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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24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강정마을에 경찰 병력이 속속 집결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7월 24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강정마을에 경찰 병력이 속속 집결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이주빈

웬만한 사람들은 꼬박 20년 전 노태우정권 당시 제주도 특별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됐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부터 제2의 하와이 또는 제2의 홍콩으로 탈바꿈의 실험장이 되면서 제주도민이 아닌 중앙통치권에 의해 원격 조정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7년 7월 제주도는 '제주특별자치도'라는 묘한 뉘앙스의 이름표를 달기에 이르렀다. 제주도가 특별히 자치역량이 있는 곳도 아니고, 도민들이 자청해서 중앙정부에 요청한 바도 없다. 이 고요한 남쪽나라에 어느 날 갑자기 주민투표라는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제주도'라는 이름에다 '특별자치'라는 관형사를 갖다 붙인 것이다.

결국 북제주군을 제주시에, 남제주군을 서귀포시로 통합시키면서 양쪽 시장을 도지사가 임명하는 아주 간편한 시스템으로 바꿔놓았다. 그래서 우리 제주도민은 그토록 거창하고 거룩한 제주특별자치도민이 되면서 시장과 군수의 투표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1991년에 날치기 통과된 '제주특별법'의 도마 위에 제주특별자치도가 고스란히 알몸으로 놓이면서 중앙통치권의 꼭두각시 놀이개가 된 것이다. 남들이 얼핏 듣기엔 무슨 특급민주주의 지자체처럼 포장해놓고는 실질적으로는 중앙통치권의 특별 관리지역, 즉 특별자치가 아니라 '제주특별타치(他治)'도가 돼버린 것이다.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생긴다면 공군인들 마다하겠는가

아름답게 보려면 딱 한 번만 보고, 제대로 보려면 두 번 세 번 눈을 씻고 봐야한다. 우리는 이쯤해서 '1991년 제주특별법 국회날치기 통과→2007년 제주특별자치도 행정구조 변경→한미 FTA강행추진→평화의 섬 선포→해군기지 문제대두'라는 일련의 사례들을 통시적 안목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의 해군기지건설문제는 그 각본 파일들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음을 유추해낼 수 있다.

"약대코끝 조심하라"라는 아랍권 속담이 있다. 약대(낙타)에 짐을 싣고 사막을 건너던 상인들이 사막 가운데서 조그만 천막을 치고 밤을 묵는다. 사막 밤공기가 몹시 차가워 낙타도 견디기 힘이 드는지, 사람이 자고 있는 천막 안으로 슬그머니 코끝을 집어넣어본다. 천막 안이 의외로 따뜻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낙타는 차츰차츰 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코끝이던 것이, 주둥이와 머리와 앞다리 그리고 몸통을 거쳐 결국 꼬리까지 천막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래서 상인들은 쫓겨나 밖에서 떨어야 하고, 낙타는 천막 안에서 느긋한 밤을 보낸다.

노일전쟁, 청일전쟁을 치르면서 일본은 집요하게 우리에게 대륙으로 건너갈 통로를 열어달라고 강요했다. 1930년대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위해 모슬포 공군기지를 만들고 7만이 넘는 병력을 이 좁은 제주 땅에 주둔시킨 바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전력만 봐도 제주도가 얼마나 군사요충지적 가치가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대륙을 겨냥했을 경우,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 부를 만치 최고의 군사적 요충지인 셈이다. 그것을 미국이 왜 모르겠는가.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의 전략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이를 당연히 부인할 것이다. 아니,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사시'라는 어휘가 한미군사동맹조약문구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상황이나 여건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전략거점으로 합리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것이 어휘의 속성이면서 유권해석문맥들의 장점이고 약점이다.

자칫 이 평화의 섬 제주도에 해군기지가 생긴다면 공군인들 마다하겠는가. 야금야금 이 평화의 섬이 군사요새가 되면서, 삼팔선을 기준했을 때 제일 안전한 후방이던 제주도가 급기야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최전방이 되고 만다. 그때야말로 도처에 장착된 장거리미사일이 이곳을 겨냥해 발사준비를 갖추게 된다. 앞으로의 전쟁은 과거처럼 이기는 쪽이 없이 양쪽은 물론 제삼자까지 죽게 만든다. 그래서 제주도의 군사기지화를 반대하는 것이다.

구시대적 어휘들로 도민들 자존심 긁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정마을 중덕해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길천 작가의 그래피티 작품. 이 작품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를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다.
강정마을 중덕해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길천 작가의 그래피티 작품. 이 작품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를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다. ⓒ 이주빈

얼마 전 도내 한 논객의 글에서 참여정부당시 책임 있는 인사들의 말 바꾸기를 꼬집으면서 이제 도민에게 정식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어떤 압력(?)에 의해 스스로의 정치철학이나 중심개념을 쉽게 포기해버리는, 정치인들의 면면들을 똑바로 지켜봐야 한다. 권세는 권좌 뒤에 있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저들 정치인들에게 말 바꾸기를 종용하는 어떤 '몸통'이 존재한다는 것도 가늠해내야 한다.

한 번도 미국에 가본 일 없이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두어 차례 미국을 다녀오더니, 세계 힘 있는 나라들이 그토록 기피하는 미국과의 FTA를 자청해서 나섰던 사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에 해군기지유치문제가 대두된 것도 바로 그 시점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우리는 또 한 번 중앙통치권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그 어떤 큰 손의 외압을 감지하기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조상대대로 오순도순 살아오던 한 동네 이웃사촌들끼리 해군기지 문제로 멱살 잡고 싸우고 있어도 현 정부에선 국책사업임만을 내세울 뿐, 지역주민과 죄 없는(?)해군에게만 싸움질 시키면서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잖은가.

이제 해군기지건설이 초읽기에 들어가서야 도지사와 도의회 의장 그리고 제주출신 국회의원, 한나라당제주도당대표 등이 갈등해소방안을 찾아보겠노라고 한자리에 앉았다. 거기에서 기대 이상의 의견이 나올 리가 없다. 설령 대통령이 나선다 해서 이 갈등이 해소될 성질의 것인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갈등해소방안 운운하는 것은 책임 있는 자들의 하나의 요식행위요 몸짓이라는 것을 도민들은 벌써 알고 있다.

언제 어디서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들이 중앙통치권의 자원봉사자라는 느낌으로 비춰져선 곤란하다. 이제 더 이상 안보니 경제발전이니 하는 구시대적 어휘들로 도민들 자존심을 긁지 말았으면 좋겠다. 군사시설과 경제는 상조(相助)적이 아니라 길항(拮抗)적 개념이어서 전혀 궁합이 맞지 않다는 것이 한결같은 필자의 생각이다. 경제수치만으로 선진대열에 낄 수 있다는 그 후진적 사고를 버렸을 때 비로소 제주는 물론 조국의 올바른 미래가 보일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제주도민은 해군과의 개인적 감정은 추호도 없다
해군기지건설은 강정만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의 문제, 아니 한반도 전체의 문제다. 거기에다 필요성, 입지선정의 적정성, 선정과정의 민주성, 법과 절차상의 문제, 평화의 섬이라는 이미지의 모순 등 어느 것 하나 타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사문화의 직각보행 군홧발을 막으려는 것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 제주도 도민들은 바다를 사랑하는 것만큼 해군을 사랑한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1970년대 초 3년간 함상근무 중에 유격, 공수훈련 받았던 신병136기 해군 병장 출신임을 밝힌다. 그래서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은 해군당국이 의지가 아니라, 군대의 속성상 오로지 상부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해군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도 남는다. 따라서 제주도민은 해군과의 개인적 감정은 추호도 없다는 점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

오로지 바다와 땅만을 일구면서도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롭게 고향을 가꾸어 온 강정마을 사람들을 기억한다. 빛나는 수평선 밖으로 사시사철 은어 비늘을 튕겨 올리는 강정천의 시린 물살을 기억한다.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돛대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의 노랫말을 기억한다. 그 아련한 그리움은 영원토록 도민들 가슴에 살아 출렁거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제주도를 몸으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우리 제주도민에게 거는 최대의 기대치인 것이다.

요즘 수명이 짧은 단어 셋이 있다면, 바로 '인기'와 '유행'과 '권력'이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 '정의'와 '진실'과 '사랑'이라는 비문(碑文)을 가슴속에 새기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군기지 건설을 맨몸으로 막다가 구속된 강정마을 주민들, 법정투쟁 단식투쟁에 모든 것을 바치는 젊은이들, 이 반대운동 모금을 위해 개당 7천 원짜리 티셔츠를 만들어 파는 여성단체 회원들의 눈물겨운 사연들 그리고 멀리 타도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격려를 주시는 한 분 한 분 깨어있는 정신들을 우리는 역사의 파일에 입력시켜 오래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특별자치도'라는 미명아래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제주 풍광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후손들의 눈망울 또한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고정국 기자는 시인이자 전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입니다.



#강정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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