를 향해 흘러흘러가고 있다.
 한쪽은 남한 건너편은 북한땅을 연상하게 하는 임진강이 황해를 향해 흘러흘러가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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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강줄기지만 임진강은 조금은 다른 감흥을 주는 강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우리 땅,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우리 동포들이 임진강 너머에 있어서 그런 것일 게다. 내겐 임진강하면 영화 <박치기>(2006)가 늘 떠오른다.

1968년의 일본 교토를 배경으로 재일동포와 일본 청춘남녀 간의 갈등과 우정을 그린 '평범한' 영화인데, 극중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 기타를 치며 부르는 '임진강'(북한의 작곡가 고종환이 만듦)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한국말과 일본말이 섞인 어설픈 발음으로 부르는 노래였지만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게 하는 이 한 곡의 노래로 <박치기>는 내게 잊기 힘든 비범한 영화가 돼 버렸다.

그런 임진강을 만나려면 경기도 파주로 가야 한다. 보통은 경의선 전철을 타고 임진강역까지 가면 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방법으로 가보았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임진강이 가까운 파주시 적성면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것이다. 꾸밈없고 풋풋한 북한 아가씨같은 임진강변을 따라 마을과 들, 논과 밭, 고구려와 신라, 고려의 흔적을 지나 전곡읍에 있는 경원선 전철 전곡역까지 애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보았다.

우연히 알게 된 서울 은평구 불광역앞의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어디 지방 소도시의 작은 터미널처럼 수수한 모습에 매표소도 따로 없지만, 주말을 맞아 등산가방을 맨 사람들로 대합실이 시끌벅적하다. 왠일인가 했더니 버스 노선에 북한산 국립공원, 장흥 유원지, 송추계곡 등 놀러가기 좋은 곳들이 써 있다. 담배 한 대 피며 잠시 쉬고 있는 버스 기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자전거를 차곡차곡 접어 적성면행 버스에 가뿐하게 싣고 보니, 말이 시외버스지 마을 버스보다 조금 큰 아담한 버스다.  

임진강이 가까운 파주시 적성면에 가기 위해 찾아간 서울 불광동의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임진강이 가까운 파주시 적성면에 가기 위해 찾아간 서울 불광동의 서부시외버스터미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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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선상유람을 할 수 있는 황포돛배

도시의 마을 버스에 정작 마을은 잘 볼 수 없지만, 서부시외버스는 푸르른 논밭을 보여 주는가 하면 조리읍, 용주골, 웅담리…. 버스의 정차 안내 방송으로 듣기만 해도 정겨운 동네 곳곳을 훓다시피 달린다. 마침 내리는 소나기는 창 밖의 풍경을 더욱 정감어리게 하고 1시간 반이 넘게 국도, 지방도, 동네길을 구불구불 달렸지만 즐거운 버스 여행이 된 시간이었다.     

소나기가 장마때처럼 비를 쏟아부으며 적성면 버스터미널에 닿은 여행자를 맞아준다. 다행히 전날 기상청의 뉴스 예보를 들은 터라 미리 준비한 노랑 방수천을 꺼내 카메라, 핸드폰, 지갑 등이 들어있는 자전거 가방을 감싼다. 임진강가의 두지 나루터로 가는 길을 확인하려고 관광안내라고 써있는 작은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이곳은 택시 기사들의 쉼터. 하지만 누구보다도 주변 지리를 잘 아는 택시 기사 아저씨들 덕분에 자판기 커피까지 얻어 마시며 임진강변 관광안내를 받았다.       

임진강에는 황포돛배라 불리는 낭만적인 배가 다니고 있다.
 임진강에는 황포돛배라 불리는 낭만적인 배가 다니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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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같은 소나기를 맞으며 십여분을 달리자 푸르른 수풀 사이로 풋풋한 임진강이 나타난다. 게다가 강에서 황포돛배가 떠다닌다는 두지리 두지 나루터가 있다니 비는 오지만 여행이 기대감으로 즐겁다. 정말 강바람을 맞으며 물살을 가르는 길다란 돛이 달린 나무배가 강가에 보인다. 황포돛배가 조용히 떠있는 두지 나루터는 임진강의 풍취를 남다르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임진강 선상유람을 하기 위해 이 낭만적인 배에 올라 타며 어른 아이 할 것없이 흥미로운 표정들이다.

이 배는 임진강 8경을 보여 주며 강줄기를 따라 갔다가 돌아오는데 특히 석양이 물들 때 배를 타면 황금색으로 변한 임진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황포돛배는 파주와 마포나루까지 소금, 새우젓, 인삼, 콩을 가득 싣고 한양을 오갔다고 하니 옛스러움을 살린 배의 모습이 한층 더 멋스러워 보인다.    

모래톱에 들어가 강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며 달려간 풋풋한 임진강변
 모래톱에 들어가 강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며 달려간 풋풋한 임진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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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변에는 역사의 유적지가 많다 - 고구려의 성터 '당포성'
 임진강변에는 역사의 유적지가 많다 - 고구려의 성터 '당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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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가에서 만나는 옛 역사의 흔적들

두지 나루터를 나와 임진강 캠핑장이 있는 원당리를 지나다 보면 '호로고루 성지'라는 독특한 이름의 표지판이 보인다. 고구려가 백제와 한창 맞설 때 강가의 여울목에 지은 성곽으로 이 부근이 군사 요충지였나보다. 가까이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자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고려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물러난 순한 왕 경순왕의 무덤도 있다. 한눈에 봐도 왕릉답게 주변의 산들을 등지고 물(임진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다. 이외에도 임진강변을 달리다보면 고려 왕건시대의 '숭의전', 고구려가 지은 석벽 '당포성', 청동기 시대의 무덤 '고인돌'을 만나게 된다.  

뒤에서 스쳐 지나가던 병원의 구급차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더니 저 앞에 아예 정차하여 나를 기다린다. 창 밖으로 내밀어 흔드는 직원의 손짓이 친근하다. 아니나 다를까 수고하신다며 다짜고짜 있다가 집에 어떻게 갈 거냐고 자전거 여행 코스 질문부터 하는 자전거족이다. 여차하면 차에 자전거를 실어줄 태세다. 하긴 아직 자전거 여행자를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자전거 여행지로 치면 오지같은 곳이라고 할까. 자전거 얘기를 한참 나누다가 헤어졌는데 오늘 내 여행코스를 자기도 꼭 달려보겠단다.   

동네 경로당과 마을회관에서 물을 얻어 마시며 벼가 쑥쑥 자라고 있는 마을길을 지나간다.
 동네 경로당과 마을회관에서 물을 얻어 마시며 벼가 쑥쑥 자라고 있는 마을길을 지나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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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씨로 인해 자전거의 연료와 같은 물이 자주 떨어져 염치불구하고 전동리 경로당, 노곡리 마을회관에 들어가 물을 얻어 마신다. 동네길에서 지나치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면 보이는 반응이 재미있다. 어떤 분은 방금 전까지 굳어있던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인사로 응답을 하시고, 경운기를 타고 오던 어떤 아저씨는 '안녕하세요!' 하자 벌떡 일어나 뉘집 자식인가하고 나를 자세히 쳐다본다. 길옆 수풀과 나무들 사이에서 자기들 인사도 받아주라는듯이 풀벌레들과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다종 다양하게도 들려온다.

그렇게 마을사이의 길을 달리다가 '학곡리 고인돌' 표지판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골목길 사이로 들어가보니 청동기 시대에 무덤으로 쓰였다는 커다란 고인들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정말 오랜 세월을 지나온 듯 구멍이 숭숭난 돌의 표면이며 둔중한 형태가 예사롭지 않고 움푹 파인 돌의 윗부분엔 빗물까지 고여있는 모습에 경외감마저 든다. 옛날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거대하고 압도적인 모양새의 바위들을 보고 종교심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럴만하다 싶다. 재미있는 건 학곡리 고인돌은 동네 집들 사이에서 이웃 사촌처럼 친근하게 서있는 모습이다.

마을길가에서 옥수수며 호박, 과일들을 파는 주민들 옆 평상에 앉아 쉬어가기도 한다
 마을길가에서 옥수수며 호박, 과일들을 파는 주민들 옆 평상에 앉아 쉬어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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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임진강변을 달린 신통방통한 초록 거미 한마리
 함께 임진강변을 달린 신통방통한 초록 거미 한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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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고개를 넘어 마침내 전곡역으로

30도가 넘는 무더위는 지나는 마을들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듯 고요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자전거 여행자를 본 견공들마저 짖기는커녕 귀찮다는 표정이니. 길가에서 옥수수며 호박, 과일들을 펼쳐놓고 파는 알록달록 왜바지 입은 동네 아주머니는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모로 누워 낮잠 삼매경에 빠져 있다. 햇살도 피할 겸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보니 내 모습이 우스워 웃음이 나기도 하고, 햇볕에 타 까맣게 그을린 아주머니의 지친 얼굴에 마음 짠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늘 밑 평상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자전거 핸들쪽에 뭔가 꼬물거리는 게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세상에! 초록색의 거미 한 마리가 핸들 앞 케이블 사이에 거미줄을 치고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잘 안 보이게 거미줄을 치고 숨어있는 거미의 교묘한 기술도 놀랍고 더 놀라운 건 한참 동안을 이 녀석과 같이 자전거를 타고 임진강변을 달렸다는 거다. 햐~ 감탄하며 카메라를 들이대자 어느새 옆 담자락에 거미줄을 쐈는지 그리로 미끄러지듯 탈출을 한다. 

전곡역앞 건널목에 서니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전곡역앞 건널목에 서니 안도감이 들기도 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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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쳐 날씨가 말끔해서 강변과 마을길의 풍경을 마음속에 사진기에 담기 좋았는데 갑자기 앞이 잘 안 보일 정도의 소나기가 다시 쏟아진다. 미끄러질까봐 자전거 바퀴는 더디게 구르게 되지만 더운 여름날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맛보게 되기도 한다. 비를 피하며 사는 도시인이 언제 이렇게 온 몸으로 비를 맞고 날아오는 빗물에 얼굴 마사지를 받으며 달릴 수 있겠는가.  

설상가상 처음으로 눈앞에 언덕 고갯길이 나타난다. 자전거에서 내려 핸들을 부여잡고 빗속의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다. 누군가 여행길은 인생길과 비슷하다고 했다던데 이런날의 자전거 여행길은 인생 그 자체다. 이정표 없는 길을 달리며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다른길로 돌아갈까 우물쭈물 고민을 하고, 예상치 못한 비를 만나 걷다시피 페달질을 하다가 만나는 오르막 고갯길…. 게다가 이런 고갯길이 앞으로 세 개나 더 있다는 걸 예상도 하지 못한다.

어느 새 비도 그치고 오르막 고갯길은 땀을 식혀주고 말려주는 상쾌한 바람을 불어주는 내리막길로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을 해준다. 전곡역이 있는 전곡읍 이정표를 보니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아쉬움이 교차한다. 언제부턴가 임진강은 한탄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흐르고 있다. 야영장, 캠핑장이 있는 한탄강 유원지도 반갑고 나와 애마 자전거를 집까지 태워다줄 경원선 기차가 들어설 아담한 전곡역 역사가 포근하기만 하다.


태그:#자전거여행, #임진강, #두지나루터, #호로고루성 , #학곡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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