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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밤도 늦었는데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틈만 나면 국제결혼의 장점을 열 가지도 넘게 늘어놓던 녀석이었다. 몽골 사람의 특징은 어떻고, 필리핀은 또 어떻고, 베트남 여성의 매력은 무엇무엇인데 그것을 미리서 알고 결혼하면 누구라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즐거움이 있다나 어떻다나, 하여튼 그런 식으로 은근히 압력(?)을 가해오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한밤중에 제법 화가 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왔다.

 

"아니 형님, 어머니께서 말이에요.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지금 막 들었는데요. 이게 뭔 소리냐 싶어서 전화했거든요. 이게 뭔 소리래요?"

"어? 어어, 그렇게 돼 버리고 말았어."

"아니 그런데 왜 저한테 말씀도 안 하시고?"

"아 저기, 그게, 자네뿐만 아니라 일가친척을 빼고는 거의 안 했어. 정신도 없었고. 뭐 좋은 일이라고 여기저기 알리랴 싶기도 하고, 그냥 그랬어."

"그래도 그러시면 안 되죠. 저한테는 말씀을 하셨어야죠. 아니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결혼식에는 안 가도 장례식에는 가보는 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라는 얘기를 가끔 해 왔는데 그 말이 결국 내 발등을 찍었다. 할 말이 없었다. 어리버리 어떻게 진땀을 빼다시피 변명을 늘어놓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날 그가 집으로 처들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 달 전쯤에 무슨 복권이라도 당첨되었던 사람처럼 들떠 있었고, 말이 많은 남자였다.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더니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곧장 세부적인 소개로 넘어가고 있었다.

 

결혼도 못해보고 죽는가 했는데 어찌어찌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해서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고, 색시와의 나이차가 너무 많아서 자신이 악마 같다는 생각도 가끔 들기는 하지만 또 그것 때문에 색시가 보물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하여튼 이제야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어서 좋다고, 자랑인지 반성인지 정체가 모호한 자기소개를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는 낯선 사내 앞에서 나는 뭐라고나 할까, 요새 유행하는 말로 멍 때리고 앉았는 것밖에는 아무 할 짓이 없는 것이었다.

 

명색이 주인인 나의 심사야 어떻거나 저떻거나 알 바 없다는 듯 낯선 손님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어린 아내가 요새 자꾸 시름시름하는데 특정한 병명도 없는 것이 아무래도 풍토병 같다고, 병원을 몇 번 가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어서 자신이 동의보감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고, 그 결과 지렁이의 치유능력이 엄청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요즘은 매일 두세 시간씩 지렁이를 잡으러 다니는데 그 재미가 또 여간 쏠쏠하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느닷없이 "카하하하"라고 밖에는 번역이 안 되는 웃음소리를 추임새처럼 섞어가며 혼자 북치고 장구 때리며 노래까지 다 해버리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가 한국 말을 배운다고 배우고는 있는데 너무 진도가 없어서 요즘은 자기가 베트남 말을 배우는 게 낫겠다 싶어 어학공부를 시작했다고, 베트남 색시가 없었다면 '한국놈'이 언제 베트남 말을 배우겠냐는 둥, 어학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는 둥, 갑자기 무슨 지렁이울음 소리 같은 소리를 쏠라쏼라 한참이나 늘어놓고는 그것이 베트남 말이라고 우겨대는 둥 온 세상 '바보짓'은 혼자서 다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쓴웃음밖에 안 나오는 그 이상한 '원맨쇼'를 후배녀석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열심히 관람하고 있었다. 은근히 화를 내던 간밤의 전화 속 목소리와는 너무도 딴판인 후배녀석의 그런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녀석이 오늘도 나한테 국제결혼을 권하러 온 것이로구나, 그래서 이렇게 비슷한 연배의 산증인을 대동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되면 손님들과 마주앉아 있는 것 자체가 몹시 피곤한 일이 되어버린다. 현실종교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종교를 받아들이라고 찾아온 포교사나 전도사를 어떻게 하면 신속하게 돌려보낼 수 있는가 하는 고민 같은 것.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나 주물럭대고 있는데 베트남에서 날아온 어린 색시를 집에 두고 온 손님의 전화벨이 울렸고, 거기서 소금 얘기가 나왔다.

 

"아따 소금 푸러 가야 쓰겠네."

 

낯선 손님의 그 한 마디에 비로소 내 귀가 활짝 열렸다.

 

"소금이요? 어디로?"

"아 염전이죠. 비 오는 날만 빼고, 오후 4시 쯤이면 날마다 해요."

"아하, 그래요? 나도 갑시다. 따라가도 괜찮아요?"

 
 예나 지금이나, 북쪽이나 남쪽이나 소금창고는 똑같다
예나 지금이나, 북쪽이나 남쪽이나 소금창고는 똑같다 ⓒ 김수복

소금이라면 나도 역사가 제법 깊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협궤열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철조망 투성이의 수원 미군 비행장 옆을 지나 고잔벌을 지나 소래 포구에 내리면 한눈에 보이던 소금창고들, 빗물이 새지 않게 콜타르를 칠해서 시커멓고 흉물스럽기 짝이없는 외양과는 달리 너무도 하얗게 빛을 내는 결정체들, 소금이라는 이름의 보석들, 그것들이 어쩌면 그리도 서럽게 느껴지던지, 어찌 그리도 순결해 보이던지. 그 속으로 푹 들어가서 한 시간만 있다가 나오면 내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것 같았다.

 

그래서 틈만 나면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소래로 달려가곤 했다. 열차와 트럭이 부딪히면 항상 열차가 뒤로 밀려나는 그 앙증맞은 열차와 검은 소금창고는 어찌 그렇게도 궁합이 딱 맞는다고 여겨지던지. 그러나 한 번도 소금 속으로 파묻혀 보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려보지도 못했다. 그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국외자의 자세로 선망이나 하다가 돌아올 뿐이었다. 겁이 많아서였다.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오래 뒤에 고창으로 왔을 때, 다시 그런 유형의 소금창고를 보았다. 아, 고창에도 염전이 있었구나, 그렇게 감격을 하기는 했지만, 역시 국외자의 시선으로 그 옆을 지나다니며 보기만 했을 뿐 섞여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저것 호기심이 제법 많아서 아무나 붙잡고 묻기를 좋아하는 내가 소금만 보면 이상하게도 외경심 같은 것이 발동하면서 주춤거려지는 거였다. 그랬던 내가 너무도 뜻밖의 인연으로 소금밭을 직접 걸어볼 수 있게 되었다.

 

 바닷물의 때를 빼는 한편 염도를 높이기 위해 증발 중인 저수조
바닷물의 때를 빼는 한편 염도를 높이기 위해 증발 중인 저수조 ⓒ 김수복

가서 보니 염전 주인 또한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이었다. 큰애는 유아원생이고, 둘째는 아직 갓난쟁이라고 했다.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어머니가 사위의 초대로 건너와 계셨다. 얼굴만 놓고 보자면 장모님과 사위가 부부라 해도 안 믿을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소금일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나의 질문에 주인은 한동안 눈을 깜빡깜빡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만지고 뒹굴며 노는 곳이 소금창고였단다. 그러니 딱히 언제부터 그 일을 했는지 꼬집어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았다.

 

그의 부친이 소금에 손을 댄 과정은 다소 극적인 데가 있었다. 해운사업을 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에 뛰어들 무렵부터 그 뒤를 따라다녔단다. 그러다가 71년 박정희와의 맞대결 이후 갑자기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이 무서워서 정치와는 손을 끊고 남도의 다도해 인근 섬들을 옮겨 다니며 숨어 살았는데 그때 소금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푼 두푼 들어오는 품삯을 모아서 염전 사업을 해보자 생각하고 찾아다니던 끝에 정착한 곳이 고창이었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정착은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살림은 떠돌이 생활 때보다도 걍팍했다. 보기에 깔끔하고 예쁜 정제염이 식탁을 장악하면서 굵고 못생긴 천일염이 완전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천일염을 찾는 사람은 극소수 특이한 집단들로 한정되어 갔다. 당연히 염전은 속속 문을 닫았다. 문을 닫지 않는 사람은 바보로 인식되어 갔다.

 

 물 속에서 소금을 끌어모은 중
물 속에서 소금을 끌어모은 중 ⓒ 김수복

그렇다고 염전이 온전한 자기 재산인 것도 아니었다. 일종의 소작이었다. 대기업 소유의 염전을 매년 계약서에 새로운 도장을 찍는 방식으로 임대해서 운영한단다.  도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매년 계약갱신을 하듯이, 농촌의 염전 또한 그렇게 매년 계약 갱신을 한단다. 사측에 불리한 짓을 하면 언제라도 계약을 해지한다는 단서가 그 계약서에는 명기되어 있단다. 때문에 시설투자는 엄두도 못 내고, 그래서 위험요소도 상당하지만 손을 대지 못하고 그저 소금만 빼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바보로 살아 왔다.

 

그런데 금년에 느닷없는 바람이 불었다. 40킬로 한 포대에 7천원 8천원밖에 안 나가던 소금값이 갑자기 1만원 만오천원 2만원 하는 식으로 마치 술취한 캥거루처럼 껑충껑충 뛰어 올랐다. 일본에서 터진 핵발전소 사고가 준 이상한 선물이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떼부자 되었다고, 술이라도 사라고 하지만 우리는 다 알죠. 그렇게 사재기한 소금이 어디로 가겠어요. 무슨 설탕도 아니고, 소금을 설탕처럼 먹어댈 수는 없잖아. 웃겨요 웃겨. 생각해봐요. 이제 가격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일만 남은 것이거든."

 

하긴 그렇기도 할 것이다. 달을 따라서 이동하는 바닷물을 붙잡아 햇볕에 말리는 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눈에 그런 것이 안 보일 수는 없으리라. 바닷물이 들어와서 소금이 되기까지는 이십 일이 걸린단다. 바닷물이 수로를 따라서 들어오면 일단 저수조에서 몸을 씻는다. 물이 몸을 씻는다고 하면 다소 엉뚱한 표현이 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이다. 그것도 단번에 씻어내는 게 아니다. 세탁기 안에서 찌든때를 빼기 위해 세탁물을 불리듯이 깊은 물에서 고요하게 때를 불린 뒤에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거칠지만 다소 미세한 때를 빼고, 다음 단계로 들어가서 더 잔때를 빼고,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긁어모은 소금을 수북히 쌓아서 물을 빼고...
긁어모은 소금을 수북히 쌓아서 물을 빼고... ⓒ 김수복

그렇게 다음, 다음, 넘어가기를 열세 번이나 하고 나면 비로소 자격이 주어진다. 깊이 있고, 품위도 있고, 무게감도 있는 짠물이 되어 타일이 깔린 아름다운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끄떡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거센 바람도, 제아무리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도 이미 무게감을 갖춘 짠물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한다 해봐야 기껏 파문이나 살짝 일으킬 뿐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이제 막 내린 빗물은 가벼우니까. 가벼워서 저희들끼리 짠물을 건드려보다가 그냥 흘러 내려간다. 절대로 짠물과 섞이지는 못한다. 공부가 깊어진 사람이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가듯이, 짠물은 그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동의 자세로 가만히 때를 기다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눈부신 결정체, 소금을 거둬들이는 일은 노동 중에서도 가히 상노동이라 할 만하다. 바닷물이 잘 증발되라고 바닥에 검은 타일을 깔아놓은 탓에 그 열기가 보통이 아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과, 타일이 뿜어내는 복사열, 그리고 소금을 만들어내고 보호하느라 한껏 데워진 물이 삼위일체가 되어 사람을 삶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린다. 그 속에서 십 여분만 삽질을 하고 나면 온 몸의 근육이 펄떡펄떡 뛰면서 땀을 쏟아낸다. 그래서 예전에는 팬티마저 귀찮다고 벗어던진 올누드 차림으로 땀을 흘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 전설도 있지만, 요즘은 그것도 구경거리라고 관광객이 가끔 몰려오는 바람에 팬티커녕 위통 한 번 속시원하게 벗어던지지 못하고 얌전한 차림으로 작업을 한단다.

 

 물이 어지간히 빠지면 리어카에 실어 창고에 저장한다
물이 어지간히 빠지면 리어카에 실어 창고에 저장한다 ⓒ 김수복

입안에서 불이 난다 싶을 즈음쯤 시집간 딸 산후조리를 위해 베트남에서 날아오신 염전 주인의 장모님께서 베트남식 쥬스를 만들어 오셨는데 그 맛이 희한했다. 자잘한 얼음물에 꿀을 넣고 볶지 않은 참깨를 하얗게 띄웠는데 식초를 떨어뜨린 것인지 새콤달콤하면서도 이상하게 무슨 고기 맛이 느껴졌다. 아주 청량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느끼하지도 않은, 맛이 그렇다 보니 아주 청량한 음료를 마신 것보다는 그 시원한 느낌이 좀 더 오래 간다는 느낌이기도 하고 하여튼 묘한 음료였다.

 

날마다 오전이면 아내에게 끓여줄 지렁이를 잡으러 다닌다는 남자가 베트남 장모님과 더불어 사발을 깨트리고 있었다. 와하하하, 까르르르, 쏼라쑬라 쑬라쏼라. 베트남 말을 모르는 나로서는 베트남 말도 겁나게 시끄럽구나 하는 정도일 뿐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만은 금방금방 번역이 가능해서 한 마디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재미가 그렇게도 좋습니까?

 

"아 그거, 우리 마누라한테 지렁이 잡아다가 끓여준다는 얘길 했더니 저렇게도 뒤집어지시네."

 

 지친다 지쳐. 창고 안의 온도는 40도에 육박하지만, 그래도 바깥의 땡볕보다는 낫다
지친다 지쳐. 창고 안의 온도는 40도에 육박하지만, 그래도 바깥의 땡볕보다는 낫다 ⓒ 김수복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대목이 생각나서 또 물어보았다.

 

"그런데 애 엄마가 그, 뭐냐 그 지렁이탕을 좋아하세요?"

"에이, 지렁이라고 말하지는 않죠. 그냥 한약이라고, 보약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잘 먹어줘요. 약이란 것이 원래 맛이 없다는 것 정도는 그 사람도 아니까."

"아, 그렇군요. 한국인 여성들도 아마 지렁이라고 하면 안 먹을 거예요, 잉?"

"카하하하, 말만 들어도 석달 열흘은 밥을 못 먹겠지 머."

 

"근데 그걸 어디서 끓여요? 집에서는 어쨌든 들통나니까 안 될 거고."

"아따 김형도 참, 동네 시정 옆에다 솥단지 걸어놓고 장작불 때요. 동네 사람들은 다 알지 뭐. 나중에 이 사람들이 아마 그럴 걸? 우리 마누라가 다 낳아서 씩씩하게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그때 불쑥 그러겠지. 이 여편네 지렁이탕만 죽어라고 먹어대더니 힘이 아주 장사가 되었네. 카하하하."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까마득한 시절의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작은댁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무렵이었다. 집안의 장난 좋아하는 형님 한 분이 밭에서 일하다가 삽으로 구렁이를 얼결에 찍어서 잡게 되었는데 그것을 잘 구워서 할아버지에게 드리며 장어라고 말했다. 선운사 입구 갯가에서 아주 큰 풍천장어 한 마리를 잡았다고, 그러자 할아버지 왈 "아따 이놈을 으떻게 잡았다냐. 네가 효자다, 네가 효자다."하시면서 풍천장어표 구렁이 고기를 아주 맛나게 잡수셨다.

 

그리고 다음 날, 입이 근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진 형님께서 그만 묻지도 않는 말을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그러자 노발대발 화가 나신 할아버지, 명아주대로 만든 지팡이를 두 개나 치켜들고 "저놈  때려죽인다"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뒤를 쫓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마을에서 15리나 떨어진 고창읍내 장터까지 추격전이 벌어졌었다.

 

이 남자의 아내도 훗날 자신에게 지렁이를 먹인 남편을 잡아 죽인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려나? 나는 벌써부터 그것이 궁금해지고 있었다.

 

 일을 마친 뒤의 노을은 어찌 이리도 꿈결 같은가
일을 마친 뒤의 노을은 어찌 이리도 꿈결 같은가 ⓒ 김수복

 


#지렁이탕#베트남아내#천일염#소금값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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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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