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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레베츠 언덕 오르는 길

 차레베츠 언덕 오르는 길
 차레베츠 언덕 오르는 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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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코 투르노보는 아르바나시 마을에서 차로 5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우리는 차를 구시가지 한 가운데 버스정류장에 세우고, 니콜라 피콜로 거리를 따라 차레베츠 언덕으로 오른다. 이 언덕은 제2차 불가리아 왕국의 왕궁과 성곽이 있던 곳으로 중세 후기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왕궁터와 성모 승천교회, 볼드윈 타워 등이 남아 있다.

길을 오르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사자상이다. 1877년 벨리코 투르노보가 오스만 터키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해서 세웠다. 이 조각상의 옆에는 1186-1393이라는 연표도 함께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제2차 불가리아 왕국의 건국과 멸망을 의미한다. 이 기간 동안 벨리코 투르노보가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이 조각상을 지나면 벨리코 투르노보 성의 정문이 나온다. 이 정문에 서면 사방으로 조망이 아주 좋다.

 구시가지의 성모탄생교회
 구시가지의 성모탄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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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정문 사이로 성의 정상부에 있는 예수승천교회의 첨탑이 보이고, 성벽 왼쪽 아래로 도시를 S자형으로 감고 도는 얀트라강이 보인다. 이 강위로는 블라디쉬키 다리가 놓여 있다. 온 길을 돌아보면 벨리코 투르노보 구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구시가지에서는 1844년 건축가 콜리우 피체토가 민족의 부흥을 위해 만든 대성당(성모탄생교회)이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 이 성당은 1913년 재건축되었다.

정문을 지나면 두 번째 성문이 나타난다. 정문보다는 높게 쌓아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에서부터 제대로 된 성이 나타난다. 깎아지른 절벽에 약 3.5m의 성을 쌓고 그 위에 이슬람식으로 방어벽을 설치했다.

성문 안쪽에서는 말과 전통의상을 준비하고 관광객들을 부르는 상인들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완전히 성안으로, 길이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다. 가운데 길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예수승천교회로 이어진다. 오른쪽 길은 성벽을 따라 볼드윈 타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왼쪽 길은 역시 성벽을 따라 40인 순교자 교회로 이어진다.

예수승천교회

 성문 너머로 보이는 예수승천교회
 성문 너머로 보이는 예수승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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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중 가운데 길을 이용, 예수승천교회로 올라간다. 길은 울퉁불퉁하고 경사도 만만치 않다. 길옆에 집 모양의 기념물이 있어 살펴보니 불가리아 독립기념비다. 그 옆에는 종탑도 있다. 이들을 지나면 길은 더 가팔라진다.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 올라가기 쉽도록 했다. 나는 예수승천교회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찍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본다. 예수승천교회는 가는 곳마다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승천교회 앞에 이르니 오히려 교회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나는 교회 정문 앞에 선다. 다른 교회에 비해 정문이 작은 편이다. 정문에는 예수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조각이 상당히 현대적이다. 이 교회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건축가 보얀 쿠주포프(Boyan Kuzupov)에 의해 재건축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단과 벽면 역시 현대적이다. 내부와 외부 인테리어와 장식 그리고 프레스코화도 화가 테오판 소케로프에 의해 현대적으로 다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수승천교회
 예수승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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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승천교회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내부 작업을 마치고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이후 성소로서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성당 가운데 제단 자리에는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프레스코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승천이 있으려면 탄생이 있어야 하니 가장 중요한 위치에 탄생 그림을 갖다 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닥에는 월계수 나뭇잎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영광의 예수를 상징하는 것도 같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도 예수와 관련된 종교화와 불가리아 역사의 중요 장면을 표현한 세속화로 나눠진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세속화 한 점이다. 그림 속에서 사람이 벌거벗긴 채 거꾸로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현지가이드에 따르면, 불가리아 왕조 시대 왕비가 전장에서 공을 세운 장군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왕비가 장군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장군은 왕 때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왕비는 장군이 자신을 유혹했다고 왕에게 말해, 그 장군을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장군이 왕비 앞에서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군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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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승천교회는 11세기 말에서 12세기까지 수도원 교회로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교회는 칼로얀왕(1197-1207) 때 이미 대주교좌 성당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반 알렉산더 대왕(1331-1371) 때 재건축되면서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총대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러나 1393년 오스만 터키군이 벨리코 투르노보를 점령하면서 교회는 크게 파괴되었고, 그 후 폐허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위에 이야기한 대로 이 교회가 다시 지어진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왕궁과 왕실교회의 폐허

 폐허가 된 왕궁
 폐허가 된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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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승천교회 밖에는 네 군데 묘지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찾아보지 않고 바로 교회 아래에 있는 왕궁터로 향한다. 왕궁터는 현재 주추 부분과 벽체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왕궁터 앞에 설치된 안내판에 보니 왕궁 역시 성채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성안에 있는 궁성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방으로 높게 벽을 쌓고 벽안에 주거공간과 집무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안마당 쪽으로 왕실 교회를 지었다.

왕궁터에는 무대장치가 마련되어 있고, 벽의 한쪽에는 불가리아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 이곳에서는 가끔 음악공연이 열린다고 한다. 바닥에 나무판을 깐 정도의 무대장치고 객석도 없지만 야외무대로서는 괜찮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왕궁과 예수승천교회 사이의 공간이 넓고 또 완만하게 경사가 져 소리가 관객에게 잘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승천교회의 위용
 예수승천교회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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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옆에는 좀 더 큰 왕실교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폐허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이 왕실교회가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교회였을 것이다. 그러다 1200년 전후 예수승천교회가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다시 왕실교회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폐허를 보면서 우리는 나무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는 왕궁의 폐허와 예수승천교회의 위용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차레베츠 언덕을 내려오는 길

언덕을 내려오면서 보니 벨리코 투르노보를 감싸고 흐르는 얀트라강과 구시가지가 더 잘 보인다. 얀트라강은 불가리아 중부를 동서로 관통하는 발칸산맥(불가리아어: 스타라 플라니나)에서 발원해 북으로 가브로보, 벨리코 투르노보, 비얄라를 지나 도나우강에 합류한다. 총 길이는 285㎞이며, 전형적인 사행천이다. 그런데 그 정도가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가장 심하다. 얀트라강은 이곳에서 S자를 세 번이나 그리면서 도시를 감싸 흐른다. 특히 사라피나 하우스 지역에서 보면 강이 마치 세 줄기로 흐르는 것 같다.

 얀트라강
 얀트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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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지는 얀트라강이 180도 꺾어지는 지점에 있는 블라고예프 거리로부터 시작된다. 이 지역에는 민족부흥운동 시기(1762-1878) 지어진 관공서와 주택, 상가 등이 밀집해 있다. 특히 키르코프 광장과 라콥스키 거리 주변으로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한 고고학박물관, 민족부흥박물관, 민속박물관 등이 있다.

이들 구시가지 오른쪽으로 얀트라강을 건너면 트라페지차 언덕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성직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귀족들의 저택과 교회들이 많다. 그리고 구시가지 왼쪽의 스베타 고라 언덕에는 2차 불가리아 왕국시대(12-14세기)에 생긴 투르노보 학교가 있다. 이 학교의 연구 전통은 현재 키릴 메소디우스 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대학에서는 불가리아 어문학, 러시아 어문학, 역사, 예술 분야 전공이 유명하다.

 장미수
 장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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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내려와 다시 구시가지로 들어서니 기념품들이 우릴 기다린다. 벨리코 투르노보 재떨이, 머그잔, 접시가 보이고, 불가리아에서 유명한 장미유와 장미수가 보인다. 심지어는 장미 비누도 있다. 자수 제품도 많고, 불가리아 민담을 그림으로 표현한 패널도 있다. 그중 장미 관련 제품에 눈이 간다. 장미는 벨리코 투르노보 보다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60㎞ 떨어진 카잔루크(Kazanlak)에서 주로 재배된다. 전 세계 장미향수 원료의 70%를 카잔루크에서 생산한다고 한다.
     
발칸산맥의 남쪽 카잔루크에서 카를로보까지 이어지는 산록을 우리는 장미계곡이라 부른다. 이 지역은 날씨가 따뜻하면서도 건조해 장미재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악지역이어서 터키 지배하에 저항활동을 하던 지식인이 많이 숨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는 애국지사와 민족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반 바조프
 이반 바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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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는 이반 바조프(Ivan Vazov: 1850-1921)를 불가리아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부르는데, 그가 장미계곡의 소포트(Sopot) 출신이다. 그는 젊은 시절, 불가리아 민족부흥운동을 이끈 흐리스토 보테프, 나이덴 게로프 등에게 혁명정신과 문학을 배웠다. 1874년부터는 오스만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1875년부터 혁명위원회 멤버로 활동했다. 그러나 1876년의 봉기가 실패해 결국 루마니아 지역으로 망명했다.

그해 그는 그곳에서 최초의 작품 『프리아포레츠와 구슬라』를 발표했고, 이듬해 『불가리아의 슬픔』을 발표했다. 1878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터키로부터 독립했고,  『잊혀진 자들의 서사시』를 발표하면서 그는 정치적 문학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이후 정치잡지 <과학>과 <새벽>의 편집자가 되어 정치평론가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1889년 수도인 소피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1893년 소설『멍에(Under the Yoke)』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오스만 터키의 압제에 시달리는 불가리아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불가리아 최고의 고전이 되었으며, 이후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그것은 북한에서다. 한국어로 된 『이반 바소프 시집』을 불가리아에서는 볼 수 있다고 한다. 이후에도 바조프는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평생 불가리아 사회·문화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살았다.


#벨리코 투르노보#예수승천교회#이반 바조프#차레베츠 언덕#얀트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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