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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아무래도 여행을 초반에 끝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차가 내려 앉았다."
"…, …, …"

27일 아침 산타페의 유스호스텔 주차장에서 '아들 셋'에게 차에 이상이 생긴 사실을 털어놨다. 아이들을 데리고 주차장에 가 차체가 확연히 내려 앉은 왼쪽 뒷좌석 부분을 눈으로 확인시켜 줬다.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속으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나중에 차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때 가서 사실을 얘기할까,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체하며 덮어두고 달릴까 망설였던 것이다. 미리 알려주면 불안해할까 봐 그랬다. 

'아들 셋'은 아무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잠깐의 무거운 정적이 이어진 뒤, 윤의가 말을 꺼냈다.

"고치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원칙은 그렇지, 하지만 이런 종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이거 손대면 일주일 분 이상의 여행 비용이 날아갈지도 몰라."

윤의도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병모 선일이도 저희들끼리 얼굴만 서로 쳐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알다시피 내가 자동차 전문가가 전혀 아니잖니.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왼쪽 뒷바퀴 쪽의 쇼크 업소버가 나간 것 같다. 전부터 이 것이 성치 않았거든. 그래도 다행히 트레인 자체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몸 무게가 좀 나가는 병모가 일단 왼쪽 뒷자리는 피해서 앉도록 해라."

쇼크 업소버가 나간 탓으로 추정된다.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고치지 않고 그냥 달리기로 했다. 차가 좁아 무릎을 뻗지 못하는 윤의의 다리가 보인다. 여객기 이코노미석보다 좁은 이 차에서 아이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쯤을 보내야했다.
▲ 내려 앉은 왼쪽 뒷바퀴 차체 쇼크 업소버가 나간 탓으로 추정된다.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고치지 않고 그냥 달리기로 했다. 차가 좁아 무릎을 뻗지 못하는 윤의의 다리가 보인다. 여객기 이코노미석보다 좁은 이 차에서 아이들은 하루 평균 10시간쯤을 보내야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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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은 각자의 자리를 정한 뒤,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이 조망도 좋고 편할 것 같지만, 어느 자리 가릴 것 없이 발 밑에 한결같이 베개 2개쯤 부피인 침낭이 깔려 있으므로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네 명이 다 무릎을 펴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루 종일을 달리는 차 안에 있는 건 마찬가지이다. 다행히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하루 10시간 이상을 도로 위에서 보내도 멀미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원래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유스호스텔을 나서야 했었다. 하지만 전날 새벽 3시가 다 될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아이들은 아침 잠이 현저하게 부족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래서 잠을 좀 더 재웠다. 오전 9시가 다 돼서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했다. 아침 일찍 출발했다면 산타페 북쪽의 타오스(Taos)를 거쳐 로키산맥 남부의 험준한 산길을 너머 덴버쪽으로 갈 생각이었다.

타오스는 북미 원주민이 많이 몰려 사는 로키산맥 동쪽 기슭의 소도시 가운데도 원주민 정서가 특히 짙게 깔린 소도시이다. 흔히 어도비(adobe)로 불리는 흙집을 짓고, 푸에블로(pueblo)라 일컫는 마을을 형성해 사는 원주민 부족들의 삶의 터전이다. 과거 이 지역을 지나면서 느낀 것이지만, 유럽계 백인을 위시한 타지출신들에 대한 거부감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다. 인디언 보호구역 등 미국의 다른 원주민 밀집 지역과는 달리 이 곳에서는 외부인이 사진조차 함부로 찍을 수 없다.

이 곳 원주민들의 얼굴 표정은 북미의 다른 지역 원주민들에 비해 놀랄 만큼 전체적으로 무거운 편이다. 그런 걸 보고 뭔가를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었는데, 녀석들의 늦잠으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하나, 타오스 방문을 생략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이유는 2000~3000m 높이의 산 속으로 난 길을 넘어가는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차가 중량 초과 상태인데다, 왼쪽 뒷바퀴 차체가 내려앉은 상태라 사고가 나면, 지나가는 차도 매우 드물고 전화도 터지지 않는 깊고 깊은 로키 산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주변 평지는 온통 사막이라도 로키의 고산지대에는 나무가 무성하다. 뉴멕시코 주와 콜로라도 주 근처의 로키 산맥. 로키 산맥과 평행을 이루며 달리는 25번 주간 고속도로는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고속도로 가운데 하나이다.
▲ 나무가 제법 무성한 로키 산맥 주변 평지는 온통 사막이라도 로키의 고산지대에는 나무가 무성하다. 뉴멕시코 주와 콜로라도 주 근처의 로키 산맥. 로키 산맥과 평행을 이루며 달리는 25번 주간 고속도로는 풍광이 가장 뛰어난 고속도로 가운데 하나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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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산을 넘지 않고 시원하게 남북으로 뚫려있는 25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25번 주간 고속도로는 남쪽으로 멕시코 국경부터 북쪽으로 캐나다 근처까지를 이어준다. 로키산맥의 동쪽 사면 중턱에 얹혀진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간 고속도로 가운데 하나이다. 출발 전 배터지게 유스호스텔에서 공짜 '아점'을 먹여 놓았더니, 예상대로 차가 출발한지 30분도 안 돼 셋이 약속이나 한 듯 잠에 빠져든다. 아예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녀석도 있었다.

새벽 3시 안팎에 잠 들었으니 차 속에서 잠을 보충할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그래도 먹성 좋은 녀석들의 배를 공짜로 채워주고 길을 나서니 왠지 뿌듯했다. 모든 유스호스텔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젯밤 묵었던 산타페 유스호스텔은 냉장고의 음식을 마음껏 돈 안내고 먹을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한창때라 아들 셋은 싸구려 패스트푸드를 사 먹여도 한 끼에 35달러 안팎의 지출이 불가피했는데 그만큼 절약한 셈이다.              

먼 길을 가는데, 출발하기 무섭게 모조리 잠 들었으니 오늘도 영락없는 생 홀아비 주행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단백질과 지방의 합성체이다. 죽은 듯 잠에 빠져든, 경륜이라고는 있을 리 만무한 스물을 갓 넘긴 젊은 친구들은 더욱 그런 느낌을 강하게 준다.

숨쉬는 '고기 덩어리'들을 옆에 두고 나는 홀로 차장을 스쳐 지나가는 풍광들을 즐긴다. 로키는 계절을 가릴 것 없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로키와 내내 평행으로 달리는 25번 도로는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해발 3000m 안팎의 높은 산들이 줄지어 선 풍경이 그토록 정겨울 수 없다. 로키의 그 고봉들이 마치 25번 도로와 평행으로 달리는 기차의 객차들 같다. 쉬지 않고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다. 높은 산들은 구름을 품고 있을 때가 많은데,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갖은 모양의 몽실몽실 새하얀 구름들이 산 중턱과 정상 부근의 상공을 서성인다. 

로키 산맥의 품안에 있는 미국 공군사관학교. 산중턱부터 평지까지 캠퍼스 규모가 엄청났다. 구내에서 이동할 때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컸다.
▲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 로키 산맥의 품안에 있는 미국 공군사관학교. 산중턱부터 평지까지 캠퍼스 규모가 엄청났다. 구내에서 이동할 때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컸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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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저마다의 '여행감대'가 있는지 모른다. 나에겐 자연과 교접보다 이 세상에 더 좋은 게 없다. 남녀의 결합은 저리 가라다. 뒤 끝이 없는, 아니 아예 끝이 없는 열락과 환희를 가져다 준다. 그러니 옆자리에 잠들어 있는 젊은 단백질 덩어리들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새벽 3시에 잠든 게 아니라, 밤을 홀딱 새웠어도 나라면 한 컷을 놓칠세라 게걸스럽게 이 모든 풍광을 가슴으로 또 온몸으로 정신 없이 쓸어 담았으리라.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일이만, 1993년 가을 첫 미국 출장 때 3일 밤을 한잠도 자지 않고 차를 몰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나의 넋을 앗아간 대륙의 풍광 때문이었다.

차체는 조금 기울어져 있어도 트레인이 괜찮아서인지 차는 25번 도로를 타는 동안 어느 한쪽으로 크게 쏠리지 않고 직진성을 유지하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 핸들에서 주기적으로 손을 떼는 버릇이 있는데, 바퀴가 기우는 듯한 느낌은 없다.

차가 무거워 가속이 힘든 탓에 에어컨을 1단에 놓고, 창문을 닫으니 엊그제 문을 열고 하루 종일 사막을 달렸을 때에 비하면 차 안은 침묵의 공간이다. 녀석들 여행을 보조하겠다고 자원해 시작한 대륙횡단인데 호사는 혼자서 다 누리고 있다. 고속도로 군데군데 교량 구간의 이음매 부분을 지나칠 때는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걸 제외하면.

교량과 아스팔트 도로의 이음매 부분에 흔한, 벌려진 도로 틈새에 순간적으로 차 바퀴가 들어갔다 튀어 오르면서 "쾅"하는 굉음이 날 때면 간이 벌렁벌렁한다. 그 충격이 어찌 큰지 장난감 같은 내 차가 공중분해 돼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설마 10년 된 중고차 타고 아들 셋과 미국여행 하다 횡사해 신문 대문짝만하게 나는 것은 아니겠지.' 

덧붙이는 글 | cafe.daum.net/talku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로키산맥, #차체, #고장,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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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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